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한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쿠데타다.
[유신 쿠데타, 첫 번째 마당] 여당도 당황케 한 청와대의 '공화국 죽이기' 작전
[유신 쿠데타, 두 번째 마당] 궁정동의 은밀한 '사업'과 박정희, 그 특별한 관계
[유신 쿠데타, 세 번째 마당] 박정희와 김일성, 1인 독재 위해 뒷거래?
프레시안 :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 쿠데타의 명분으로 통일 문제를 거듭 제시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박정희는 유신 체제를 만들면서 통일 문제를 아주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통일을 위해 유신 체제를 만들었다는 식의 설명을 많이 했다. 이건 그전에 박정희 자신이 보인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그렇게 설명했는지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박 대통령이 1972년 10.17 특별 선언에서 그해 12월 27일 유신 대통령 취임사에 이르기까지 통일 문제를 그렇게 강조했는데도 그간 학계는 왜 이 부분을 사실상 무시했는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두 가지를 모두 연구해야 한다.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난 학계는 학계대로 이걸 연구할 필요는 있었다고 본다.
유신 쿠데타 바로 전해인 1971년 12월 6일 박정희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이어서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국가 보위에 관한 특별 조치법'(국가보위법)을 그해 12월 27일 여당 단독으로 통과시킨다. 그렇게 날치기로 통과시킬 때까지 박정희가 강조한 건 침략에 광분하는 북한, 남침 위협 같은 것이었다. 그걸 그렇게 강하게 내세웠다. 그런데 1972년 10.17 특별 선언이나 그 직후에 나온 글들을 보면 오히려 '야당하고는 대화할 수 없다. 야당은 참 나쁘다', 이렇게 강조하는 게 아주 많다. 북한에 대해서는 비난을 퍼붓는 대신 '평화 통일을 하고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유신 체제와 같은 대결단이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
통일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과 10.17쿠데타의 관계
프레시안 : 왜 그런 태도를 취한 것인가.
서중석 : 10.17 특별 선언 때부터 침략에 광분하는 북한, 남침 위협 같은 이야기가 쑥 빠진 이유는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10.17쿠데타에서 12.27 유신 대통령 취임에 이르기까지 일부에서는 '이건 북한의 협조를 얻어 일어난 일 아니겠느냐'며 거울 효과를 이야기하고 남북의 권력자들이 짝짜꿍했다는 식으로까지 이야기하는데, 여기에서 만일 협조가 있었다면 통일 문제일 것이라고 난 본다.
뭐냐 하면, 북한에 대해 1960년대 내내 그렇게 강경하게 비난을 퍼부었고 1971년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할 때도 침략에 광분하는 북한, 남침 위협을 그렇게 강렬하게 이야기했는데 1972년 10.17 특별 선언 등에서는 평화 통일, 남북 대화를 강조하지 않았나. 그렇게 한 이유로 우선 남한 주민들을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이 여기서 적극적으로 계속 협조를 해줘야만 유신 체제로 가는 데 좋은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고 봤기 때문에 그 이전에 했던 식으로, 예컨대 국가 비상사태 선언 때 한 것처럼 북한을 강하게 비난하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 (1971년 국가 비상사태 선언이 나오자 박정희 정권을 강도 높게 비난했던 북한이 유신 쿠데타 초기에는 다른 모습을 보인 점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10.17쿠데타가 일어난 때부터 1972년 세밑까지 북한은 유신 쿠데타와 박정희 정권에 대한 강한 비판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남한에 대한 강한 비난은 1973년 이후 다시 늘어난다. <편집자>)
그런 식으로 북한의 협조가 필요했기 때문에도 그랬겠지만 그건 부분적이다. 내가 보기에 제일 큰 요인은 통일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을 박정희 쪽에서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유신 쿠데타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정변 아닌가. 민주 헌법 체제를 전면적으로 싹 바꾸는 일이었다. 그런 엄청난 일을 가능하게 만들려면 국민들에게 상당 부분 설득력이 있게끔 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거기서 통일처럼 호소력이 큰 건 없다는 것을 1964년 신금단 사건 같은 것들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1972년 5월 이후락이 평양에 갈 때 대담하게 합의를 볼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고, 박정희가 예상했을 반향이 7.4남북공동성명 발표 후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확인하면서 10.17쿠데타로 간 것 아니냐고 볼 수 있다.
