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사가 옥죄어 온 시간 / 그 기나긴 고통 앞에 서면 / 비명도 신음도 끊긴 자리에 / 푸른 절망만이 가득하여라 / 전족을 보고 즐거워하던 이들이 / 또다시 네 몸에 감탄할 때 / 고통과 쾌락은 하나로 뒤엉키고 / 이 불경한 장면 앞에서 / 생명은 더 이상 권리가 아닌 / 분노를 잃은 화석이다. (최종석의 <그 겨울의 수목원>(월간문학출판부 펴냄) 중 '분재')
죽어버린 분재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려는 '유시민'의 노력은 번번이 실패했다. 더 이상 혁신도 변화도 원치 않는 '분재의 정당(政黨)'들은 스스로의 업보를 깨닫지 못하고, 그를 '분쟁(分爭)하는 자'로 낙인찍었다. 그가 꿈꾼 우주는 권세(權勢)를 잡은 자들에 의해 사라졌지만, 비로소 그는 자유인(自由人)이 됐다. 진보 자유주의자!
"소나무를 철사로 얽어매서 가지가 그 철사대로 뻗어 나가게 하는 것처럼 '1번'당에 간 사람은 '1번' 모양으로 분재를 하고, '2번'당에 간 사람은 '2번' 모양으로 분재를 한다. 거기에서 삐져나오면 다 잘라낸다. 잘라내는 이유는 그때마다 다르다. 내가 정치인으로 정치권에 속해 있을 때 분재가 된 소나무의 아픔과 슬픔을 느꼈다."
자신을 지키는 일은 늘 아픔을 동반한다. 하지만 불의(不意)의 권력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일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를 지키는 일이 되기도 한다. 박정희 유신독재, 전두환·노태우 군부독재, 기득권으로 분재된 정당에 대한 개인들의 저항은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를 확장하고,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게 한다.
"사람들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도전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자신이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중략) 또 다른 이유는 자기 문제는 아니지만,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다. (중략) 똑같은 일을 시켜 사람을 부리면 돈도 똑같이 주고 대우도 똑같이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의에 대한 본능적 관념·직관에 맞는 것이다. 물론 내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굴뚝에 올라갈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이 문제에 관해 말을 하고 노란 봉투를 보내며, 연대 표명을 하는 이유는 나를 지키기 위해서다."
좌표를 잃어버린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야 할까. 다음 세대와 함께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런 사람이 자신만의 찬란한 색깔을 가지고 그의 길을 올곧게 걸어갈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한국이 망조가 든 이유는 동세대가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국가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퇴행이 일어난다. 나라가 잘되려면, 다음 세대가 좋아하는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중략) 김대중·노무현 캐릭터의 초식(招式)을 잊어버려야 한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그런 특별하고 이례적인 인물들을 흉내 내지 말고 자기 스타일대로 가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현실 정치인들을 김대중·노무현과 비교해서 비판하고 비난하는 걸 그만해야 한다. (중략) 한국이 독일식 비례대표제 선거제도를 가지고 있다면, 나는 자유롭게 내 색깔을 선명하게 냈을 것이다. 정당득표율대로 의석을 갖는 제도 하에서 나는 5% 이상의 지지율은 항상 끌어모을 수 있다. 지금이라도 말이다.(웃음)"
"자유란 내가 원하는 삶을 내가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주의자(Liberalist). '우리 사회에 모든 것들을 자기 의사에 따라 형성하고 변화시키는 권능(權能)'과도 같은 '진짜 자유'를 가진 이들이 마음껏 자신의 색깔을 내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는 언제쯤 도래할까.
- 늘 책을 보던 교사인 아버지와 구멍가게를 하며 궂은 일을 마다치 않았던 어머니의 삶이 인상적이다. 본인의 삶에 가장 중요한 가르침으로 기억되는 순간 또는 말이 있을까?
