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지대는 '머나먼 쏭바강' 아니면 '콰이강의 다리'인지도 모르겠다. "상지대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어요?", "김문기가 아직도 상지대에 있나요?" 상지대 문제와 관련해서 대학 바깥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 이 두 가지로 요약된다. 글로 공개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김문기의 신상에 관한 질문이나, 지나치게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지겹다"는 표현이나, 상지대 구성원들을 위로하는 "고생한다"는 표현들도 크게는 이 범주에 포함된다.
그렇다. 상지대 사태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사학비리 때문에 발생한 상지대 사태의 전개과정은 한국전쟁보다도 길고 제1차 세계대전이나 제2차 세계대전보다도 길다. 유럽에서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서 벌어졌던 30년 전쟁이나 영국에서 벌어졌던 왕위 쟁탈전인 장미전쟁보다도 길다. 아마도 상지대 사태보다도 긴 전쟁은 십자군 전쟁이나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백년전쟁뿐일 것이다.
상지대 사태가 왜 이렇게 장기화되는 것일까? 상지대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고 김문기가 훌륭하기 때문에 장기화되는 것만도 아니다. 김문기가 집요하기는 하지만 김문기도 비빌 언덕이 없이는 이렇게 오래 끌 수 없기 때문이다. 사학이 대학의 85%를 차지하고, 사학의 상당수가 부패했고, 권력과 정치권이 사학과 연결되어 기득권 구조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립학교법은 이 구조에 맞게 엉성하게 만들어져 있다.
비리사학, 전 국민이 알고도 못 잡는 도둑
백년전쟁이 3기로 나뉘어 진행되었던 것처럼 상지대 사태 역시 3기로 나뉜다. 상지대 사태의 제1기는 김문기가 임시이사로 파견되어 학교를 인수한 후 문민정부의 사정개혁으로 구속되면서 쫓겨나는 1972~1993년에 해당한다. 제2기는 학교에서 쫓겨난 김문기가 상지대 복귀를 위해서 음모와 공작을 꾸미며 집요하게 복귀를 추진하던 1993~2009년에 해당한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제3기는 사분위 정상화로 구재단이 복귀하여 이사회를 장악하고 김문기가 총장에 선임되었지만 다시 해임된 2010~2015년에 해당한다.
교육 문제는 전 국민이 당사자이고 이해관계자라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국민이 교육 문제를 소상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국민들은 먹고 사는 문제로 너무 바쁘기 때문에 아이들을 학교에 믿고 맡길 수밖에 없다. 학교는 국공립과 사립으로 나뉘지만 모두 국가가 관리하고 있으므로 국가가 알아서 잘 해줄 것으로 믿는다. 이런 점 때문에 교육 문제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국가에 대한 믿음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먹고 사는 일에 바쁘기 때문에 관심을 기울이기 어렵다.
물론, 교육 문제는 사학 문제로 한정되지는 않는다. 사교육 문제나 학벌주의 문제도 매우 심각하다. 그러나 사학에서 발생하는 학교의 사유화와 족벌운영 및 여기서 비롯된 사학비리는 두 가지 이유로 우리 교육의 최대 쟁점이 되었다. 하나는, 사학비리가 교육에 정면으로 반하는 저질의 심각한 범죄행위라는 점 때문이다. 교육에 관한 철학이나 방법론의 차이는 토론으로 풀 수 있는 문제지만 사학비리는 토론 이전의 근본적인 문제인 것이다. 또 하나는, 사학의 비중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유럽처럼 사학이 극소수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사학은 국가 공교육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사학은 대학의 85%, 고등학교의 41%를 차지할 정도로 기 비중이 막중하다. 사학 중심의 공교육 체계에서 사학이 부패했다면 사학은 교육 문제의 처음이자 끝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리 전제할 것은, 사학이 많다고 반드시 문제가 된다는 말은 아니다. 사학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학이 교육기관답게 운영되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엄청나게 많은 사학에서 하루가 멀다 않고 사학비리가 터져 나오는 상황이니 사학 문제가 교육 문제의 핵심 현안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바로 질문한다. 사정이 그렇다면 사학비리를 근절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면 되지 않는가? 정부가 공권력을 동원해서 사학비리를 엄단하고 국회가 필요한 법률을 만들면 되지 않는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맞는 말이 현실에서 잘 적용되지 않는 것이 우리 실정이다. 앞에서 말한 사학을 둘러싼 유착구조 때문이다.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우리 사학의 다수는 사학의 본고장인 미국과는 달리 교육을 위해서 설립되기보다는 처음부터 사익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일제 식민지하에서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되었던 극소수의 사학을 제외한다면, 다수의 사학은 해방 직후 토지개혁을 회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고, 다시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정부의 온갖 특혜와 묵인 속에 산업인력을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하면서 몸집을 불렸다. 교육기관인 사학은 법적으로는 사유재산이 아니지만 현실에서는 개인의 사유재산으로 간주되었고, 사유재산에서 영리를 추구하는 것이 묵인되었으며, 최대한의 영리추구를 목적으로 족벌체제가 형성되었다. 당연히 사학에서 비리가 싹텄고 정부는 모른 척 눈감아주는 유착구조가 형성되었다.
