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에서 살펴보았듯이 2007년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들의 정세는 매우 복잡하고 역동적으로 흘러가고 있다. 한반도에는 별 관심이 없으나 동북아시아에서 일극 패권을 강화하고 지속적으로 유지 하려는 미국은 일본을 영국 이상의 동맹으로 승격시키는 작업을 현재 진행 중이며 중국의 경제적 부상으로 동아시아 경제 리더십 자리를 위협받고 있는 일본은 미국을 등에 업고 '보통 국가'(normal nation)를 추진 중에 있다.
(…) 일본과 중국 간의 관계가 악화되고 더 나아가 적대적으로 된다면 미국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한국은 미-일 동맹 구조 속에 하위 파트너로 편입돼 있는 상태이고 지정학적으로 중국과 바로 인접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과 미국의 중국 견제정책의 최전방에 서게 될 것이다.
(…) 미-일 동맹의 하위 파트너로서 한국은 미-일의 중국 견제 정책에 최전방에 서게 될 것이고 한국의 의지와 현실과는 상관없이 중국과 대립적이고 적대적인 관계가 될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이미 2003년 이후부터 한국의 최대 수출, 투자, 교역 대상국이 되어 버린 중국에 대립한다는 것은 무역이 국가 경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한국으로서 결코 추진해서는 안 되는 자충수(自充手)다" (<중립화 노선과 한반도의 미래>, 207~209쪽)
이렇게 길게 책에서 나온 내용을 인용하는 것은 결코 책을 선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당시 한반도 주변정세가 변하는 것을 한국의 입장에서 살펴보고 한국의 국익에 부합하는 외교 노선 그리고 이에 맞는 노선과 정책을 탐구하고 있었다.
당시 내가 살펴본 한반도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른 '세력 전이'(power transition)가 일어나고 있었다. 중국에게 동아시아 경제 패권을 빼앗긴 일본이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로 중국을 견제하려 할 것이고, 미국 역시 중국의 부상을 좌시하지 않고 일본과 동맹을 강화하며 대응할 것으로 예상됐다. 중국이 부상한다는 것은 미국의 패권을 위협하는 것이며 미국은 패권국으로서 당연히 이를 제재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은 이것을 감지하고 돌연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으로 한국의 입지를 미국에게 부각시키려고 하였으나, 이것은 결코 한국에게 득이 될 수 없었다. 미국에게 있어 한국이 가진 지렛대의 무게는 일본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작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동맹 강화 정책은 오히려 미-일 동맹의 하위 파트너로서 중국 견제의 최전방에 나서는 것과 같다.
따라서 한국의 이러한 정책은 한국의 가장 큰 무역 대상국이며 그 중요성이 시간이 가면 더욱더 커질 수밖에 없는 중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갖게 되는 것을 초래하며 한국은 외교·안보 딜레마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새로운 사고에 기초한 외교 노선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 내 주장의 핵심이었다.
그 책이 2007년도에 출간되었으니, 지금부터 약 10년 전의 상황들을 분석하여 위와 같은 주장을 했다. 내가 예견한대로 가버린 작금의 현실은 나를 아연실색하게 한다. 사회과학자로서 미래의 상황에 대해 예견하고 그것이 맞는 것은 커다란 업적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예견한 것(만일 한국의 외교 노선이 친미일도(親美一途)로 치우친다면 한국은 심각한 외교· 안보·경제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한국에게는, 그리고 한국을 생각하는 모든 이들에게는 악몽에 가까운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책을 썼는데 그것이 10년 가까운 세월 속에서 현실이 되어 버렸으니, 절망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책에서 외교에서 중립화 노선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이 용인할 수 있는지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의 입장에서 분석하고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또한 중립화 노선을 추진하고 현실화하기 위해서 주변국들의 용인이 필요조건이라면, 내적으로 통합이 충분조건임을 논증하고 민주적 협동체주의 (Democratic Corporatism)에 의거한 새로운 정치 체제에서 사회 통합을 모색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결론과 주장은 나의 사상과 이념의 편향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강대국 사이에서 중립 노선을 택하고 강소국으로 거듭난 핀란드, 스위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경험을 근거로 내려진 것이었다. 이들 국가들은 여전히 굳건한 사회 통합을 바탕으로 세계에서 가장 잘살고 경쟁력 있는 국가들로 남아 있다.
그러나 한국은 어떤가? 사회 통합은 실종되고 무엇이든지 분할 통치(divide and rule)의 틀에서 경제 문제는 세대 갈등으로, 역사 문제는 좌우 갈등 등의 갈등의 정치만 만연할 뿐이다.
지난 2012년 4월 이후 3년 반 만에 한-일-중 3국 정상 회담 및 한-일 양자 회담이 한국에서 열렸다. 박근혜 대통령과 리커창(李克强) 중국 국무원 총리,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1일 청와대에서 제6차 한-일-중 3국 정상 회의를 열고 3국 협력의 완전한 복원을 위해 노력하자는 등의 내용이 담긴 '동북아 평화 협력을 위한 공동 선언'을 채택하였다.
또한 3국 정상은 공동 번영을 위한 경제·사회 협력을 확대키로 하면서 포괄적이고 높은 수준의 3국 FTA 협상 가속화를 위해 노력하고, 보건의료·문화 콘텐츠 등 고부가 가치 신산업 분야에 협력을 강화하는 것에도 합의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 선언이 실질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선결되어야 할 과제, 즉 일본군 '위안부' 문제, 남중국해 문제 등은 언급조차 되지 않아 한-일-중 3국이 한 자리에 모였다는 것 이외에 다른 의미를 찾기 힘들어 보였다. 그러면 왜 중국과 일본의 총리가 한국에 왔을까?
일본과 중국학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 이유를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작년 일본에서 열린 한-일 연구소 간 열린 비공개 세미나에서 어느 젊은 일본 연구자는 발표를 통해 한국과 일본이 손을 잡고 중국을 견제하자고 제안했다. 올해 10월 말 한국을 방문한 한 소장파 중국학자는 한국은 국익을 위해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과 일본이 이제 노골적으로 한국에 자신의 측에 확고히 서주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리커창 중국 총리와 아베 일본 총리의 한국 방문 그리고 한-일-중 3자 정상 회담은 그렇게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 대한 중국과 일본의 압박은 더욱 거세질 것이며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일본의 패권 다툼은 더욱 가시화 될 것이다.
앞에서 거론된 강소국 3국은 모두 민주적 협동체주의를 바탕으로 핀란드는 교육을, 스위스는 콤뮨(commune) 그리고 칸톤(Canton)이라는 지역 공동체를, 그리고 오스트리아는 노사(勞使) 간의 타협과 긴밀한 협력을 통해 사회 통합을 이뤘다. 이것을 토대로 중립 노선을 외교 정책으로 채택함으로써 강대국에 둘러싸인 악(惡)조건을 오히려 각자 국익에 도움이 되는 이점(利點)으로 만들었다. 3국 각국의 사회 통합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국의 앞으로 10년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중립화 노선과 한반도의 미래>에서와 같이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 예견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누구도 낙오되지 않는 틀에서 사회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한국의 미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암울할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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