아버지는 역사 교사였다. 학교에서 사서 담당을 자원해 자식들에게 책을 열심히 공급하는 분이었다.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요구한 적이 없었다. 다만 이상주의적 성향이 있어, 내가 대학 입학시험 원서를 쓸 때 영문과를 권했다. '영어 공부를 해 서양에서 서양철학을 공부한 뒤, 한국에 돌아와 동양철학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냥 흘려듣고 말았다.(웃음) 어머니는 일제 강점기 때 소학교만 졸업했다. 그 세대의 다른 어머니들처럼 특별한 욕심이 없고 단순하게 열심히 산 분이다. 어머니가 19살 때 10살 차이 나는 아버지와 혼인했는데, 그 당시가 6·25한국전쟁이 터지기 직전이라 빨치산이 쳐들어오던 때였다. 어느 날 집에 들이닥친 빨치산 무리가 쌀이며 물건이며, 다 가져가려고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빨치산이 혼수를 넣어둔 함을 가져가려고 하자, 어머니가 '이건, 내 거다'라며 '절대로 못 가져간다'고 버텼다고 한다. 굉장히 단순하고 상식적이면서도 적극적인 어머니와 책을 즐겨 읽는 아버지의 면면이 자식들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
- 1978년 고등학교 3학년 당시 아버지의 월급을 통해 우리 사회의 불공평함·부조리 등을 처음 경험했다는 얘길 들었다.
성장하면서 알게 된 사회의 여러 비밀 중 하나다. 아버지는 정규 교육으로 소학교를 나와 일본에서 고학(苦學)하며 야간상업학교를 나온 게 다였다. 그리고 1946년 미 군정청 교원시험에 합격해 6개월 단기연수를 받고 교사가 됐다. 내내 공립학교에 있다 빚을 갚기 위해 퇴직하고 다시 사립학교로 들어갔다. 호봉이 높은 아버지를 채용하려는 학교는 많지 않았다. 게다가 워낙 소심하고 인간관계가 좁았던 분이라, 누구에게 도움을 받기보다는 호봉을 낮춰서 초임교사 수준의 봉급을 받는 곳으로 들어갔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사회가 잘못됐다고 생각해서 많이 원망했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세상이 이상하고 부조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온전히 사회 탓만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책임도 있었던 것 같다.(웃음)
- 인격과 존엄을 무시하는 이들에 대한 분노와 그에 순응하며 무고하게 살아온 사람들에 대한 답답함은 없었나?
부모 세대는 무엇인가를 주장할 수 있는 환경에서 살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와 내전 및 독재, 그리고 절대 빈곤 속에서 어떻게 자기 주장을 하며 살 수 있었겠나. 그 세대의 십자가였다. 이후 살만해진 우리 세대는 많은 사람들이 '밥만 먹어서 되느냐. 헌법대로, 주인 대접 받으면서 살자'고 민주화를 요구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세대의 십자가였다.
- 법조인이 되려던 출세의 꿈을 포기하고 경제학과를 선택하면서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인간이 사회를 개조할 수 있다는 명제를 가슴 깊이 확신하지 못한 가운데 행동으로 나섰다'고 했는데, 어떻게 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나.
사람들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도전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자신이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앉아서 굶어 죽으나 싸워서 맞아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싸우는 거다. 이길 전망이 있어서 싸우는 게 아니라, 싸우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다. 지금 굴뚝에 올라가는 사람들이 다 이런 이유 때문 아닌가.
