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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공' 박정희, 김일성과 대화하려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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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멸공' 박정희, 김일성과 대화하려 쿠데타?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11> 유신 쿠데타, 네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한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쿠데타다.

[현대사 이야기 연재 이전 주제 바로 가기]

[유신 쿠데타, 첫 번째 마당] 여당도 당황케 한 청와대의 '공화국 죽이기' 작전

[유신 쿠데타, 두 번째 마당] 궁정동의 은밀한 '사업'과 박정희, 그 특별한 관계

[유신 쿠데타, 세 번째 마당] 박정희와 김일성, 1인 독재 위해 뒷거래?

프레시안 : 지금까지 유신 쿠데타가 어떤 식으로 발생해 박정희 1인 체제가 됐는지를 살폈다. 그런데 박정희가 왜 유신 쿠데타를 일으켰는지에 대해서는 논자마다 의견이 엇갈린다.


서중석 : 유신 쿠데타는 어떻게 보면 해방 이후 최대의 정치적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렇게 큰 사건, 그리고 상상할 수조차 없던 사건이 그야말로 돌연히 일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은 것 같고, 학자들과 연구자들이 그에 관해 많은 논의를 하게 됐다.

그런데 난 유신 체제에 대한 논의는 활발하면서도 다른 부분에 대한 논의는 별로 없는 건 좀 문제가 아니냐는 생각을 하고 있다. 예컨대 이승만이 발췌 개헌(1952년)을 하고 사사오입 개헌(1954년)을 하고 3.15 부정 선거(1960년)를 저지르고 한 것 등에 대해 사회경제적 배경 같은 걸 가지고 설명하려는 시도조차 별로 하지 않는다. 발췌 개헌이나 사사오입 개헌이 순전히 개인의 권력적 동기에 의해 이뤄졌다는 식의 설명으로 가고 있다. 이런 사안들에 대해 사람들이 유신 체제와는 다르게 대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그전부터 들더라. 또 전두환 신군부의 12.12쿠데타(1979년), 5.17쿠데타(1980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유신 쿠데타에 대해서처럼 12.12쿠데타, 5.17쿠데타가 일어난 배경, 요인에 대해 연구한 게 있느냐 하면 별로 없다. 주로 과정을 설명하는 것들이 많다. 선입견을 갖고 정리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런 점에서도 유신 체제의 배경, 요인에 대한 설명과는 좀 다르다. 왜 이렇게 다른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박정희 유신 체제의 배경, 요인에서 1969년 3선 개헌이 아주 중요한데, 그럼에도 3선 개헌의 배경이나 요인을 충실히 연구한 것을 거의 볼 수 없다. 이것도 이상하지 않나. 꼭 유신 체제 하나만 가지고 문제 삼는다는 것은 논란이 될 수 있다. 유신 체제가 논란이 돼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논란이 되는 건 당연한데, 그러면 왜 다른 사안에 대해서는 그와 같이 묻지 않고 연구도 충분히 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우선 하고 싶다.

유신 쿠데타가 왜 일어났느냐 하는 것과 관련해 첫 번째로 박정희 본인이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다. 어느 나라, 어떤 사건을 연구하든 당사자의 말을 들어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그렇다면 박정희는 무엇 때문에 10.17쿠데타를 일으켰는지, 박정희의 말을 가지고 그것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그 작업은 많이 돼 있지 않다.

유신 쿠데타 이유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내세운 박정희

▲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로 한반도 평화, 남북 대화, 평화 통일 등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는 1960년대에 박정희 정권이 통일 운동을 탄압하고 통일 논의를 억제했던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사진은 2011년 11월 14일 박 대통령 생가(경북 구미) 부근에 세워진 고인의 동상 제막식 모습. ⓒ연합뉴스
프레시안 : 유신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를 박정희는 어떻게 설명했나.

서중석 : 박정희가 유신 체제와 관련해 제일 말을 많이 한 건 1972년 10월 17일부터 12월 27일까지다. 이때 박정희는 통일을 위해 또는 남북 대화와 한반도 평화를 위해 10.17 계엄을 선포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10.17 특별 선언이라든가 그 이후에 나오는 여러 자료에서 박정희는 그와 같은 주장을 했다.