참고로, 미국의 경우 유럽에서 이주한 이민자들이 유럽에서 받았던 공교육을 기대할 수 없는 식민지 상황에서 필요에 의해 스스로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유럽의 전통을 이어받아 개신교가 중심이 되어 목회자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학교들이 설립되었다. 정부가 지원하고 사회적 기부금이 보태지면서 학교가 발전하고 교육의 영역이 점차 확대되었다. 오직 교육만을 목적으로 설립되었고 처음부터 설립자 개인의 독단이나 전횡이 개입될 여지가 없었다. 사학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사회적 공공기관으로 설립되고 발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사학이지만 사유재산처럼 간주되는 우리의 사학은 미국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리 것을 사학이라고 한다면 미국 사학은 특별히 공영사학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고, 미국 것을 사학이라고 부른다면 우리 사학은 사학의 범주에도 들지 못하는 사설학원 수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설학원만도 못한 것이 현실이다.
둘째, 사학은 교육기관이기 이전에 하나의 이익집단이 되었으며 지금은 우리 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막강한 권력집단이 되었다. 추상적인 관점에서 사학은 개별적인 교육기관이지만 이들이 모인 사학집단은 현실사회에서 이익집단으로 변질되어 권력기관화한 것이다. 더구나 이들이 권력 및 정치권과 결탁하여 권학유착, 정학유착의 구조를 형성하게 된 결과 정부는 사학비리를 두둔하고 국회는 사학비리를 엄단할 입법을 하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전 국민이 알고도 못잡는 도둑이 바로 사학인 셈이다.
상지대 분규, 어떤 과정을 거쳐왔나
40년을 끌어온 상지대 사태는 바로 이 두 가지 상황의 산물이다. 오로지 교육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던 상지대가 사업가 김문기에게 넘어가면서 영리 목적의 사기업체보다 못한 학교로 변질되어 버렸고, 여기에 부패권력과 부패정치권이 결탁하면서 끈질기게 생명력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 상지대 사태 제1기에 해당하는 1970~1980년대의 김문기의 사학비리는 이 구조 하에서 만들어졌다. 그 후 80년대 후반의 민주화 흐름이 문민정부로 이어지면서 김문기의 퇴출로 이 비리구조가 막을 내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드라마의 시작이었을 뿐이다. 우리 사회의 불완전한 민주화는 김문기에게 복귀의 공간을 제공해주었다. 민주화와 민주정부의 출범에도 불구하고 김문기는 이 틈새를 노려서 복귀 공작을 줄기차게 이어나갔다. 상지대 사태의 제2기에 해당하는 민주정부 시절에 김문기의 복귀는 실현되지 못했지만 끊임없는 복귀 공작으로 학교를 흔들었고 부패정치권을 상대로 집요하게 복귀를 요구했다.
결국 민주정부의 시대가 끝나고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여 정부의 정책기조가 민주정부 이전의 노선으로 회귀하면서 김문기의 복귀가 현실화되었다. 상지대 사태 제3기가 시작된 것이다. 제3기는 부패권력의 재등장, 김문기의 복귀, 상지대 분규의 재연으로 대표된다. 상지대에서 부패권력 없이는 김문기의 복귀를 상상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사학 문제는 교육의 차원을 벗어나 정치문제가 되고 권력의 문제로 변질되어 버렸다.