또 다른 이유는 자기 문제는 아니지만,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다. 나는 개인적으로 비정규직 제도와 아무 관계도 없다. 한 번도 정규직이 되어 본 적도 없고 될 생각도 없다. 소위 마르크스주의나 좌파주의 담론에 의하면, 정규직은 정규적으로 착취당하고 비정규직은 비정규적으로 착취당한다. 하지만 어차피 착취당하더라도 덜 부당하게 착취당해야 하지 않겠나. 자본주의 제도 자체를 어떻게 하진 못하더라도 똑같은 일을 시켜 사람을 부리면 돈도 똑같이 주고 대우도 똑같이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의에 대한 본능적 관념·직관에 맞는 것이다. 물론 내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굴뚝에 올라갈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이 문제에 관해 말을 하고 노란 봉투를 보내고 연대 표명을 하는 이유는 나를 지키기 위해서다. 사람은 옳지 않은 일, 나쁜 일, 사악한 일, 비인간적인 일을 보고 자기 문제가 아니라며 못 본 척 지나가면 마음이 꺼림칙해진다. 요새 뇌과학자들이나 심리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인간이 원래 그렇게 생겼다고 하더라.(웃음)
나중에 보니까 진짜 이길 줄 알고 한 사람들도 있더라. 그 사람들은 못 이기니까 저쪽으로 가버렸다. 이기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가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됐을 때는 더 이상 지금까지의 방식대로 살 수 없다. '해봤는데 하는 일마다 안 되고 세상은 안 바뀌고 다 실패하더라. 그래서 나를 바꿨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와 같은 사람들이다. 그는 정말 바꿀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 같다. 그런데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이 드니, 자신을 바꿔버린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입 다물고 지나가면 비겁해지는 것 같아서 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를 지키는데 비용이 많이 들었다. 감옥도 가고.
- 지금 말한 두 가지 이유만으로도 운동이 조직될 수 있나?
운동은 대개 이 두 가지 이유로 조직된다. 이것 말고, 사람들이 자기를 조직해서 투쟁에 나서는 동기가 없다. 딱 그 두 개다. 둘 중에서 어느 하나. 특히 세상은 바꾸지 못해도 자기 자신은 지킬 수 있기 때문에 운동이 조직되기도 한다.
- 1979년 10월 유신체제가 무너졌을 때 유신을 반대하던 운동세력으로, 어떤 마음이 들었나. 허무하지는 않았나?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좋은 일 중에는 자기가 목표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해서 성취한 일도 있고 행운으로 그냥 생기는 일도 있다. 물론 그 행운이 나에게 오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이 비용을 지불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꼭 자기가 노력한 것만 갖는 것은 아니다. 태어난 것 자체가 그렇다. 자기가 원해서 태어난 사람은 없다. 그냥 태어난 것이고 태어나 보니까 내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굉장한 행운이고 우연이다. 그 밖에도 우리가 살면서 스스로 목표를 세우지도 않고 노력하지도 않았는데 생기는 일이 참 많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 씨가 죽지 않았는가.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지만, 그 결과로 우리에게 독재청산이 행운처럼 다가왔다.
유신체제가 무너졌을 때 그냥 좋았다. 물론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우리의 힘으로 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어쨌든 무너져서 좋았다. 그날 아침에 너무 기분이 좋아서 시장에서 평소엔 못 먹던 비빔밥도 먹고 막걸리도 마셨다.(웃음)
- 1980년의 신군부의 계엄 해지와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에 참석했다가 '계엄령 포고 위반'으로 구속수감 됐다.
자기를 지키는 일과 비슷한 일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 같은 사람한테 무릎 꿇고 살면 비겁하게 느껴지고 부끄럽지 않은가. 저 인간이 나쁜 놈이란 것을 알고 있고 지금도 나쁜 짓을 계속하고 있는데, 나를 해코지 하지 않는다고 모른 척하면 불편해지는 마음 때문에 한 것이다.
- 신군부에 항거하다 결국 군에 끌려갔다. 청년 유시민은 자유가 억압된 공간이었던 군대에서 어땠나?
성실하게 생활했다. 그것도 일종의 자존심이었다. 데모하다가 온 놈이 군대생활을 남보다 못하면 (영화 대사로 하면) '쪽팔린다, 아이가!'였다. 구보도, 사격도, 행군도 무조건 열심히 했다. 그냥 열심히 하는 거다. '데모하다 온 놈이 행군도 못하고 구보도 못하느냐'라는 소리를 듣기 싫었다. 물론 데모를 했다고 모든 것을 잘해야 하는 이유도 없다.(웃음)
- 1985년 서울대 프락치 사건(서울대 학생들이 1984년 9월 가짜 대학생 4명을 프락치로 판단해 11일 동안 감금한 채 폭행한 사건)의 주모자로, '폭력 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을 살았다.
