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 프라이머리 제도의 취지는 간단합니다. 국회의원 선거 등 공직 선거에서 각 정당이 후보자를 추천하는 것을 '공천'이라고 하죠. 이 때 정당이 어떤 후보를 추천할지는 이제껏 당 지도부가 정하거나, 당원 경선을 통해 더 많은 당원이 적합하다고 생각한 인물을 뽑았습니다. 최근에는 정당들이 '우리가 어떤 후보를 내면 본 선거에서 뽑아 줄래요?' 하고 유권자에게 여론 조사 등을 통해 미리 물어 그 결과를 일정 부분 반영하기도 했습니다.
2002년 '노무현 열풍'을 일으킨 '국민 참여 경선제' 역시 이처럼 당원이 중심이었던 경선에, 당원이 아닌 유권자들도 말 그대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비(非)당원의 참여 비율을 점차 늘려 끝까지 밀어붙인 제도가 바로 오픈 프라이머리입니다. 당원이든 당원이 아니든, 정당이 어떤 후보자를 선거에 내세울지 모든 이들이 사전에 참여해서 정하자는 겁니다. 얼핏 보기에는 개방적이고 투명한, 민주적 제도처럼 보입니다.
김무성·문재인 대표 등은 이런 맥락에서 "정당의 기득권인 공천권을 내려놓겠다",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드리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또 이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야말로 "정치 개혁"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한풀 꺾이긴 했지만 여전히 대세라는 '먹방'에 비유해서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치와는 절대로 상관 없는, 두 음식점 이야기
2016년 4월 13일, 최고의 맛집을 가리는 한 판 승부가 벌어집니다.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는 역대 최다 '블루' 리본에 빛나는 역사와 전통의 새누리횟집입니다. 2010년 당시 사장님 방침으로 "자연산"만 고집하고 있는 이 식당은 서비스가 좋은 못 생긴 종업원을 고용하고 있고, 6300원짜리 "황제 식사" 메뉴를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흐물흐물한 식감의 '조낙지'와 '보온병 폭탄주'도 세간의 화제가 된 메뉴였습니다.
이에 버금가는 경쟁자는 역시 60년 전통을 내세우는 새정치식당입니다. (이 식당 단골은 아직 상호 변경 전의 '민주식당'이란 이름이 더 익숙하다고 합니다.) 새정치식당은 새누리횟집에 비해 서민적인 맛을 내세우는 곳으로, 기본적으로 남도 한정식의 맥을 잇고 있지만 2000년대 이후 영남 지방 음식도 메뉴에 일부 추가됐습니다. 아, 이 식당에서 2004년부터 '물은 셀프'입니다.
손님인 우리는 뭘 하면 될까요? 당연히 양쪽 음식을 먹어 보고 더 맛있는 쪽에 손을 들어 주면 됩니다. 구미가 당기지 않는 음식은 먹어 볼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선택을 받지 못한 메뉴는 버려집니다. 당연히 식당 사장님들은 우리의 입맛을 사로잡기 위한 신(新)메뉴 개발에 필사적입니다. 특히나 한국 손님은 오래된 메뉴에는 싫증을 잘 내기 때문이죠. 몇 년에 한 번씩이긴 하지만 '손님은 왕'이라는 말을 모처럼 실감하는 기회입니다.
그런데 최근 이 두 식당 사장님이 영업 방침을 바꾸겠다고 합니다. 새누리횟집 주방장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레시피(recipe·조리법) 선택권을 셰프가 독점하는 것은 식당의 기득권이다. 메뉴 결정권을 손님에게 돌려드리는 '오픈-레시피' 제도를 도입하겠다." 새정치식당 주방장도 맞장구를 칩니다. "주방 내 몇몇 요리사가 메뉴를 결정하는 것은 권위주의다. 이것을 타파하는 것이 주방 혁신"이라는 겁니다.
손님 입장에서는? 황당할 겁니다. 우리는 식당들이 어떤 음식을 내놓는지 보고 소중한 한 표…, 아니 한 입의 선택권을 행사하면 그만입니다. 그 식당이 내놓는 음식이 '마초' 주방장이 제 마음대로 만든 것인지, 여러 요리사들이 합리적으로 토론해서 만든 것인지, 다른 손님들의 인기 투표와 인터넷 여론 조사를 통해 정해진 방법으로 만든 것인지가 우리에게 과연 중요할까요? 일본 만화 <미스터 초밥왕>의 대사처럼, "중요한 건 '맛'"이겠죠.
