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는 대학에 못 갈까 봐, 혹은 '왕따'가 될까 봐 불안합니다. 20대는 취직을 못 할까 봐 불안합니다. 30대는 전세가 오를까 봐 혹은 월세로 전환될까 봐 불안합니다. 40대는 언제 직장에서 쫓겨날지 몰라서 혹은 자신의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릴까 봐 불안합니다. 50대는 눈앞으로 다가온 은퇴 후의 수십 년이 불안합니다. 60대 이상은 그냥 모든 게 불안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불안과 함께 살아갑니다. 하지만 정작 그 불안을 정면으로 직시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남다르게 불안을 드러내는 사람은 '불안증'을 비롯한 별의별 병명의 정신 질환으로 판정되어 '비정상'으로 낙인이 찍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는 불안과 함께 살아가면서도 내색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죠.
스콧 스토셀은 달랐습니다.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홍한별 옮김, 반비 펴냄)는 평생 불안증과 함께 살아온 저자가 자신의 삶을 수시로 옥죄는 불안의 정체를 찾아 헤맨 여정의 기록입니다. 불안증이 도져서 엉망이 된 저자의 결혼식에서 시작된 그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결국 내 옆에 똬리를 틀고 있는 불안을 직시하게 됩니다.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는 불안을 없애는 방법을 말하는 책이 아닙니다. 우리는 결국 불안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죠. 하지만 그 불안이 야기하는 수많은 고통을 덜어낼 수는 있습니다. 따로 또 같이. 이 책은 '불안'을 다루지만 결국은 '희망'을 얘기합니다. <프레시안>이 10월에 함께 읽을 책으로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를 고른 것도 이 때문입니다.
<프레시안>은 반비 출판사와 함께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를 먼저 읽은 독후감을 소개합니다. 첫 번째 독후감의 주인공은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 씨(<정희진처럼 읽기> 저자)입니다. 그는 불안을 거세한 "콘크리트 정신"의 소유자, 그의 명명대로라면 'MB(이명박) 캐릭터'가 갈수록 많아지는 한국 사회가 무섭습니다. 그의 고민은 이렇습니다.
불안, 흐르는 물의 시간
이 영화는 '여성의 경험과 남성의 언어'를 상징하는 텍스트로도 유명하다. 왜 불안해 '보이는' 사람의 판단은 신빙성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불안이 경험의 결과라면 더욱 믿을 만한 증언이 아닐까. 불안의 사회적 지위는 낮다. 우리는 직접 경험한 본 것(seeing)보다 기존의 통념(believing)을 더 신뢰한다.
페미니스트 국제정치학자 신시아 인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바람직한 리더는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그것을 강함으로 착각한다.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우리사회를 활보하는 이른바 'MB 캐릭터', 즉 지나치게 자신감이 넘치고 안정되어 있어서 자신을 콘크리트 정신의 소유자라고 확신하는 기질이 자기 계발형과 결합하여 지배적(대세) 인간형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성격이 최고 지도자가 되면 사회 분위기도 영향을 받는다. 대통령은 '승자'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불안이 고운 흙이라면 '안정'은 콘크리트다. 후자는 변형이 어렵다.
내가 가장 경계하는 사람은 강하고 대담한 악인이다. 이런 이들은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어디에서나 잘살고 있다. 선과 악은 '사실'이 아니라 강한 사람의 뻔뻔함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올해 초 나는 잉그리드 버그만처럼 폭력, 악, 비행을 분명히 목격하였고 다른 이들과 함께 피해자를 돕는 일에 조금 개입한 적이 있다.
그러나 피해자는 가해자를 두려워했고 나는 사법 처리를 포함한 여러 가지 방식의 문제제기를 생각했으나 모든 이들의 만류로 실패했다. 이유는 상대방이 나의 '예민한' 성격을 문제 삼아, 자신을 '불안증 환자(나)'의 피해자라고 주장할 것이 뻔하다는 것이다. 나는 성폭력 피해 상담을 오래 해왔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많이 겪어왔다. 결국 사건은 당당한 자(가해자)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위와 비슷한 일들을 겪는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호수'보다 '흐르는 물'의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다. 불안, 취약성, 마음의 소요는 합리적이고 건강한 몸의 일부분이다. 우울감과 우울증이 다른 것처럼 고통이 심할 경우가 질병이지, 불안한 상황 자체는 병이 아니다.
질병일 경우에도 단지 아픈 것이지 '미친' 것이 아니다. 나는 지나치게 안정되고 차분한 사람, 쿨한 사람, 목소리가 낮은 사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가까이 하지 않는 편이다. 이런 태도는 자기 방어, 무식, '갑' 지향 의식을 포장한 '얇은 교양의 중산층'의 페르소나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만병통치'이자 동시에 '동네북'인데 이 점이 그의 업적일지도 모른다. 전쟁에서 사람을 죽인 '참전 용사'가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을 환자로-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진단하고 죄의식을 느끼지 않도록 '고쳐서' 다시 전쟁터에 내보낸다.
사회 적응을 돕는 정신과 의사이자 동시에 변화를 시도하는 혁명가였던 프란츠 파농에게 가장 큰 의문은 이것이었다. 파농은 자신이 맡은 환자들(알제리 독립 운동가를 고문하는 프랑스 경찰)이 업무를 잘 수행하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게 해달라는 호소에 괴로워했다. 물론 이것은 환자들의 이중 메시지다.
이것이 피억압자이면서 억압자들을 치료했던 파농의 딜레마였고, 이후 그의 탈식민주의 사상의 핵심이 되었다. '치료'(해방)란 예전으로 돌아가는 정상으로의 회복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이다. 고문 경찰 스스로 자기 위치성을 사유하지 못하면 치료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과정은 극심한 불안을 동반한다.
불안과 우울에 관한 연구/치료는 정답이 없다. 이론은 이론끼리, 사례는 사례끼리, 역사는 역사끼리 수많은 반례가 있고 길항한다. 우리는 모색할 뿐이다. 이런 책이 많이 나와야 하는 이유다. 주지하다시피 이 책은 앤드류 솔로몬의 걸작 <한낮의 우울>(민승남 옮김, 민음사 펴냄)의 '불안(anxiety) 버전'이다. 좋은 책은 어쩔 수 없다. 좋다. 손색이 없다.
여전한 논쟁거리는 당사자가 자기의 정체성이나 질병에 대해 쓸 때, 우리를 괴롭히는 방법론이다. 특히 사회 자체가 지극히 병리적, 이중적이면서 이에 대한 인식 체계는 없는 한국이라면 말이다. 나는 "절대 상처를 드러내지 마라"(44쪽)는 입장이다. 나 역시, 드러내야만 하고, 그러고 싶은 문제가 있다. 그러나 (순전히 개인적 능력 때문에) 내 시도는 여러 번 실패했다. 낙인과 민폐, 자학만 얻었다.
사회의 '크기'는 고통에 대한 태도와 그것을 품을 용량(capacity)에 의해 가름할 수 있다. 나를 비롯, 한글판 제목대로 "피할 수 없는 모든 고통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목소리는 우리 자신의 그릇에 온전히 담겨질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불안하지 않은' 이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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