1980~1990년대에 민주화되었다가 다시 비리재단이 복귀한 모든 대학들은 사학비리 → 분규 → 임시이사 파견과 민주화 → 비리재단 복귀와 민주화 후퇴 → 분규라는 공통의 과정을 겪고 있다. 특히 상지대는 이 과정을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겪고 있다. 첫째, 사학비리나 분규의 정도가 가장 심각했다. 사학비리가 가장 극심했고, 구성원의 반대는 가장 적극적이었으며, 구성원에 대한 탄압은 가장 극단적이었다. 둘째, 매우 상징적인 방식의 민주화를 성취했다. 구성원의 참여를 확대하고, 스스로 발전기금을 납부하고, 시민대학이라는 새로운 대학모델을 창출했다. 셋째, 비리재단의 복귀 방식은 가장 거칠고 반교육적이었다. 김문기는 직접 총장으로 복귀했고, 즉시 족벌체제로 전환했고, 구성원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으로 일관했다.
이러한 상황은 2010년 사분위 정상화를 전후한 과정에서도 확연히 드러났다. 2008년 사분위 발족 이후 상지대를 포함해서 모든 대학들은 개별적으로 사분위에 대응했다. 그러나 상지대는 이 문제를 개별 대학의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로 파악하여 대학들 간의 공동대응을 제안하고 주도적으로 실천했다. 2010년 사분위가 상지대를 정상화하는 과정에서 상지대는 매우 감동적인 방식으로 사분위 정상화에 대응했다. 또한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단 사분위 정상화가 이루어지고 나면 학내 구성원들의 대응이 침체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상지대는 정상화 이후에도 복귀한 구재단에 대한 대응의 고삐를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상지대는 사분위 정상화 이전 단계에서는 ‘임시이사 파견대학 공대위’를 구성하여 함께 대응했다. 정상화 과정에서는 원주지역을 중심으로 ‘상지대 지키기 원주범시민대책위’를, 서울 지역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긴급행동’(상지대 지키기 긴급행동)을 결성했다. 정상화 이후에는 ‘상지대 지키기 긴급행동’에 참여했던 교육시민단체들과 비리재단이 복귀한 대학들을 결속하여 ‘국민행동’(사학비리 척결과 비리재단 복귀 거부를 위한 국민행동)을 발족했고, 이 기구는 지금의 ‘사학개혁국본’(사립학교 개혁과 비리추방을 위한 국민운동본부)으로 전환되었다. 이처럼 상지대는 언제나 개별 대학의 차원을 넘어선 사회적 대응의 관점에서 대학 민주화를 추진하고자 했다.
상지대가 사학비리에 대응하여 사회적 연대를 추구한 이유는 상지대 상황을 겪으면서 사학 문제는 개별 대학의 문제가 아니라 사학 전체의 문제이며, 또한 정치의 문제이자 권력의 문제이기 때문에 개별 대학 구성원의 힘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70~1980년대의 사학비리는 대학 운영자들의 개인적인 비리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학 운영자들의 개별적인 반성이나 양보를 촉구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또한 사학 민주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전체 사학재단이 결속하여 권력 및 정치권과 단단한 유착구조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1987년의 6월민주항쟁에서 시작된 우리 사회의 민주화는 교육 민주화로 그 영역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정치개혁이나 노동개혁의 속도에 비해 교육 민주화의 과정은 크게 지체되었다. 지금의 인천대학교가 된 과거의 선인재단이나 영남대, 조선대 정도에서 학내 문제가 드러났을 뿐 대부분의 사학에서는 학내 민주화가 시작되지 못하고 있었다. 상지대의 경우에는 김문기가 집권여당의 국회의원 신분이었기 때문에 더욱 느렸다.
