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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장애 환자의 절규 "너희들은 무사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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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장애 환자의 절규 "너희들은 무사하길!"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②] 우리가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불안. 우리 시대를 딱 한 마디로 규정하는 단어입니다.

10대는 대학에 못 갈까 봐, 혹은 '왕따'가 될까 봐 불안합니다. 20대는 취직을 못 할까 봐 불안합니다. 30대는 전세가 오를까 봐 혹은 월세로 전환될까 봐 불안합니다. 40대는 언제 직장에서 쫓겨날지 몰라서 혹은 자신의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릴까 봐 불안합니다. 50대는 눈앞으로 다가온 은퇴 후의 수십 년이 불안합니다. 60대 이상은 그냥 모든 게 불안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불안과 함께 살아갑니다. 하지만 정작 그 불안을 정면으로 직시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남다르게 불안을 드러내는 사람은 '불안증'을 비롯한 별의별 병명의 정신 질환으로 판정되어 '비정상'으로 낙인이 찍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는 불안과 함께 살아가면서도 내색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죠.

스콧 스토셀은 달랐습니다.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홍한별 옮김, 반비 펴냄)는 평생 불안증과 함께 살아온 저자가 자신의 삶을 수시로 옥죄는 불안의 정체를 찾아 헤맨 여정의 기록입니다. 불안증이 도져서 엉망이 된 저자의 결혼식에서 시작된 그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결국 내 옆에 똬리를 틀고 있는 불안을 직시하게 됩니다.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는 불안을 없애는 방법을 말하는 책이 아닙니다. 우리는 결국 불안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죠. 하지만 그 불안이 야기하는 수많은 고통을 덜어낼 수는 있습니다. 따로 또 같이. 이 책은 '불안'을 다루지만 결국은 '희망'을 얘기합니다. <프레시안>이 10월에 함께 읽을 책으로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를 고른 것도 이 때문입니다.

<프레시안>은 반비 출판사와 함께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를 먼저 읽은 독후감을 소개합니다. 두 번째 독후감의 주인공은 북 칼럼니스트 박사 씨입니다. 평생 불안 장애와 쌓아왔던 저자의 고군분투를 보면서 그는 새삼스러운 세상의 진실을 하나 떠올립니다. "세상"에는 "겪어봐야만 아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스콧 스토셸 지음, 홍한별 옮김, 반비 펴냄). ⓒ반비
"정신과는 다니다 말았어요. 의사들이 이 병을 앓아본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뭘 알겠어요?"라는 말을 들은 게 며칠 전이다.

"그럼 모든 의사들이 그 병을 겪어봐야 아나요? 외과나 내과를 생각해보세요. 꼭 다리가 부러져 봐야 부러진 다리를 고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라는 내 답에 수긍하며 그 자리는 넘어갔다. 하지만 이 짧은 문답은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긴 생각의 꼬리를 남겼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는 말을 할 때, 우리가 '아는 것'은 무엇인가?

이 세상에 겪어봐야만 아는 것은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겪어봐야만 안다면, 인류의 역사는 지지부진한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설 수 있는 것은 "겪어보지 않은 자"의 특권이다. 그러나 분명 겪어본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불안 장애 환자인 저널리스트가 불안에 대해서 쓴 이 책을 들고 싶지만, 이 책에 따르면 선배가 있다. 17세기 옥스퍼드 학자 로버트 버튼이 쓴 <우울의 해부>이다.

버튼이 1621년에 쓴 이 책은 약점이 없지 않지만 "일반인이 쓴 의학서 가운데 가장 훌륭하다"는 평을 받았다고 한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대단히 많은 책을 읽고 참조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자신이 우울증 환자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다른 사람은 책에서 지식을 얻는다. 나는 우울에 빠짐으로써 지식을 얻는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 말은 이 책에 대입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저자인 스콧 스토셀의 이 책이 가치가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오랜 투병 생활을 해온 불안 장애 환자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목소리는 병의 바깥이 아닌 내부에서 나온다.

이 책의 또 다른 훌륭한 점 또한 그의 병에 신세지고 있다. 불안 기질을 가진 사람을 오래 연구해온 제롬 케이건은 불안한 사람들이 일을 더 잘한다며 "이들은 강박적이고, 실수를 하지 않고, 자료 정리를 할 때 신중하다"고 평가했다. '불안 장애에 압도당하는 일만 피할 수 있다면'이라는 전제가 붙긴 하지만 "걱정꾼들이 가장 철저한 일꾼이자 가장 사려 깊은 벗이다"라는 그의 말은 꽤 신빙성이 있다. 전문 용어로 쓰인 논문을 비롯한 수많은 자료를 검토하고 필요한 부분들을 뽑아 쉽게 정리해낸 이 책이 그 증거다.