그런데 10.17 특별 선언에서 12.27 대통령 취임사에 이르기까지 공식 선언문들에서는 북한을 강하게 비난하지 않았던 박정희 정부가 그러면 7.4남북공동성명의 통일 3원칙 같은 걸 정말 받아들일 생각을 갖고 있었느냐. 난 이 부분은 그것대로 충분히 논란을 해야 한다고 본다. 유신 체제로 갈 때 박정희가 왜 그렇게 통일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는가를 연구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문제도 제대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7.4공동성명 발표 직후 반공 강화 지시한 박정희, 남북 정상 회담도 거부
프레시안 : 7.4남북공동성명 발표 후 박정희 정권은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바로 그날 오후 박정희는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 유혁인 정무비서관 등을 불러서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것처럼 착각하고 기뻐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은데 공산당과의 대화에 성공한 일이 세계에 거의 없었어. (…) 자네들이 할 일은 일방 협상과 아울러 책임 전가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는 것이야", 이렇게 말했다. 이 성명 발표 첫날부터 대화가 깨질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대비책을 세우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리고 7.4남북공동성명 발표 직후 열린 기자 회견에서 이후락은 "이번 합의로 인한 종래의 통일 원칙의 변동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정말 소름 끼치는 답변 아닌가. 두 사람 다 참 무서운 사람이다. 민족의 열망과 염원이 담긴 7.4남북공동성명을 짓밟아 휴지 조각으로 만드는 주장 아니냐고 볼 수 있지 않나. 이런 부분들은 분단 이래 최대 환호를 불러온 7.4남북공동성명이 유신 체제를 만들어내기 위한 이용물에 지나지 않았던 것처럼 이해되게 하는 측면이다.
다음 날인 7월 5일, 얼굴마담에 지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총리였던 김종필은 국회에서 "이 시점에서 지나친 상상이나 환상은 금물"이며, 7.4남북공동성명은 북한에 의해 강점돼 우리의 실질 행정권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없도록 하는 방법을 대화로 마련하자는 것이지 북한과 공조하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7월 7일 국무회의에서 박정희는 이 성명에 대해 지나친 낙관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지금까지 해온 반공 교육을 계속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이날 박정희 정권은 7.4남북공동성명에 담긴 남북조절위원회의 주요 임무는 충돌 방지라고 설명하고, 회색적인 통일 방안은 절대 불가하다고 밝혔다.
7월 13일과 28일에는 유럽 거점 간첩단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던 김규남과 박노수가 급속히 처형된다. 다른 사상범 30여 명도 이 무렵 모두 처형됐다.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으면 거기에 따라 처형이 좀 연기돼야 하는 것 아닌가. 김규남과 박노수는 2013년 법원에서 재심을 통해 무죄로 확정됐다. 하여튼 이것도 반공 태세를 강화하고 허점을 만들지 않겠다는 박정희 대통령다운 조치가 아니겠는가. (동백림 사건 2년 후인 1969년, 김형욱이 이끌던 중앙정보부에서 박노수, 김규남 등을 잡아들여 간첩으로 몰아갔다. 유럽 거점 간첩단 사건은 그렇게 시작됐다. 사건 당시 박노수는 케임브리지대에 재직 중이던 연구자였고 김규남은 민주공화당의 현역 의원이었다. 1970년 대법원은 두 사람에게 사형 확정 판결을 내렸다. 두 사람은 재심을 청구했지만, 1972년 7월 돌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진실화해위)는 2009년 10월 이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내용을 의결하고, 국가의 사과와 법원의 재심을 권고했다. 진실화해위는 사건 당시 영장 없이 불법 연행·구금,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박노수를 권총으로 위협한 것을 비롯해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각종 가혹 행위를 한 점, 재심 개시 심리 중 사형을 집행한 점 등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2013년 10월 서울고등법원은 박노수와 김규남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편집자>)
프레시안 : 이 무렵 남북 정상 회담 이야기도 오가지 않았나.
서중석 : 이후락에 앞서 1972년 3월 정홍진(중앙정보부 협의조정국장)이 방북했을 때도 그렇고, 그 이후에도 북한은 정상 회담을 하자고 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박정희는 그것을 거부했다. 남북 관계의 진전이 불러올 변화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연철 씨가 쓴 글을 보면, 한때 박정희 정권은 7.4남북공동성명의 발표 자체를 하지 않으려 했다고 나온다. 이에 대해 미국은 북한의 적극적인 평화 공세 때문에 박정희 정권이 공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분석했다.
