메인화면으로
'산 미구엘' 맥주에 담긴 필리핀 '슬픈 민주주의'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산 미구엘' 맥주에 담긴 필리핀 '슬픈 민주주의'

[유라시아 견문] 필리핀 : 속국의 민주화

피플 파워 vs. 가문 정치

다음 행선지는 필리핀이었다. 쿠알라룸푸르에서 마닐라까지, 남중국해를 가로질렀다.

바다를 마주하고 있는 이웃나라이지만, 국가의 성격은 전혀 판이했다. '아시아적 가치'를 앞장서 표방하는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와는 달리 필리핀은 '아시아 속의 서구'라고 할 수 있는 나라이다. 일단 국명부터가 '필리핀',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 2세에서 따 온 것이다. 마젤란이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세부에 정박한 이래, 필리핀은 말레이반도보다 멕시코와 더 가까웠다. 남중국해의 바닷길보다는 '스페인의 호수'라 불렸던 태평양의 겔론선 무역망이 더 촘촘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시아에서는 예외적인 천주교 국가이자, 영어를 공용어로 삼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인문 지리의 시각에서 보자면 아시아보다는 차라리 아메리카와 더 유사한 구석마저 있다. 스페인 300년과 미국 100년, '천주'와 '민주'의 결합이 오늘의 필리핀을 주조한 것이다.

마침 대통령의 국정 연설이 있었다. 매년 7월 마지막 주 월요일에 상하원 합동 연설을 하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의사당 밖에서는 다양한 시민 단체의 찬반 집회도 열리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접한 것이다. 루손 섬의 전통 의상을 차려 입고 의사당에 등장한 주인공은 베니그노 아키노 대통령이었다. 지난 5년에 대한 자평과 남은 1년에 대한 다짐이 연설의 주조를 이루었다. 필리핀은 6년 단임제이다. 차기 대선 레이스가 본격화된 것이다.

아키노 대통령이 대선에 승리한 것은 2010년이다. 바람을 타고 일어난 반짝 스타였다. 부모의 후광 탓이 컸다. 가문 정치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아버지 니노이 아키노는 필리핀 민주주의의 순교자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어머니는 필리핀 최초의 여성 대통령, 코리 아키노이다. 그래서 가문의 텃밭인 탈락(Tarlac)에서만 내리 세 차례 하원의원을 역임했다.

그러나 마땅한 업적은 없었다고 한다. 능력과 자질 면에서 후한 점수를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급부상한 것은 어머니 아키노 여사의 죽음(2009년) 때문이다. 장례식이 국장으로 엄수되었다. 그녀에 대한 향수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결국 혈육인 아들에게로 옮겨 붙었다. 하루아침에 유력 후보가 되어 대권을 움켜쥔 것이다.

돌아보면 어머니 아키노가 대통령이 된 과정도 판박이였다. 독재자 페르디난도 마르코스의 정적이었던 남편이 암살당하자, 전업주부로 살던 그녀가 대항마로 부상한 것이다. 결국 대통령이 된다. 1986년이었다. 그리고 1987년 '민주 헌법'이 입안된다. 역사는 당시를 '피플 파워(People Power)'로 기록하고 있다. 1972년 계엄령 이래 철권을 행사하던 마르코스 독재정부를 민중의 뜻/힘으로 타도했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얘기이다. 듣기에도 흐뭇하다. 그녀는 즉각 세계적인 명망가, 민주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이듬해 태국(타이), 대만(타이완),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서도 그녀의 이름이 종종 등장했다. (동)아시아의 민주주의 도미노를 촉발한 '87년 체제'의 원조였던 것이다. 아웅산 수치에 앞서 코리 아키노가 있었다. 그러나 그 달뜬 환호 속에서 가문 정치의 유산은 스리슬쩍 가리었다.

아키노를 가장 환대한 곳은 미국이었다. 1986년 9월 취임 후 첫 순방으로 방미 길에 오른다. 레이건 행정부는 그녀를 백악관으로 초청하여 '가족 만찬'을 베풀었다. 필리핀은 미국과 역사를 공유하고 이상을 공유하는 '형제국'이라 했다. 상하원 합동 연설의 영예도 부여되었다. 의원들도 '코리! 코리!'를 외치며 기립 박수로 환영했다.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이 끝내 아시아의 척박한 토양에서도 실현된 것이다.