스토셀이 불안에 관한 책들을 모으고 읽기 시작한 첫 동기는 책을 쓰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의 의도는 좀 더 절박하다. 알게 되면, 치료할 수 있을까? 그는 고통을 겪음으로써 그 고통에 대해 알게 되었고, 치료하기 위해 치료법을 알아가기 시작한다. 약을 먹으면 해결할 수 있을까? 상담으로 이 고통의 원인을 찾아낼 수 있을까? 원인을 알면 해결책도 발견할 수 있을까? 유전이라면 어떻게 내 아이에게 물려주지 않을 수 있을까? 변할 수 있을까? 극복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 그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자기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그들의 실패와 업적에 대해서 알게 되고, 자신이 갖고 있는 강박과 환상이 얼마나 바보 같아 보이는지도 알게 되고, 약을 먹으면 확실히 나아지는 것을 체감함에도 불구하고 약의 효능과 역할에 관한 논란 또한 승하다는 것도 알게 되고, 심한 불안이 가져다줄 수 있는 깨달음과 지혜의 존재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알게 되면 극복할 수 있을까? 불행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가지런히 정리해서 말해줄 수는 있었다. 이 책을 통해.

이 책의 표면은 명쾌하지만 한 겹 아래에는 깊은 고민을 깔고 있다. 아는 것이 많아진다고 답이 분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많아진 생각이 서로 부딪친다. 자신의 작품 <멋진 신세계>에 약물로 인위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디스토피아를 그린 올더스 헉슬리가 한편으로는 안정제인 메트로바메이트의 열렬한 숭배자였다는 사실은 모순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우리가 알기 어려운 수많은 생각들이 다글다글 부딪치고 있었으리라. 이 책의 저자처럼.

저자는 자신의 병과 객관적인 거리를 유머 감각까지 발휘해가며 대부분 잘 유지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문득 닿는 속살이 있다. 그는 워커 퍼시와 쇠렌 키르케고르가 불안의 역할에 대해서 했던 말을 믿는다. "불안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제거해야 할 증상이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진정한 실존으로의 부름이며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귀 기울여야 하는 메시지"라는 말.

하지만 그는 정신과 약을 30년째 복용하고 있고, 이 책을 쓰기 위해 양을 훨씬 늘렸다. 알코올 의존도도 심각하게 높아졌고 심지어 코카인까지 손댔다. 그의 말대로 "이 이상 아이러니한 일이 있을 수가 없다."그는 약물 이외에 다양한 해결책을 찾아보지만, "최선을 다하고는 있지만 열쇠를 어디에 꽂아야 할지 여전히 헤매는 중이다."이런 그의 고백은 이 책에 무게를 실어준다.

걱정하고 대비했음에도 딸아이에게서 첫 불안 장애의 징조를 발견했을 때 그의 절망은 상상하기 어렵다. 인상적인 헌사, "마렌과 너새니얼에게. 너희들은 무사하길"이라는 구절의 의미는 책을 읽고 나면 또 다르게 다가온다. 아버지는 힘이 세다. 그는 자신의 윗대, 더 윗대의 기록까지 뒤지며 일말의 희망을 찾는다.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은 불안과 싸우며 자신을 너그럽게 평가할 때 온다. 대책 없는 낙관으로 달아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책이 '구원과 회복력'으로 마무리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결말은 열려 있다. 희망은 쉽게 오지 않는다.

그는 책을 쓰는 것을 불안 장애 환자답게 불안해하고, 불안해하고, 불안해한다. 책이 안 풀릴 때마다 내가 못해낼 거라고 그랬잖아, 라며 주저앉는다. 결국 책을 끝내지만 그 사실이 그에게 자동적으로 힘과 용기를 주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 책을 마무리하고 출판하는 것, 그리고 내 수치와 공포를 세상에 인정하는 것이 나에게 힘을 주고 불안을 덜어줄지도 모르겠다"라는 기대는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수미일관하게 이어지고 있지만, 그 기대에 부응하는 결말은 없다. 마지막 문장 "어찌 될 지는 곧 알게 되겠지"에 희망이 가느다란 숨처럼 붙어있을 뿐이다.

불안은 끝나지 않는다. 어쩌겠는가. 말 그대로, 책은 끝나도 그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그것이 그가 '아는'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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