그러다가 1993년 문민정부 출범과 동시에 시작된 사정개혁에서 상지대 사태가 처음으로 국민적 관심사로 부각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재산공개에 이어 민정당 의원들의 재산공개가 추진되면서 민자당 3선 의원이었던 김문기의 막대한 부동산 규모가 공개되었고 그것이 사학비리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오랫동안 권력 아래 은폐되어 있던 상지대 상황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김문기가 권력을 동원해서 상지대를 인수한 후 온갖 사학비리를 저지르면서 거부를 축적했다는 사실이 언론보도를 통해서 낱낱이 확인되었다. 대학이 축재의 발판이 된 것이다. 결국, 김문기는 구속되고 김문기를 포함한 상지대 이사들은 해임되고 임시이사가 파견되면서 상지대 민주화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문민정부의 사정개혁에 힘입어 경천동지할 정도로 언론보도가 줄을 잇고 김문기의 개인비리와 상지대 사학비리가 폭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태산명동에 서일필이었다. 상지대 사태는 김문기가 구속되어 상지대에서 퇴출되고 형식적으로 임시이사가 파견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초기의 서슬 퍼런 기세와 달리 검찰은 김문기의 사학비리를 발본색원하지 않았고, 교육부의 조치는 뒷북행정에 머물렀으며, 교육부가 파견한 임시이사는 김문기 추종자들 일색으로 구성되었다. 김문기는 쫓겨나고 임시이사는 파견되었지만 상지대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김문기 퇴출 직후의 혼란스러운 사태는 김찬국 총장에 대한 부당해임 사건이 터진 다음에야 마무리되었다.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이사회에 책임을 물어 임시이사들은 전면 교체되었다. 임시이사회가 교체된 다음에야 대학 민주화를 제대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필요한 제도를 정비하고, 잘못된 대학 역사를 바로잡고, 교수와 직원을 충원하는 등의 작업이 진행되었다. 설립자가 김문기가 아니라 원홍묵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사람과 제도가 갖추어지고 설립자를 복원하면서 대학 민주화가 탄력을 받았다. 이 동력을 바탕으로 상지대는 시민대학을 새로운 대학모델로 결정하고 시민대학의 재정적 토대가 될 발전기금을 모금하기 시작했다. 먼저 구성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발전기금을 모금하여 발전기금재단을 구성한 다음에 점차 대상으로 확대해 나갔다. 이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임시이사 체제를 정이사 체제로 전환하기로 결의하고 교육부와 협의를 진행시켰다.
이 시점에서 시민대학, 발전기금, 정이사는 상지대 민주화의 조건으로 간주되었다. 설립자가 복원되었고 대학이 안정화되어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므로 정이사 체제로 전환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며 오랜 임시이사를 벗어나 정이사 체제로 전환해야 최종적으로 대학 민주화가 완성되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러나 민주정부임에도 불구하고 교육부는 정이사 체제로의 전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득불 사법부의 판단을 받아보기로 했다. 법원에서 상지대의 정이사 전환을 교육부가 거부할 이유가 없다는 판단이 나온 다음에야 교육부가 정이사 체제를 인정했다. 그 결과 2004년에 상지대는 정이사 체제로 전환되었다.
사학 문제 해결하는 리트머스 된 상지대 사태
상지대가 정이사 체제로 전환한 것은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무엇보다도 상지대의 구성원들이 합심 단결하여 발전기금과 시민대학을 토대로 자력으로 정이사 체제로 전환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달랐다. 같은 시기에 한성대와 한국외국어대가 정이사 체제로 전환되었지만 이것은 교육부가 주관하여 구성원들이 구재단과 타협한 결과였다. 반면 상지대는 사학비리 구재단을 배제한 상태에서 스스로 대학 재정의 토대를 구축하고 시민대학이라는 전향적인 대학모델을 창안하여 자력으로 정이사 체제로 전환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상지대의 사례는 대학 민주화의 매우 중요한 사례에 해당한다.
그러나 대학 민주화가 한창 성과를 일구어가던 시점에서 상지대는 두 가지 도전에 직면했다. 하나는 외부로부터 김문기 구재단의 도전이었고, 또 하나는 내부로부터 일부 교수들의 도전이었다. 본질적인 것은 김문기 구재단의 도전이었지만 내부의 도전도 적지 않은 상처를 남겼다.
내부의 도전이란 교수사회 내부의 갈등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 때문에 교수협의회가 와해되거나, 대학 민주화의 기조가 부정되거나, 심각한 내분을 초래할 정도는 아니었으므로 무시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반성적 검토가 필요한 대목이 있다. 하나는, 민주대학을 표방하는 상황에서 소통을 통해서 이러한 이견과 갈등을 해소하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우리 스스로가 반성해야 할 대목이다. 또 하나는, 어려운 조건에서 대학 민주화를 추진하던 상황에서 갈등은 내부 단결을 저해하고 추진력을 약화시키고 대외적으로 부정적인 인식을 유포하는 등 상당한 장애요인으로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남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우리 내부의 한계이다.