약 30분 동안 진행된 유창한 영어 연설 또한 그녀가 'Made in USA'의 산물임을 확인해주었다. 남편이 암살된 83년부터 그녀는 3년 동안 보스턴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미국에서 교육받은 민주주의를 본토에서 완수시키고, 그 사상적/정치적 고향으로 귀환한 꼴이다. 여기서도 마르코스의 막후 지원자가 미국이었다는 사실은 교묘하게 은폐되었다. 아키노의 가문 정치와 미국의 후원 정치를 도려냄으로써 필리핀 민주주의의 대서사, '피플 파워'의 신화가 완성된 것이다.

▲ 필리핀 대통령의 상하원 합동 연설에 다양한 찬반 집회를 열고 있는 시민 단체. ⓒ이병한


식민지 근대화

월든 벨로(Walden Bello)를 만났다. 필리핀에 가자니 가장 먼저 떠오른 인물이다. 대학 시절부터 그의 글과 책을 종종 접했다. 비판적 사회학자이자 왕성한 현장 활동가로 반세계화, 반신자유주의, 반군사주의 운동의 최전선에 있었다. 권위 의식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마닐라 만이 내다보이는 아담한 야외 카페에서 맥주를 곁들여 담소를 나누었다.

백발이 성성한 그는 여전히 현역이었다. 요즘 가장 주력하는 사안은 중국의 인공 섬 건설 반대와 미군의 필리핀 재진입 저지였다. G2 간 알력다툼의 그림자가 필리핀에도 물씬 드리운 것이다. 다만 필리핀은 한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중국 봉쇄와 일대일로의 차단에 선봉대가 되고 있다. 동중국해에서 일본이 하고 있는 역할을 남중국해에서는 필리핀이 떠맡은 것이다. 그의 근심이 깊은 것은 이러한 치우침이 하루 이틀의 소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20세기, 100년의 업보이다.

필리핀이 미국의 식민지가 된 것은 1898년이다. 미국-스페인 전쟁은 20세기를 여는 일대 사건이었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힘의 축이 옮아갔다. 미국이 미국 밖에서 벌인 최초의 전쟁이기도 했다. 미군이 처음으로 태평양을 건너 아시아에 파병된 것이다. 그 후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 이라크 전쟁과 아프간 전쟁 등 미군은 아시아를 단 하루도 떠나지 않았다. 아시아야말로 미국의 새로운 프런티어였고, 필리핀은 그 첫 교두보였다.

그럼에도 미국은 유럽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최초의 독립국가라는 명예가 빛났다. 그래서 필리핀을 '점령'한 것이 아니라 스페인으로부터 '해방'시켜준 것이라는 담론을 적극 유포했다. 또한 자애로운 동화(benevolent assimilation) 정책을 펼쳐 필리핀의 근대화에 일조했다고 주장했다. 미국 판 '식민지 근대화론'이라고 하겠다. 꽤나 잘 먹혀들기도 했다. 필리핀 사람들은 대개 미국에 호의적이고 친근한 편이다.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감정은 말할 것도 없고, 인도인이 영국에, 베트남인이 프랑스에, 인도네시아 인이 네덜란드에 대해 품는 감정과 결이 매우 다르다.

우선 그들의 국가를 무너뜨리고 전통을 파괴했다는 실감이 덜하다. 미국 앞에는 스페인이 있었을 뿐이다. 그 전에는 '필리핀'에 견줄 만한 국가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필리핀에는 베트남 후에(Hue)의 황궁 같은 것도 없으며, 앙코르와트나 보로부두로 사원 같은 거대한 종교 건축물도 없다. 그래서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도 동원할 수 있는 저항의 자원이 부족했다.

독립운동의 거개가 민족사, 민족 문학 등 '정신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음을 상기해본다면 단일 왕조, 단일 언어, 보편 종교를 경험한 적이 없었던 필리핀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필리핀의 지배층조차 그 수백 년의 서구화 및 식민화를 통해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응당 미국의 식민지가 된 것에도 반감이 덜했다. 아니 오히려 미국식 근대화에 호감을 가졌다. 미국은 스페인에 견주어 훨씬 너그러웠다.

필리핀에 부임한 첫 총독이 윌리엄 테프트이다. 테프트-가쓰라 밀약을 맺었던 바로 그 인물이다. 1900년부터 1913년까지 부임했고, 훗날 미국 본토의 대통령까지 되었다. 그는 총독으로 군림하기보다는 선교사의 태도로 임했다. 행정기구의 이름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영국과는 달리 식민(Colonial)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필리핀 업무를 담당하는 조직의 이름에도 '섬(Bureau of Insular Affairs)'을 강조했을 뿐이다. 그리고 '자그마한 갈색 형제들'에게 근대화의 혜택을 베풀었다. 항만과 도로를 건설해서 국민 경제를 통합하고 경제 발전을 이끌었다. 미국의 '원어민 교사'들을 전국에 파견하여 영어를 '국어'로 가르쳤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당선은 또 한 번의 변화였다. 본토에서 민주당으로 정권이 교체됨으로써 한층 '진보적인' 정책이 시행되었다. '필리핀의 필리핀화'가 시작된 것이다. 1907년에 의회가 생긴데 이어, 1935년에는 자치권도 부여받았다. 10년 후에는 독립도 약속받았다. 더불어 민주주의도 하사받았다. 아시아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라는 명예가 필리핀에게 수여된 것이다.