10.17 특별 선언의 경우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서 차이가 있지만, 박정희는 대부분을 바로 이 한반도 평화, 긴장 완화 그리고 남북 관계와 평화 통일을 위해 자신이 이런 일을 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데 할애했다. 10월 17일 특별 선언을 보면 남북 간의 대화도 중요시했다. 민족의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계속 대화를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헌법을 보면 그렇게 하게 돼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얘기였다. "우리 헌법과 각종 법령, 현 체제는 동서 양극 체제 하의 냉전 시대에 만들어졌고 하물며 남북의 대화 같은 건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시기에 제정된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국면에 처해서는 마땅히 이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로의 일대 유신적 개혁이 있어야겠다"고 했다. 데탕트에 전면적으로 순응하겠다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유신적 개혁"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게 바로 평화 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남북 대화를 진정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내는 것이고, 그렇게 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 유신 체제라고 설명한 것이다.

그로부터 열흘 후인 10월 27일에 나온 헌법 개정안 제안 이유서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이유서 첫머리에 "국가의 안전과 번영, 그리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민족의 활로를 개척해나가기 위해서" 이 체제를 만든 것이라고 돼 있다. 그러면서 이 헌법 개정안의 주요한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면서 그 골자를 이야기한다. 그중 첫 번째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이라는 역사적 사명 완수를 지향하였으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렇게 박정희는 유신 쿠데타를 일으킨 것도, 그래서 유신 헌법 개정안을 제안하게 된 것도 조국의 평화적 통일,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아울러 평화 통일 전에 이산가족 상봉도 해야겠고 한반도 평화의 토대도 다져놔야겠는데, 그걸 위해 유신 체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했다.

프레시안 :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선출한 1972년 12월 23일과 그 취임식이 열린 12월 27일에는 어땠나.

서중석 : 심지어 '통대'에서 대통령을 선출할 때도 한반도 평화를 위해 유신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주장을 한다.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장이 박정희이지 않았나. 12월 23일 박정희 의장의 통일주체국민회의 개회사를 보면, 이 개회사에서도 평화 통일을 위해 유신 체제를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거의 전부 그런 식으로 돼 있다. 더더군다나 이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일동 이름으로 나온 결의문을 보면, 결의문이 온통 박 대통령의 평화 통일 계획을 뒷받침하겠다는 것을 아주 강조하면서 계속 되풀이하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그야말로 평화 통일만 이야기했다. 이들이 어쨌건 일반인을 대표해 나왔기 때문에 '평화 통일을 뒷받침하겠다'는 것을 더 강조했는지는 몰라도, 그렇게 돼 있다.

개회사를 살펴보자. 앞에서 말한 것처럼 거의 전적으로 통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것도 감상적으로까지 하는 게 특징이다. 첫머리는 이렇다. "우리 조국의 산하가 남북으로 분단된 지도 어언 27년, 그동안 5000만 겨레가 목메도록 잊지 못한 한결같은 소망이 있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갈라진 국토를 재결합하고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하려는 것, 바로 그것뿐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처럼 호소력 있는 말이 어디 있겠나. 그러면서 "나는 이 남북 대화야말로 이제는 그 누구도 저해할 수 없으며 또한 중단돼서는 안 되는 민족의 지상명령이라고 굳게 믿는 바입니다", 이렇게 밝혔다. 참, 이렇게 말은 무슨 말이든 해도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번엔 '통대 일동'으로 나온 결의문 중 1번만 보자. "1. 우리들은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영도 하에 추구되는 조국의 평화 통일을 위한 모든 노력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이를 적극 뒷받침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결의문은 100퍼센트 통일만 이야기하고 있다. 일반 민중에게 제일 설득력이 있었던 게 바로 이 통일 문제라고 봤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본다.

12월 27일 취임사에서 박정희는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것에 대해, 첫 번째로 앞으로 한반도에서 다시는 전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고 두 번째로 남북이 하나의 민족으로서 평화와 번영을 추구해나갈 수 있도록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대화를 계속하고 이를 넓혀나가겠다고 이야기했다. 첫 번째, 두 번째 모두 한반도 평화와 평화 통일 이야기, 그리고 거기에다가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가겠다는 설명을 한 것이다. 유신 체제를 왜 만들게 됐는가에 대해 이것으로 주로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유신 쿠데타 명분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던 1960년대 박정희 정권

프레시안 : 평화와 분단 해소를 위해 진정으로 노력한다면 그건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렇지만 이는 5.16쿠데타 후 박정희 정권이 보인 모습과는 여러모로 대조적인 태도 아닌가.