1972년 11월 2일 이후락 등이 방북해 제2차 남북조절위원회 공동 위원장 회의를 하는데, 여기서 실질적 논의가 이뤄진다. 그런데 박정희는 이 회의 결과에 불만이 많았다. 남북 대화가 실질적으로 뭔가 진척되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는 뜻이다. 그해 11월 30일 제3차 남북조절위원회 공동 위원장 회의가 이번에는 서울에서 열리는데, 이때는 북한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회의에서 별다른 진척이 없었던 것으로 나와 있다. 남쪽은 시간 벌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12월 1일 북한 대표단을 만난 자리에서 박정희는 아무런 구체적 제안 없이 단계론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남쪽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자 1973년에 들어서면서 북쪽도 남북조절위원회 회의에 흥미를 잃어가는 것처럼 보였다고 홍석률 교수의 책 <분단의 히스테리>에 나온다.
김대중 납치 사건 후 단절된 남북 대화
프레시안 : 최고 권력층의 속내, 남북 대화의 구체적인 상황 등을 충분히 파악하기 어려웠던 이 당시에는 어느 장단에 춤춰야 할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어떻게 보면 연극 같기도 하고 앞뒤가 안 맞는다고도 볼 수 있는 통일 관련 여러 사항은 조금 지나면 안개가 걷히게 된다. 1973년 6월 23일 박정희는 '평화 통일 외교 정책에 관한 특별 선언'(6.23선언)이라는 중요한 선언을 한다. "우리는 긴장 완화와 국제 협조에 도움이 된다면 북한이 우리와 같이 국제 기구에 참여하는 걸 반대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놀라운 제안을 한다. "국제연합 다수 회원국의 뜻이라면 통일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우리는 북한과 함께 국제연합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국제연합 가입 전이라도 대한민국 대표가 참석하는 국제연합 총회에서 한국 문제 토의에 북한 측이 같이 초청되는 걸 반대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호혜 평등의 원칙 하에 모든 국가에 문호를 개방할 것이며 우리와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국가들도 우리에게 문호를 개방할 것을 촉구한다", 이런 내용이다.
이처럼 6.23선언은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물론 유엔 총회에서 이뤄지는 한국 문제 토의에 북한과 같이 초청되는 걸 반대하지 않는다는 건 현실을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이야기할 수는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실을 긍정하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볼 수 있고, 유엔 동시 가입 건도 당시 통일 세력한테는 비난을 받았지만 이 제의 자체는 중요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날 김일성도 조국 통일 5대 강령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여기서 여러 중요한 제안을 했는데, 그중 제일 중요한 것이 단일 국호에 의한 남북 연방제를 실시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고려연방공화국이라고 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이름까지 붙였다. 아울러 유엔에 남한과 북한이 각각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연방제라도 실현한 다음에 고려연방공화국이라는 국호를 가지고 하나의 국가로 들어가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어쨌건 박정희가 6.23선언을 한 건 데탕트 추세에 맞춘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해 9월 18일에 열린 유엔 총회에는 남북한이 옵서버로 동시에 참석했다. 그해에는 남북한을 유엔 총회에 동시에 초청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있었고 그런 속에서 6.23선언이 나오게 된 것이다. (1973년 5월 북한은 유엔 산하 기구인 세계보건기구에 가입했다. 이를 계기로 뉴욕에 유엔 주재 대표부를 설치하고, 유엔 총회에서 이뤄지는 한국 문제 토의에 옵서버 자격으로 처음으로 초청됐다. 한편 남북한이 처음으로 동시에 참석한 1973년 9월 18일 유엔 총회에서는 동서독의 유엔 동시 가입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편집자>) 그런데 6.23선언이 나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문제가 불거진다.
프레시안 : 어떤 문제가 발생했나.
서중석 : 6.23선언 후 두 달도 안 지난 1973년 8월 8일 김대중 납치 사건이 일어난다. 그러자 북한은 남쪽과 이제 대화를 할 수 없다고 나왔다. 김대중 납치 사건에 중앙정보부가 깊숙이 개입한 것을 반영한 것이겠지만, 8월 28일 김영주 남북조절위원회 평양 측 공동 위원장은 "이후락과 같은 자들을 제거하고, 민족적 양심이 있고 쌍방 사이의 신의를 지킬 줄 알며 민족 분열의 고정화를 반대하고 진정으로 평화 통일을 염원하는 사람으로 교체할 것을 제기한다"고 발표했다. 남북조절위원회 남측 공동 위원장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바꾸라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김대중을 비롯하여 체포, 투옥한 애국자들을 석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질적으로 대화를 중단하겠다는 것을 이런 성명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때부터 박정희는 1971년 국가 비상사태 선언에 나온 것과 같은 강렬한 반북, 반공 캠페인을 벌이게 된다. 1975년 인도차이나 사태, 1976년 판문점 도끼 사건이 일어나면서 그것은 훨씬 더 격렬한 형태로 전개된다.