그러나 그 후과는 역설적인 것이었다. 독립 이후에도 문화적, 정신적 식민 상태가 지속되었다. 그것이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예속의 바탕이 되었다. 당장 마닐라의 주요 거리 이름부터 미국인들이 두드러진다. 테프트와 해리슨을 비롯하여 매킨리, 윌슨, 루스벨트 등 역대 대통령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나아가 록펠러, 포드, 에디슨, 맥아더 거리도 있다. 일상어에도 미국의 영향은 깊숙하다. 치약(Toothpaste)이라는 말 대신에 콜게이트(Colgate)가 통용될 정도이다.

▲ 필리핀 마닐라 테프트 거리. ⓒ이병한

문득 동두천 카투사 시절이 떠올랐다. 내가 근무하던 부서의 노총각 상사가 필리핀 아가씨와 결혼했다. 미군이 필리핀에서 철수하자 기지에 의존하며 살았던 여성들이 용산으로, 동두천으로 이주했던 것이다. 아이까지 낳았는데 동네 의사가 영어에 익숙하지 않았다. 내가 그녀를 데리고 산부인과를 들락거렸다.

주민들의 눈총은 따가웠지만, 이런저런 사담을 나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남편 따라 미국 가는 것이 걱정되지 않느냐고 묻자 의의의 대답이 돌아왔다. 서슴없이 '미국은 또 다른 고향'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인적 연결망이 넓게 퍼져 있었다. 미국에서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아시아인이 필리핀 사람들이다. 친척이나 친구 중에 캘리포니아, 일리노이, 뉴저지 등에 살고 있는 필리핀인들이 적지 않다. 인구의 약 10%인 1000만 필리핀인들이 해외에서 보내오는 '송금 경제'가 가정과 나라 살림의 주축이기도 하다. 지금도 매년 300만 명의 필리핀인이 미국을 방문하고, 400명을 뽑는 미 해병대에는 필리핀 출신만 10만 명이 지원한다.

내 짧은 회고담에 벨로는 한 술 더 뜨는 일화로 화답했다. 1980년대 그가 오래 교유하던 한 마오이스트 반군 지도자가 감옥에서 탈출하더니 베이징이나 하노이, 모스크바가 아니라 샌프란시스코로 망명하더라는 것이다. 그들은 마오쩌둥의 모순론과 실천론도 영어로 학습했다. 반체제 세력까지도 식민과 냉전이 빚어낸 지리 공간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91년 미군 철수가 마냥 달가운 일만은 아니었다. 미국 없는 필리핀에 대한 불안감이 사회 전반에 만연했다. 냉전기 필리핀에는 세계 최대의 공군 기지가 클락에, 세계 최대의 해군 기지가 수빅 만에 있었다. 그들이 하와이나 괌, 오키나와로 떠나자 필리핀 정부는 기지를 관광지로 재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퇴직한 미국 군인들을 초청하는 역설적인 정책을 시행했다. 현역 미군들이 떠난 지역 경제를 부활시켜 줄 구원자로 퇴역 군인들을 모집한 셈이다. 가령 수빅 만에는 정글 환경을 체험하는 생존 훈련 캠프가 차려졌다. 베트남 전쟁 당시 열대우림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 특별 훈련지로 삼았던 곳을 '에코 투어'의 현장으로 개조한 것이다. 관광객들에게 '람보'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베트남 전쟁의 기억 또한 굴절되었다.

이처럼 필리핀은 기지를 관광지로 전환하여 탈냉전기를 영위하다가, 재차 군사 기지로 변경시킴으로써 신냉전의 첨병이 되고 있다. 게다가 그 역설의 과정이 바로 어머니 아키노에서 아들 아키노로 이어지는 '민주화 30년' 동안 전개된 것이다. 내재화된 아메리카니즘이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 곡절의 세월을 복기해주던 벨로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마를 가르는 굵은 주름 사이로 막막한 좌절감과 외로움이 묻어났다. 나는 종업원을 불러 맥주 두 병을 더 주문했다. 그러고 보니 이 나라는 맥주 이름도 산 미구엘(San Miguel) 이다. 전통과 정통의 감각이 좀체 부족하다. 국가의 품격, 문명의 두께도 기대하기 어렵다.