서중석 : 박정희가 10월 17일 특별 선언, 12월 23일 '통대' 개회사, 12월 27일 대통령 취임사에서 평화 통일, 한반도 평화를 그토록 강조한 건 1960년대에 박정희가 통일 논의를 통제한 것과 비교할 때 너무나도 다른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1961년 5.16쿠데타 후, 통일 운동을 폈던 혁신계라든가 여러 통일 운동 활동가들을 잡아들이지 않았나. '혁명 검찰부', '혁명 재판부'는 이들이 특수 반국가 행위를 저질렀다고 하면서 이들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그럼으로써 통일 세력, 혁신계 진보 세력의 씨를 말렸다는 이야기까지 듣는다. 3.15 부정 선거를 저지른 자들, 그와 함께 4.19 때 발포한 자들, 마산에서 발포한 자들, 1960년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을 습격한 깡패들 등 3.15 부정 선거와 관련된 수많은 사건에 관여한 자들에 대해서보다 더 강하게 통일 운동 관련자들에게 중죄를 물었다. 통일 운동을 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했던 장건상이라든가 김성숙 같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특수 반국가 행위 또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면서 이들을 막 질타하고 이들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그런 현상은 국가가 민족하고 어떤 관계에 있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한다. 우리가 애국·애족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 않나. 그런데 민족을 위해 통일 운동을 편 것이 반국가 행위로 처벌을 받는 경우 그러면 애국과 애족이 다른 것인가, 민족을 위하는 것과 국가를 위하는 것이 다른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까지 부딪히게 된다.

박정희 쿠데타 세력은 그런 위험한 경계선에 이를 정도로 철저하게, 통일 세력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초강경 탄압을 했다. 5.16쿠데타 때 내건 '혁명 공약' 1항에 있는 것처럼 반공을 재정비, 강화하기 위해 그랬을 것이고 미국에 잘 보일 필요가 있어서 그랬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느냐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심하게 했다. 5.16쿠데타 직후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통일 문제에 대해 이렇게 통제 내지 금압할 수 있느냐고 볼 수 있는 여러 사건이 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아버지!"- "금단아!" 애끊는 부녀 상봉에 방방곡곡이 눈물바다


프레시안 : 어떤 사건들이 일어났나.

서중석 : 1950년대에는 북진 통일론을 가지고 평화 통일론을 비롯한 여러 통일 논의를 막았다고 본다면, 1960년대에 와서는 선건설론을 가지고 모든 통일 논의를 통제하고 억압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 속에서 유명한 신금단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신금단은 400미터, 800미터 달리기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운 북한 여자 선수로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틀림없이 두세 개 딸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1963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가네포(GANEFO, 대안 올림픽을 지향한 신흥국 경기 대회)에 참가했다고 해서 도쿄올림픽 출전이 금지됐다. 도쿄올림픽은 1964년 10월 10일 개막했는데, 바로 전날인 10월 9일 신금단은 남쪽에 살던 아버지 신문준을 도쿄에서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한국전쟁 때 헤어졌는데, 1964년이면 전쟁 발발 후 14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때 아닌가. 그 오랜 시간 동안 만날 수 없었던 부녀가 극적으로 만나서 "아버지!", "금단아!"라고 절규하는 모습에 한국인들은 굉장히 많이 울었다. 휴전 협정 체결 이후 이때까지 한국인이 제일 많이 운 날이 바로 이 두 사람의 상봉 소식을 라디오라든가 신문을 통해 접했을 때 아니었나 싶다. 신금단이 아버지를 만난 짧은 시간, 15분으로 돼 있는 것도 있고 그보다 더 짧았다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는데 어쨌건 그건 사회에 대단한 충격을 줬다. (두 사람의 짧은 만남과 슬픈 이별 장면을 <동아일보> 1964년 10월 10일 자는 도쿄 발 기사에서 이렇게 전했다. "삼팔선 장벽은 국경보다도 높았다. 국경도 가르지 못하는 부녀의 정을 한칼로 잘라버리는 비정의 금은 또 하나의 비극을 낳아 세계를 울렸다." 편집자)