정리하면, 1960년대에 분단 고착화 정책을 강렬하게 썼던 박정희는 1970년대 초에는 8.15선언 등을 통해 국제 데탕트 분위기에 조금 호응을 했다. 그러면서 10.17쿠데타 무렵, 그러니까 7.4남북공동성명부터 한반도 평화 정착과 평화 통일을 유신 체제를 성립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그러다가 1973년 8월 남북 대화가 중단된 것을 계기로 유신 체제를 수호하고 공고화하는 데 반공, 반북 캠페인을 적극 활용했다. 유신 체제 중반기와 후반기를 보면 반공, 반북 운동이 없으면 어떻게 유신 체제가 유지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시 말해 유신 체제를 지키고 굳건히 하는 데 반공, 반북 운동보다 더 좋은 건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여기서 한 가지 논의할 것이 있다.
극렬한 반공·반북 캠페인이 빚은 파시즘적 비인간성, 그 일그러진 초상
서중석 : 박정희 추종자들, 극우 반공 세력 가운데 일부는 '박정희가 유신 정변을 일으킨 건 통일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 남북 관계가 급속히 진전된 것, 즉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도 발표하고 하게 된 것은 박정희가 통일 준비로 경제를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을 폈다. 이런 주장이 얼마나 허구인가 하는 것을 두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
우선 유신 시대에 그야말로 극단적인 반공 캠페인을 여러 형태로 전개하지 않았나. 교육이나 TV 또는 대중 동원을 통해 그런 게 이뤄졌는데, 그때 반공 이데올로기가 강하게 뿌리박힌 사람들은 2000년 6.15정상회담 이후에도 남북 관계가 잘되는 걸 적대시한다고 할까, 남북 교류 등이 잘되고 한반도 평화 조성 작업이 잘돼나가는 것에 대해 강렬한 적대감과 공포감 같은 걸 보여주면서 비난하고 반대했다. 그러면서 긴장을 고조시키고 전쟁을 불사하면서 '북한은 곧 망한다'는 식의 흡수 통일론을 강하게 주장했다. 한반도 평화를 이뤄내고 통일로 나아갈 수 있는 남북 협력과 교류의 길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예전에 조봉암의 평화 통일론을 이야기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 통일론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설명하지 않았나. 바로 그러한 북진 통일론과 비슷한 효과를 유신 협력 세력들이 발생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박정희 시대에만 철저하게 분단을 고착화하는, 그래서 분단 체제라고 할 만한 현상까지 나타나게끔 하는 일을 한 것이 아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남북 관계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때에도 그것에 대한 가장 강한 반대 세력으로 여전히 큰 역할을 하면서, 말로는 '통일 준비로 유신 체제를 만든 것이다. 경제를 발전시켰기 때문에 통일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강변했다. 하여튼 박정희 정권 시대, 그중에서도 유신 체제, 특히 유신 후기인 1975년 이후 전개된 반공 캠페인은 특정 지역 사람들 및 일정한 연령층의 사람들을 포함한 상당수의 국민들로 하여금 굉장히 강한 반북, 반공 감정을 지금도 강렬히 갖게끔 하는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달리 이야기하면 이들은 인간이 살 수 없는 곳, 이리 떼나 흡혈귀 같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 북한이라는 식으로 1975년 이후 초등학교 등에 붙어 있던 포스터라든가 구호 등을 통해 주장했다. 이건 반공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떠나서 교육면에서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본다. 인간에 대한 증오심을 갖게 하는 것, '북한에는 사람이 사는 것 같지 않네' 하는 감정을 갖게 하는 것은 동포애 문제 이전에 인간의 보편적인 인간애를 가지고 접근하는 걸 다 막아버리는 것 아닌가. 그런 식으로 증오심과 적대감을 품게 하면서 비인간성을 강제한 것이다. 난 이걸 파시즘적 비인간성이라고 본다. 어쨌건 1970년대에도 북한이 쫄딱 망하기만을 바라고 북한의 인간들이 어떤 식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오늘날에도 그와 같이 생각하는 것 아닌가. 인본주의, 인도주의와는 상반되는 인간형이 아직도 상당히 존재하는 것 아닌가. 이런 건 남북 관계를 떠나서 우리 사회 자체를 아주 위태롭게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난 항상 갖고 있다.