게다가 우리가 어떤 재료를 어떤 방법으로 요리하는 게 가장 맛있는지,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요리사보다 무슨 수로 더 잘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럴 거면 굳이 '요리사'라는 직업이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닐까요?
다시, 정치 이야기
그런데 손님에게 식당 메뉴를 결정하라는 식의 발상이 어쩐 일인지 "정치 개혁"으로 포장되고 있습니다. 더 놀라운 건, 그런 식당에는 응당 가지 않겠다고 생각할 많은 이들이 '오픈 프라이머리는 정치 개혁'이라는 주장에 동감을 표하고 있기까지 하다는 겁니다.
왜일까요? 정치 선진국인 미국에서도 하고 있는 제도라서일까요? 한국에서 알려진 바와는 달리, 미국 역시 50개 주(州) 전체에서 오픈 프라이머리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또 미국은 지역별로 할당 점수를 정해 놓고, 그 지역에서 한 표라도 많이 나온 후보가 그 지역 할당 점수를 싹쓸이하는 괴상한 방식으로 대통령을 뽑는 나라입니다. 미국이 하는 제도라고 다 좋은 제도는 아닙니다.
대부분의 정치학자나 전문가는 오픈 프라이머리 제도에 대해 부정적입니다.
맛에 대한 최종 평가는 손님이 하지만, 음식 재료와 요리법에 대한 지식은 요리사들이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게 당연한 것처럼, 정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권자는 국민이지만,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여러 분야에 걸친 최적의 의사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합당한 절차를 거쳐) 주권자의 권리를 직업 정치인과 관료에게 위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당에 기초한 대의 민주주의 제도이며, 정당과 선거는 이 '위임'의 통로입니다.
따라서 좋은 메뉴를 개발해서 손님들 입맛을 사로잡을 궁리를 해야 하는 것이 식당의 사명이듯, 좋은 후보를 발굴해서 유권자들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정당의 본령입니다. 오픈 프라이머리는 이같은 정당의 존재 의미를 부정합니다. (한국 언론이 우려하는, 또 30일 청와대가 강조한 '역선택 우려'나 '비용 발생' 등은 오히려 사소하거나 부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오픈 프라이머리로 선출된 후보가 본선에서 상대 당 후보에게 패배한다면, 누가 책임을 질까요? 이제까지는 '패배한 후보를 공천한 당 지도부가 잘못'이라는 논리가 통했고, 그래서 선거에서 지면 당 지도부가 물러나는 게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오픈 프라이머리가 되면, 그 후보를 공천한 게 당 대표도 아닌데 선거에 졌다고 왜 대표가 왜 물러나겠습니까? 또 오픈 프라이머리로 선출된 후보가 알고 보니 비리 전력자 등 파렴치한이었다면요? 역시 책임질 사람이 없습니다.
당 지도부가 후보를 공천했다면 그 지도부가 책임을 지면 됩니다. 당내 경선을 통해 뽑힌 후보라면 '그 당 당원들이 후보 추천을 잘못했네'라는 손가락질을 받게 될 것이고, 정당 지지율은 내려가게 될 것입니다. (2014년말 기준 새누리당 당원 수는 약 270만 명, 새정치연합은 240만 명입니다. 같은해 6.4 지방 선거 때 유권자 수는 4130만 명이었습니다. '당원'이라 해도 일반 유권자에 비하면 소수입니다.) 그러나 오픈 프라이머리에서는? '그런 파렴치한이 후보가 되도록 예비 경선에 참여 안 한 당신도 잘못했다(!)'는 논리가 성립하게 됩니다.
오픈 프라이머리는 이처럼 정당 정치 및 책임 정치 원칙에 맞지 않는 제도입니다. 여야 양당 대표가 이 제도에 대해 찬성하고 나선 것은 '나와 가까운 사람을 내 마음대로 공천하지 않고 좀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서 더 좋은 후보를 내겠다'는 선한 취지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거에 어떤 후보를 내세울지 결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당'의 책임 있는 결정에 따라 이뤄져야 합니다. 복수정당제를 보장한 대한민국 헌법 8조가 정당들로 하여금 "국민의 정치적 의사 형성"에 참여하도록 하고 있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김무성-문재인 합의'에 대한 한 소수 정당의 비판은 한 번 곱씹어 볼 만합니다.
"새누리당·새정치연합 공천은 자기들끼리 알아서 하면 될 일이다. 왜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선관위가 자신들의 공천까지 관리해 줘야 하는가? 자기 정당의 공천도 관리할 능력이 없는 정당이라면, 아예 문을 닫는게 맞을 것이다." (녹색당 논평, 2015년 9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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