우리나라의 남북 이산가족을 살펴보면, 반공으로 월남한 경우도 있지만 주로 1951년 1.4후퇴 당시 눈 내리는 겨울날 월남한 사람도 많다. 예컨대 함경도 지방에서 흥남항을 통해 부산으로 오고, 그 시기에 미군이 엄청난 규모로 작전을 하지 않았나. 신금단도 그때 아버지와 헤어졌다. 얼마 안 지나 딸을 다시 만날 줄 알았던 아버지가 전쟁 발발 14년 만에야 딸을 만나게 된 것이다. 부녀가 상봉하는 장면이 그래서 더 애절하게 보였던 것 같다.


▲ '단장의 38선 세계를 울렸다'는 기사를 통해 신금단 부녀의 극적인 만남과 재이별을 보도한 <동아일보> 1964년 10월 10일 자 7면. ⓒ<동아일보> 화면 갈무리

프레시안 : 전쟁의 비극을 온몸으로 견뎌내야 했던 한국인들이었기에 그렇게 많이 울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산가족들은 더 그랬을 것 같다. 신금단 부녀 정도의 그 짧은 만남조차 이룰 수 없던 때였으니 그 마음이 오죽했을까 싶다. 1983년 KBS에서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을 했을 때 방방곡곡이 눈물바다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런 정서가 쌓이고 쌓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후 남북 간에도 이산가족 상봉이 때때로 이뤄지긴 했지만, 이산가족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기엔 여전히 부족한 게 사실이다. 다시 돌아오면, 신금단 사건은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서중석 : 이 사건을 계기로 통일 문제가 상당히 대두됐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두 사람이 만난 지 4일 후인 그해 10월 13일 "신금단 사건에서 보인 북괴의 비인도적 처사를 규탄하는 국민적인 여론을 조성하라", 이렇게 지시했다. 그래서 10월 18일 '북괴 만행 성토 국민 대회'가 열리고 "공산주의는 눈물도, 피도 없다"고 절규하는 모습도 나타난다. 그렇지만 국회에서는 이제 더 이상 이산가족을 나 몰라라 외면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해서 공화당의 이만섭 의원 외 여야 의원 45명이 10월 27일 남북 가족 면회소 설치에 관한 결의안을 제출했다.

이 무렵 조선일보사에서 각계 식자층을 상대로 여론 조사를 한 걸 보면 남북한 가족 면회소 설치안에 적극 찬성한 사람이 49.3퍼센트, 무방하다며 그냥 찬성한 사람이 25퍼센트, 이렇게 해서 74퍼센트 넘게 찬성했다. 이만섭 의원 등이 내놓은 결의안도 바로 그런 결의안이었다. 더욱이 박정희 정부는 통일 논의 자제를 강하게 주장하면서 통제해왔는데, 통일 논의를 해야 한다는 의견이 여론 조사에서 69.4퍼센트나 나왔다. 국시와 관련되니까 삼가야 한다는 의견은 20.8퍼센트밖에 안 나왔다. 그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한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어쨌건 국회에서 이런 결의안이 나오자, 박 대통령은 11월 3일 "국시로 내걸고 있는 유엔 감시 하의 남북 자유 선거라는 통일 방안 이외에 여하한 통일 방안도 있을 수 없다"면서 통일에 대한 "무작정한 여론이나 감상적 공론"을 경계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그것에 이어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11월 6일, 남북 교류론의 근거를 색출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그러면서 이 결의안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남북 교류 이야기만 꺼내도 철퇴 맞던 무시무시한 시절

ⓒ오월의봄
프레시안 :
분단의 장벽을 해소하려는 움직임을 권력 쪽에서 매우 경계했음을 잘 드러내는 사례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와 같은 당시 분위기를 보여주는 사례로는 또 어떤 것들이 있나.