프레시안 : 박정희 집권기 남북 대화와 관련해 예전에 이런 의견을 접한 적이 있다. 1960년대까지는 남한이 전반적인 국력에서 북한을 압도하지 못했고 그런 상황에서 교류는 북한에 흡수되는 통로로 이용될 수 있기에 남북 대화 자체가 어려웠지만, 1970년대는 그와 달랐다는 주장이다. 1960년대에 경제력을 키우며 북한과 대화를 해볼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한 박정희 정부가 1970년대 들어 남북 대화 쪽으로 나아간 건 자연스러운 것 아니냐는 의견이다. 이런 주장, 어떻게 보나.
서중석 : 그런 설명을 한다면, 그러면 유신 쿠데타 이듬해인 1973년 이후, 그중에서도 특히 1975년 이후 그렇게까지 극렬하고 과격한 표현을 써가면서 반공 캠페인을 벌인 건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일 아닌가. 1975년 이후에 전개된 반공 캠페인이라는 건 1950∼1960년대와는 비교가 안 된다. 그 규모도 그렇고 모든 면에서 아주 극렬한 형태로 전개된다. 북한에 대한 적개심, 증오심이 말할 수 없이 컸다. 다시 말해 어째서 박정희 쪽에서 1973년 6.23선언 때까지만 통일에 대해 간절한 뜻을 품는 모습을 보이다가 그 이후엔 갑자기 변한 것인지를 설명해야 하지 않나. 그렇지만 그런 시각으로는 이런 걸 도무지 설명할 수 없다고 본다.
어쨌건 다시 돌아오면, 유신 쿠데타를 하면서 통일 문제에 대해 박정희가 그렇게 많이 이야기한 것에 연구자들이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 건 문제가 있다고 앞에서 이야기했는데 박정희가 유신 체제를 만들려고 한 진정한 의도나 생각, 이건 10.17 특별 선언을 비롯해 유신 쿠데타를 일으킨 직후 발표한 것들에 다 담겨 있다.
유신 체제를 만든 가장 큰 이유는 한국적 민주주의 구현
서중석 : 뭐냐 하면 한국적 민주주의, 이게 정답이다. 그게 유신 체제를 만든 가장 큰 이유다. 다른 건 이용물에 지나지 않았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유신 체제 전 기간에 걸쳐서,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초지일관해서, 그리고 10.17 특별 선언에서도 빼놓지 않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이 부분에 관해 깊이 있는 연구를 해야 한다고 본다.
10.17 특별 선언에서 이 부분을 보자. 이 선언에서는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키겠다, 평화 통일을 하겠다는 게 중심 과제를 이루고는 있지만 "지금 우리의 주변에서는 아직도 무질서와 비능률이 활개를 치고 있으며 정계는 파쟁과 정략의 갈등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같은 민족적 대과업마저도 하나의 정략적인 시빗거리로 삼으려는 경향마저 없지 않습니다"라고 주장했다.
무질서, 비능률 같은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신 체제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여기서도, 아주 강렬하게까지는 아니어도 깔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0월 24일 유엔데이에는 10.17 비상 조치에 대해 "이 유신적 개혁이야말로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를 토착화시킬 수 있는 마지막 길"이라고 하면서 민주주의 토착화, 즉 한국적 민주주의 실현을 이야기했다. 또 헌법 개정안 제안 이유서에는 왜 유신 헌법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해 이렇게 돼 있다. "우리는 또한 현행 헌법 하에서의 정치 체제가 가져다준 국력의 분산과 낭비를 지양하고 이를 조직화하여 능률의 극대화를 기하며 민주주의의 한국적 토착화를 가능케 하는 유신적 개혁을 단행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다." 한국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주장을 이렇게 웅변적으로 잘 표현한 게 어디 있나. 12월 27일 대통령 취임사를 보면, 앞으로 어떻게 해나가겠다며 제시한 사항의 첫 번째와 두 번째는 한반도 긴장 완화와 평화 통일이었는데 세 번째는 "우리 역사와 전통 및 현실에 알맞는(알맞은) 정치 제도를 육성, 발전시키며", 이렇게 돼 있다. 한국적 민주주의를 구현하겠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박정희가 초지일관해서 계속 강조한 것은 '한국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유신 체제가 불가피하다. 현재처럼 비능률적이고 비생산적인 정치, 야당의 구태 같은 것이 계속 나타나는 정치를 해서는 안 되고 능률을 극대화하는 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난 이것이 유신 체제를 만든 박정희의 기본 목적이라고 본다. 그런데도 이 부분에 관한 연구를 등한시하는 것, 최영 교수라든가 이준식 박사의 연구를 빼놓으면 연구다운 연구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이 부분을 깊이 있게 연구해야 한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열네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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