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장(李鴻章·리훙장)은 중국 청나라 말기 최고의 권력자였다. 1823년 안휘성(安徽省) 합비(合肥)에서 태어난 그는 만주족이 지배했던 청나라에서 한족 출신 관료로 화려한 정치 생애를 보냈다.
그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린다. 어떤 역사가들은 외국의 눈치를 보고 국가를 망친 인물로. 어떤 사가들은 당시 중국에서 가장 먼저 개방을 주장한 인물로 평가한다. 역사적 인물의 평가는 어차피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는 법이다. 다만 역사 발전에 얼마나 기여했는가 여부가 인물평가의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다.
만주족이었던 청조 정권의 입장에서 보면, 이홍장은 자신들의 왕조 수명을 50년간 더 연장시켰던 한족 관료로 평가한다. 그만큼 청조에는 중요한 정치가였다. 그는 1847년 진사에 합격하고 1853년에는 단련(團練), 즉 고향 안휘성 출신들로 구성된 회군(淮軍)을 조직했다. 정부군보다는 고향 사람들로 조직된 군대가 힘을 발휘했으니 당시 청조 군대의 문제점을 엿볼 수 있다. 이들 회군은 청조에 저항했던 태평천국(太平天國) 운동을 진압하는 데 공로가 컸다.
이후 그는 1858년 호남성(湖南省) 출신의 쩡꿔판(曾國藩)의 막료로 관리 생활을 시작한다. 관리 생활은 탄탄대로였다. 1861년 강소순무(江蘇巡撫), 이어서 양강총독(兩江總督)에 임명되었으며, 마침내 1870년부터 직예총독(直隸總督) 겸 북양대신(北洋大臣)의 자리에 올랐다. 이 직책은 강력한 권력이 부여된 자리였다.
이홍장은 이 직책의 책임자로 청조의 외교, 군사, 경제대권을 한 몸에 장악할 수 있었다. 북양대신은 본래 남양대신(南洋大臣)과 함께 청나라의 군권을 쥐고 있는 자리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조정 최고 실력자의 자리였다. 그는 열강의 이해관계와 정치적 술수로 중국을 분할하려던 시기 청조 대외 정책의 실질적인 결정권자였다.
중국 <수주보(隨州報)>에 따르면 이홍장은 "내가 생각하기에 천하에서 가장 쉬운 일은 관료가 되는 일이고, 관료라도 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쓸모가 없는 사람이다"라고 종종 호기 있게 말했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관료가 되기도 어려운데 어찌 층층시하의 관료 사회 생활이 가장 쉬운 일이었을까? 아마도 자신의 관료 생애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친 것은 아닐까? 관료사회는 분명히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십 년간 평탄하고 화려한 고위 관료 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나름의 노하우가 분명히 있을 터이다. 1894년 청일 전쟁의 패배 후 그의 권력이 약화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 비법은 무엇일까? 그는 임기응변 능력이 뛰어났던 인물이었다. 청말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물결 속에 수많은 열강들이 병자와도 같았던 중국에서 더 많은 이권을 쟁취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시기였다. 그의 열강과의 다양한 외교 협상 경험이 임기응변 능력을 제고시켰을 것이다. 당시 중국의 대부분의 관료들이 수구적이고 융통성이 부족했던 점에 비해 그는 외국과의 업무를 보면서 보여줬던 발군의 임기응변 능력은 돋보인다.
그는 당시 신분 사회였던 중국에서 외국어를 배우는 일은 신분상 아랫것 들이나 하는 하찮은 일로 치부했다. 그럼에도 그는 외교 업무에 필요한 영어는 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어 이외에는 외국어를 잘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임기응변 능력은 외국어에서도 발휘된다. 그는 외국 사절을 접견하기 전에 사절 국가의 언어를 몇 마디씩은 꼭 배워두었다.
커닝페이퍼로 외국어 실력 과시한 이홍장
한번은 청조의 총리 신분으로 재정 러시아를 방문하게 되었다. 중국을 떠나자 모든 것이 불편했다. 배워야할 러시아어도 쉽게 기억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통역에게 러시아 고관을 만났을 반드시 대답해야할 표현에 대해 알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 말들을 자신이 들고 있는 부채의 살 사이사이에 커닝페이퍼처럼 써놓았다.
당시 이홍장의 부채에 써놓았던 러시아어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앉으세요!"는 "싸지쪠씨(殺鷄切細)" "감사합니다!"는 "쓰바시보(四包錫箔)" "춥다"는 "하우렁더나(好冷得哪)" "좋습니다!"는 "하우라오샤오(好老少)" "굿바이"는 "따스웨따리아(達四維大理也)"였다. 러시아어 표현을 기억하기 쉽게 중국어와 연결되도록 중국어 발음으로 써놓고 상황에 따라 부채를 드는 척하면 러시아말로 답했다고 한다. 물론 러시아 발음과는 정확하게 대응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홍장의 대응 방법이 귀엽기까지 하다. 그가 러시아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뒤 이러한 이야기를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처럼 했다고 하니 외국과의 그 많은 교섭에서 상대 국가의 언어부터 배우려는 노력은 평가할 만하다.
이홍장의 영어 실력과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중국 관료 사회에 아직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뒷담화다. 그가 한번은 외국 윤선을 타고 해외에 나갈 기회가 있었는데, 식당 칸에서 직접 메뉴판을 보고 음식 주문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외국어를 잘 몰라 급하게 메뉴에 적힌 것을 차례로 가리키며 네 가지 요리를 주문했는데, 아뿔싸 모두가 스프 종류였다는 것이다. 뒷담화의 백미다. 당시 뒷담화를 했을 관료들의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둣하다.
당시 청조 정부는 부패가 심했고 관리들의 아주 무능했다. 당연히 이런 뒷담화를 하는 관리들은 이런 이야기가 떠돌아다니면 무조건 믿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이홍장은 당시 외무장관이자 총리대신이었고 태자의 스승이기도 했던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영어를 매우 잘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홍장의 미국 국빈 방문
1896년 8월 28일, 그는 중국의 전권대표로 영국 여객선 '레이디 살롱(Lady Salon)' 호를 타고 미국의 뉴욕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의 방문 소식에 미국은 조야가 들썩였다. 당시 미국의 많은 언론사들의 기자들은 어떡하든 그와 관련된 '특종'을 얻으려고 난리였다. 그 가운데 <뉴욕타임스> 기자가 가장 민첩했다.
이홍장이 승선한 윤선이 부두에 접안하자, <뉴욕타임스> 기자는 그가 동승한 미국 아이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특히 승객 중 그와 가깝게 지낸 미국인 여성이 있다는 첩보를 확인하고 그 여성에게 접근했다. 그녀는 이홍장으로부터 친필 사인을 받기도 했다. 기자는 그녀에게 이홍장의 습관과 좋아하는 것을 물었다. 그녀는 이홍장이 미국 아이들과 배 안에서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고 전했다.
그녀에 따르면 이홍장은 같은 배에 동승했던 미국인 여자 가수들과도 자유롭게 대화를 나눴고, VIP실로 이 가수들을 불러 공연을 갖기도 했다. 이홍장은 이 여자 가수들에게도 자신의 사진에 친필 사인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이홍장은 여객선 안에서 외국 선박 엔지니어를 만나기도 했는데 조선(造船)에 관한 전문적인 대화도 나눴다. 이런 소식들을 종합해 보면 이홍장의 영어 실력은 매우 유창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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