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이 교수의 글을 통해서 이념갈등의 원인을 찾아봤다. 그 원인들을 뒤집어보면 해답이 보이게 마련이다. 그런데 황해문화 편집진은 그 해답의 총합이 중도라고 보는 것같다. 김진석 교수는 “기우뚱한 균형”, “우충좌돌 중도의 재발견”등의 저서를 통해 중도에 대한 우리 시회의 인식을 넓혀왔다. 그는 이번 기고 “왜 중도를 두려워하는가”에서 “복잡성의 중도”라는 새로운 개념 또는 방법론을 제시한다. 이것은 지금까지 통용되어온 버클리대 조지 레이코프 교수의 “이중개념주의”와 구별되는 것으로 중도의 새로운 영역을 모색한다. 필자가 보기에 이번 황해문화 중도특집의 최대성과는 이것이다. 이 두가지가 어떻게 다르며 각각 어떤 효용이 있는가를 따져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이 논의를 따라가는 것은 중도 논란의 핵심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이다. 알고 보면 별 것 아닌데도 학자들이 언어화하는 과정에서 복잡하게 돼버렸다. 그래서 여기서는 사례를 놓고 말하려고 한다. 아래의 레이코프교수의 글은 이중개념주의를, 그 다음 글은 김진석 교수의 복잡성의 중도를 설명한 인용글이다.
“많은 경우들이 예/아니오의 문제이지, 결코 척도가 아니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사형은 존재해야 하는가? 당신은 어떤 사람을 오직 조금만 죽이거나 중간 정도만 죽일 수 없다. 낙태는 합법적이어야 하는가? 어떤 사람이 중도적으로 낙태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북극 야생 야생동물 국가보호지역에서의 군사훈련은? 심지어 ‘적당한’ 훈련조차도 훈련이다. 결코 중간적인 것은 없다. 자신을 ‘중도파’로 분류하는 사람들은 중도적인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이슈 영역에서는 보수적이며 다른 이슈영역에서는 진보적인 이중개념주의자로 보인다.” --레이코프 ‘프레임전쟁’ 39쪽
“안보 문제만 해도, 북한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태도도 거부하고 동시에 '종북' 딱지를 무차별적으로 붙이는 태도도 거부하면서, 미국에 과잉의존하는 태도도 거부하지만 그렇다고 현재 상황에서 미군이 철수하기는 바라지는 않으며 미국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국제정치 차원에서는 미국이 '깡패국가'처럼 행동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바로 미국이 국제적 권력을 통해 나름대로 평화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복합적인 태도가 얼마든지 존재한다.” --김진석 ‘황해문화’ 2015 가을호 37쪽
레이코프의 사형수에 대한 경귀는 중도 논의에서 자주 언급되어왔던 것이다. 그는 사형제에 부분적으로 찬성한다고 사형수를 조금만 죽이는 데에 찬성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단일 사안에 대한 입장은 찬성 아니면 반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강력한 논리에 복잡성의 중도가 도전한다.
두 가지를 잘 구별하기 위한 한가지 방법을 제안한다. 레이코프가 언급한 사형제와 낙태, 북극에서 미군의 군사훈련등 세가지와 김진석교수가 언급한 사례들 즉 종북문제와 미군철수,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역할등 세가지를 더해 모두 여섯가지 사안에 대해서 사람들이 보이는 태도를 관찰해 보자.
논의가 더 복잡해지는 위험을 무릅쓰고 두가지의 차이를 구별하기 위해 통계학에서 사용되는 명목척도와 순서척도를 끌어온다. 명목척도는 어떤 개념의 고유속성이 “있고 없음”에 따라서 구분이 되는 기준이라면, 순서척도는 “많고 적음”에 따라 구분되는 기준이다.이중개념주의는 명목척도에 의해 복잡성의 중도는 순서척도에 의해 측정될 수 있다.
먼저 명목척도에 따라서 판단해 보자. 어떤 사람은 종북, 미군철수, 미국의 역할, 미군의 북극훈련에 대해서 보수적 입장을, 사형제, 낙태에는 진보적 입장을 갖을 수 있다. 4대2의 비율로 보수 입장이 많으므로 이런 경우 중도보수로 판단된다. 여섯개중에 다섯개 이상 보수적 입장을 가지면 극보수 또는 애국보수라고 할 수 있겠다.
순서척도는 각각 개별 사안의 결정과정에서 발생하는 변화를 대상으로 한다. 종북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종북성향을 거부하지만 무차별적으로 종북딱지를 붙이는 태도도 거부하는 입장을 가진 사람은 북한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소위 애국보수진영 인사들과 구별된다. 애국진영인사의 반북성향의 정도를 10을 척도로 했을때 9 정도라면 이 사람의 반북성향의 정도는 7 정도가 될 수 있다. 이와 같이 복잡성의 중도는 단일 사안에 대한 판단 정도의 크기를 표시해 준다.
표창원의 정의 홍세화의 관용 안철수의 상식에 숨은 혼란들
이중개념주의와 복잡성의 중도라는 용어는 다들 손사레치고 도망갈 만큼 낯설고 생경하다. 그러나 그 내용도 그런 것은 아니다. 이것이 소중한 이유는 이념갈등의 혼란에서 벗어날 방법론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몇가지 생생한 사례들을 통해서 이중개념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보자.