서중석 : 신금단 사건이 발생한 1964년에 몇 가지 사건이 더 일어났다. <세대>라는 월간지 1964년 11월호에 문화방송 사장인 황용주가 쓴 글이 문제가 됐다. 황용주는 박정희하고 대구사범학교 동기 동창이기 때문에 문화방송 사장이 된 사람인데, 통일에 관한 글을 <세대>에 썼다. 제목은 '강력한 통일 정부에의 의지', 부제는 '민족적 민주주의의 내용과 방향'이었다. 박정희가 이야기하는 민족적 민주주의가 이런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박정희의 측근이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이 쓴 것이다. 그런데 이 글에 극우 반공 세력의 주장과는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두 개의 한국을 인정해 유엔에 동시 가입하자고도 했고, 미국과 중국 등 외국군을 철수시키고 유엔 경찰군 감시 아래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이야기도 했다. 검찰은 반공법 위반 혐의로 황용주를 즉각 구속했다. 이러한 황용주 사건도 당시 많이 이야기됐다. (황용주는 5.16쿠데타 후 박정희 세력이 김지태로부터 부일장학회를 강탈해 5.16장학회(오늘날 정수장학회)를 만드는 데 관여한 인물이다. 5.16쿠데타 전 황용주는 김지태가 소유한 <부산일보>의 주필 겸 편집국장이었다. 편집자)

11월 하순, 이번에는 <조선일보> 편집국장 선우휘, 정치부 리영희 기자가 반공법 및 특정 범죄 처벌에 관한 임시 특례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리영희 기자가 쓴 '남북한 동시 가입 제안 준비'라는 기사를 문제 삼아 그렇게 한 것이다. '우탄트 유엔 사무총장이 연례 보고에서 제의한 것을 공식화하기 위해, 통일아랍공화국 등 비동맹 그룹 국가군 일부가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안을 유엔 총회에 정식 의제로 제출할 것 같은 움직임이 있다'고 해외 공관이 보고한 것을 정부 고위 소식통한테 듣고 쓴 기사였다. (통일아랍공화국(아랍연합공화국)은 아랍권 통일 운동의 첫 성과물로 1958년 이집트와 시리아가 통합해 이룬 국가다. 3년 후인 1961년 시리아에서 쿠데타가 일어난 후 시리아는 통일아랍공화국에서 탈퇴했다. 그러나 이집트는 1971년까지 통일아랍공화국이라는 국호를 고수했다. 편집자) 그러니까 사실을 보도한 것이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구속됐다. 리영희 기자는 나중에 1970∼1980년대 학생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글을 많이 쓰는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다. (미국이 유엔을 좌지우지하던 시절, 한국 문제는 매년 북한을 배제한 상태에서 유엔 총회에 상정·토의됐다. 그런데 1955년 반둥 회의를 계기로 제3세계 비동맹 국가들이 조직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남한 대표와 동등한 자격으로 유엔에 북한 대표 초청 등의 이야기가 나온 건 그처럼 변화된 상황 때문이었다. 리영희 기자는 그러한 국제 사회의 동향을 보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정부는 그런 사실을 보도한 것 자체를 있을 수 없는 일로 규정하고 리영희 기자 등을 단죄했다. 편집자)

1966년 5월에는 민주사회당(민사당) 대변인 이필선이 구속됐다. 민사당이라는 이름 자체에서 혁신계 냄새가 나는데, 이 민사당의 발기 취지문에 "국제적 여건을 감안하여 민족 자결을 토대로 부분적 통일로부터 완전 통일을 성취할 수 있는 정치 실현"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그것에 대해 이필선 대변인이 남북한 서신 교환, 기자 교류, 문화인 및 체육인 교류, 동서독에서 이뤄지고 있는 친척 교류를 뜻한다고 설명했는데 그게 반공법에 저촉돼 구속된 것이다. 얼마 안 지나서 민사당 당수인 서민호도 구속됐다. 서민호는 5월 27일 민사당 창당 준비 확대 대회 자리에서 "언론인 교류, 서신 교환 등 부분 통일로부터 완전한 남북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는 우리의 주장은 결코 국시에 위반될 수 없다"고 말하고 "내가 만약 집권한다면 북괴의 김일성과", 여기서도 북한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북괴라고 했는데, "국제 기구를 통하거나 직접 면담을 통해 대질할 용의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 발언이 문제가 돼 이 사람도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이처럼 1960년대에는 남북 교류를 한다든가 통일 논의를 하는 것이 굉장히 많은 제한, 통제를 받았다. 그런데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대단한 변화를 보이게 된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열두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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