ⓒ이병한

속국 민주화

필리핀은 서구의 제국주의 통치를 가장 오래 받은 나라 중의 하나이다. 300년을 걸치며 스페인인과 필리핀인 간에 탄생한 메스티조 가문이 21세기에도 명문가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 60여 개 집안의 재력이 1억 국민 경제의 절반을 차지한다. 독실한 '천주교'도이자 투철한 '민주교'도였던 아키노 집안 또한 이러한 필리핀 역사의 역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필리핀 판 '87년 체제'의 실상 또한 바로 이 가문 정치로의 복귀였다. 마르코스 독재 아래 숨죽이고 있던 지역 명문가들이 아키노를 앞세워 단일 정적을 무너뜨린 것이다. 그러고는 다시 가문 간의 이합집산이 시작되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직선제 또한 명망가 간의 대리전에 불과했다.

정당 정치 역시 허울이었다. 정당은 정책과 비전을 공유하는 이념 집단이 아니라,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토호들의 이익 집단이었다. 그래서 스페인 식민지 시절부터 형성되었던 봉건제적 속성이 민주주의 아래서 해소는커녕 더욱 강화된 것이다. 기실 지역 대표를 선출하는 민주제는 속 깊이 봉건제와 연속적이며 친화적인 구석마저 있다.

그리하여 필리핀 또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앓고 있다. 마닐라 시를 조금만 다녀도 극단적인 양극화, 격차 사회를 실감할 수 있다. 비버리 힐스를 흉내 낸 부촌은 철저하게 요새화되었다. 보통 사람들은 진입 자체가 차단된다. 그 밖으로는 슬럼의 바다가 넓게 펼쳐진다. 그래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이(有二)한 탈출구가 해외 이주 노동과 범죄라는 말도 있다.

한창 화제가 되었다는 독립 영화 <메트로 마닐라(Metro Manila)>의 부제가 "The most dangerous city in the world"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은퇴 이민을 간 한국인들이 표적이 되고 있기도 하다. 동남아시아에서는 드물게 야밤에 혼자 나다니는 것이 꺼려질 정도였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는 물론이요 베트남보다도 거너번스가 못하다는 인상마저 들었다.

이 같은 필리핀 민주주의의 실태를 일컫는 몇몇 학술 용어들이 있다. '저강도 민주주의', '대지주 민주주의', '엘리트 민주주의' 등 여럿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정곡을 찌르지는 못한다는 판단이다. 그래서 내각제로 헌법을 개정하여 정당 정치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 또한 공염불처럼 들린다.

내 보기에 필리핀 민주주의의 불구는 1946년 독립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는 필리핀의 '의존적 독립(Dependent Independent)' 상태, 즉 속국(Client State)적 속성과 깊이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배층이 자기 나라에 대한 책임감이 없다. 보수층이 자기 사회에 대한 자부심이 없다. 자생적 엘리트가 부재하고 기생적 엘리트가 대종이다.

20세기 전반기의 '식민지 근대화'가 20세기 후반기의 '속국 민주화'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하기에 민주주의 아래서도 재식민화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식민에서 독립으로', '독재에서 민주로', 라는 20세기의 거대서사 또한 실상을 가리는 기만적 언사, 이데올로기에 가까울 것이다.

벨로의 근심에 나의 수심도 덩달아 깊어진 것은 필리핀의 '속국 민주'가 전혀 남 일로만은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아시아 동맹국들이 겪고 있는 공통적인 증상인지 모른다. 게다가 최근의 동향은 불쾌한 기시감마저 일으킨다. 필리핀이 미국의 식민지가 된 것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것과 불가분이다. 미-일 간 부당 거래, 빅딜의 소산이었다.

언뜻 흡사한 판이 펼쳐지는 것도 같다. '속국 일본'은 기어코 안보법을 개정하여 자위대를 미군에 종속시키고 있다. '속국 필리핀'도 재차 미군을 자국에 주둔시키기로 했다. 일본-필리핀 양국 간 합동 군사 훈련 소식도 들린다. 때마침 자위대와 합동 군사 훈련을 해야 한다고 발설했다는 한국 해군 참모총장의 발언도 예사로이 들리지 않는다.

'민주주의 가치동맹'이라는 옛 노래가 다시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 20세기의 반복이고, 반동의 물결이다. 필리핀이 불안하고, 남중국해가 불길하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