표창원은 자신이 보수주의자라면서 보수는 정의를 중시한다고 말했다. 그가 유학했던 영국에서는 그러하다. 프랑스 망명객 홍세화는 스스로 사회주의자라면서 관용을 말한다. 그들은 정의는 보수의 가치이고 관용은 사회주의의 가치라고 말한다. 사회통념과 상반된 그들의 발언에 고개를 갸웃했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 유명인사들의 말에 속으면 안된다. 그들의 발언에는 착각이나 착시가 아니면 의도적 거짓이 개입돼있다. 왜 그런가. 영국 프랑스에서 좌파와 우파는 오랫동안 중도화과정을 거쳐왔다. 중도화란 상대의 장점을 일부분 가져다쓰는 방식이다. 영국 보수주의자들은 오래전부터 좌파에게서 정의를 차용해 자기 것처럼 사용해왔으며 프랑스 사회당은 당의 강령에 우파의 미덕인 관용을 걸어두고 있다.
유럽좌파가 시장경제와 자유경쟁을 인정했다고 해서 그것이 좌파의 덕목이 아님은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남의 집에 오랫동안 기숙하고 있었지만 정의는 좌파가 관용은 우파가 제집이다. 표창원과 홍세화의 진술에서 혼란을 걷어낼 수 있게 해주는 방법론이 레이코프의 이중개념주의이다. 중도는 상대 이념의 장점을 인정하며 그것을 가져다 쓰는 특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중도좌파인 프랑스사회당은 좌파적 가치와 우파적 가치를 7대3 정도의 비율로 갖고 있고 중도우파인 영국 보수당도 좌파적 가치와 우파적 가치를 3대7 정도 비율로 갖고 있다.표창원은 영국보수당이 갖고 있는 좌파적 가치를 홍세화는 프랑스 사회당이 갖고 있는 우파적 가치를 우연히 보고 그것을 말했던 것뿐이다. 그들이 왜 남의 것을 갖고 있는지 알지 못했거나 모른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에서 우리사회에 만연한 이념갈등 해결의 열쇠를 찾을 수 있다. 중도는 단지 중립이 아니라 상대 진영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가져다 쓰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 한가지를 붙인다. 안철수는 지난 대선 국면에 이런 요지의 발언을 했다.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 교육문제는 진보 가족문제는 보수, 이런 입장을 갖고 있는 사람은 진보인가 보수인가 대답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진보 보수 구분은 효용을 잃었다. 상식 비상식으로 나눠서 봐야 한다. 그런데도 자꾸 세상을 진보 보수로 갈라서 보는 사람은 그런 구분을 통해 개인의 이익을 취하려는 벌레다. 이중개념주의는 이런 발언이 무지의 산물임을 드러나게 해준다. 이런 언술에는 진보는 진보답고 보수는 보수다워야 한다, 남자는 남자답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라는 생각이 진보 보수 논의구도를 망치고 있다. 극좌 극우 이념이라면 그런 생각이 통할 수 있다. 그러나 중도좌파 중도우파에는 늘 상대의 것이 섞여 있게 마련이다. 남성에겐 여성성이 여성에겐 남성성이 일부 담겨있다. 안철수를 좋아했던 국민들은 그의 중도성향을 지지했던 것인데 정작 그 자신은 중도에 대해 매우 수준낮은 인식을 보여주었다.
이제는 김진석 교수가 제기한 과제로 다시 돌아가자. 이번 특집의 기획자인 황해문화 편집주간 김명인 교수는 이렇게 평한다.
“(김진석 교수는) 보수 진보의 진영논리를 넘어서고, 중도와 진보(또는 좌파)를 제대로 구별하는 것과 병행하여 '적극적 중도' '혹은 '복잡성의 중도'를 하나의 실천적 대안으로 내세우겠다는 것이다.” --황해문화 7쪽
김명인 교수의 말처럼 복잡성의 중도가 실천적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이중개념주의처럼 중도운동에 방법론적 에너지를 공급해줄 수 있을까. 조심스럽게 필자의 생각을 밝힌다면, 복잡성의 중도는 불안정하고 유동적인 상태여서 그 자리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기는 어렵다. 결국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게 된다. 복잡성의 중도는 햄릿의 멘탈리티이다. 고도화된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는 그런 단계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의사를 분명히 하라는 강요를 받게 된다. 그러면 밤을 새워서라도 고민을 하고 어느 쪽이든 입장을 선택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 아닌가. 그러므로 복잡성의 중도는 이중개념에 이르기 전에 거치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 김진석 교수도 “물론 개별적인 문제에 대해 결정을 내릴 상황이 닥치면, 보수나 중도나 좌파적 결정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김 교수는 어느 쪽으로든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까칠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이 적극적 중도가 된다고 믿는 것같다. 하지만 이런 까칠함이라는 에너지를 모은다고 사회운동에 이르게 할 정도의 동력이 될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복잡성의 중도의 생명력은 앞으로 김 교수가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지에 달려있는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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