대학 민주화를 둘러싸고 이견이 제기된 배경을 한 가지로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순수하게 대학 민주화에 대한 관점의 차이일 수도 있고, 대학 운영권을 둘러싼 이해다툼일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김문기 구재단과 연계된 것일 수도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시민대학, 발전기금, 정이사로 구성된 대학 민주화 방향에 이견을 제기했던 교수들은 그 이후 지금까지 김문기 구재단의 복귀 반대나 대학 민주화 운동에 일절 참여하지 않고 있으며 그 일부는 대학 민주화에서 이탈하여 복귀한 김문기 구재단에 봉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외부의 도전은 김문기의 도전을 말하는 것인데 내부의 도전과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 김문기는 2004년 1월에 정이사가 출범한 직후 이사회 결의의 무효를 주장하며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4월에 1심 재판부가 김문기가 원고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각하 판결했다. 김문기가 패소한 것이다. 김문기는 즉시 항소했고 2년을 끌어 2006년 2월에 항소심인 고등법원은 김문기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번에는 우리가 대법원에 상고했다. 그리고 참여정부를 둘러싸고 정치사회적 논란이 거세지던 2007년 5월 17일 대법원은 결국 김문기의 주장을 받아들여 상지대 정이사 체제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해임된 김문기는 소송자격이 있다는 것이고 임시이사는 정이사를 선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통탄할 일이었다. 첫째, 이 결정으로 상지대 정이사 체제가 무너진 것이 통탄할 일이었다. 둘째, 대한민국의 최고법원인 대법원이 학교를 사유재산으로 간주한 것이 통탄할 일이었다. 셋째, 대법원이 판례를 변경하여 유신시대에도 지켜졌던 임시이사의 지위를 부정한 것이 통탄할 일이었다. 넷째, 대법원이 판례를 변경하여 이미 사학비리로 쫓겨나 임기까지 종료된 과거 이사들의 소송 자격을 인정한 것이 통탄할 일이었다. 다섯째, 이 판결로 20년간 이루어졌던 사학 민주화가 일거에 무산되었다는 것이 통탄할 일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판결이 아니라 사학에 대한 대법원의 법정 쿠데타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모든 사학은 다시 길고 긴 어둠의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나 통탄하기에는 아직 때가 일렀다. 5월 17일에 나온 대법원 판결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인 7월 27일에 사학분쟁조정위원회가 설치되도록 사립학교법이 개정되었다. 사학분쟁조정위원회는 대법원이 마련해준 판결을 토대로,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그 판결을 근본적으로 곡해하여 비리재단을 복귀시키는 행동대를 자임하도록 설계되었다. 이런 점에서 사립학교법 개정은 사학에 대한 국회의 쿠데타였다. 결국 사학에 대한 쿠데타는 대법원 쿠데타와 국회 쿠데타를 거치는 2단계 쿠데타로 진행된 것이다.
사학분쟁조정위원회의 구성과 역할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상세하게 언급한 바 있으므로 재론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중요한 문제는 비리재단의 복귀로 현실화된 사학의 반격이 사학재단과 새누리당과 대법원의 야합에 의해 추진되고 완성되었다는 것이고 참여정부와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속절없이 이 야합구조에 편승했다는 사실이다. 그 후 정권이 바뀌어 새누리당이 집권하여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이어서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결국 사학의 반격은 100% 차질없이 완성되었다. 이것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상지대 사태의 본질이자 또한 사학 문제의 본질이다.
그러나 권불십년에 화무십일홍이라고 했다. 과유불급이라는 말도 있다. 과거의 비리를 반성하지 않은 채 복귀한 비리재단은 속도조절에 실패하여 다시금 사학분규를 양산하는 80년대의 상황으로 복귀했다. 비리재단이 복귀한 학교에서만 사학분규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 멀쩡한 학교에서도 새로운 사학비리가 창궐했다. 권력이 사학재단을 옹호하는 상황에 편승하여 여기저기서 사학비리가 터져나온 것이다. 조선대, 영남대, 상지대, 세종대, 동덕여대, 덕성여대, 대구대, 광운대, 경기대, 서일대, 김포대 등 비리재단이 복귀한 대학의 분규에 더해서 서남대, 명지대, 동국대, 건국대, 성신여대, 수원대, 수원여대, 제주한라대, 한영대, 청암대 등에서 새로운 사학비리가 드러났고 양천고, 진명여고, 대원외고 등에 이어 최근의 하나고, 충암고, 한마음고, 대성고 초중고에서도 사학비리가 발생한 것이 그 증거이다. 여기에 이름이 거론되지 않은 전국의 수많은 대학과 고등학교에는 사학비리가 없다고 누구도 자신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이제 상지대 사태는 상지대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 되었다. 상지대는 이 사태의 가장 정점에 위치해 있는 것뿐이다. 상지대 사태를 해결한다고 사학비리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상지대 사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창궐하는 사학비리와 만연된 사학분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것은 상지대 사태의 해결이 사학 문제를 해결하는 리트머스가 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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