모두 지나간 일이다. 살면서 내가 잘못해 벌을 받기도 하고, 잘못한 것도 없는데 녹슨 못을 밟아 발이 띵띵 붓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런 사건 중 하나일 뿐이다. 자기가 한 일 때문에 징역을 살기도 하고,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도 살기도 한다. 그때가 그런 시대였으니까 말이다.
- 그때 쓴 '항소 이유서'가 두고두고 회자됐다. 당시 직접 항소 이유서를 작성한 이유가 있었나?
항소 이유서는 기본적으로 억울해서 쓰는 것이다. 누군가를 한 대도 때려보지 않고 특수 폭력 혐의로 징역을 살아야 한다는 판결에, 하도 어이가 없어서 항소하려 했다. 그때 나를 돕던 변호사들이 모두 무료로 변론해주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항소 이유서까지 쓰게 하는 것이 죄송해서 직접 썼다. 항소 이유서는 형식적으로 '불복하고 항소합니다'라고 간단하게 쓰면 됐다. 그런데 감옥에서 할 일도 없고 시간도 많아서 기왕 쓰는 김에 1심부터 지금까지 말도 안 된다고 느껴졌던 부분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마지막에 내가 왜 이렇게까지 됐는지에 대한 신세 한탄도 들어갔다.(웃음)
그때 정부와 매스컴에서 하도 학생들을 폭력 집단으로 이야기하니, '학생들이 무슨 폭력을 좋아하겠느냐', '원래 이 사건이 이렇게 해서 일어났는데 1심 판결이 너무했다', '유죄 선고를 해도 말이 되게 해야지 이건 말도 안 된다', '최소한 유죄 선고를 하면 범죄 구성 요건을 충족했어야 한다' 등의 내용을 썼다. 지금 와서 가끔 읽어보면 '내가 20대 때는 국가나 정부에 대한 생각이 지금보다 더 리버럴(liberal)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나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 같은 사람들이 펼쳤던 국가론과 거의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항소이유서' 전문 보기)
- 1987년 6월 거리에서 '남녀노소 각계각층이 한 덩어리가 되어 외치는 독재타도의 구호를 들으며, 최루탄과 방망이로 무장한 전경의 벽을 육탄으로 부수고 그 독재의 흉기를 불사르는 매캐한 연기를 맡으면서, 나는 인간이 사회를 변혁한다는 진리를 확인했다'(유시민 블로그 '인간과 역사에 대한 희망을 갖기까지' 중)고 했다.
'아! 이럴 때도 있구나'라고 느끼던 날이었다. 6월 10일, 그날 우리는 거리로 나갈 때만 해도 시위를 하다 보면 또 경찰에게 밀려서 도망쳐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인물을 준비하고 조 편성을 해서 나갈 때 '6시에 시청 앞, 7시에 북아현동 어디, 8시 어디' 등 집결지 세 군데를 정해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거리로 나가니, 계획이 아무 소용이 없더라. 거리에는 온통 사람들로 가득했다. 우리가 경찰에 쫓겨서 도망가는 게 아니라, 되레 경찰을 붙잡으러 다니는 상황이었다. 황당하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했다. 일반 사람들은 준비가 다 되어 있는데, 우리는 시민들이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니까 '이번에는 뭐가 될 것 같은데?' 하는 느낌이 처음 들었다. 택시와 버스가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렸고 교회에서는 종을 쳤다. 사람들이 차도로 밀려 나와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 곳곳에서 경찰 진압병력이 소대별로 고립돼 시민들에게 장비와 옷을 뺏겼다. 사람들이 경찰을 분수대에 집어넣기까지 했다. 시민들의 운동을 역사책에서만 봤는데,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확인하다니…. 참 신기한 일이었다.
- 6월의 항쟁은 그해 치러질 13대 대통령 선거에 대한 기대가 있어 더욱 희망적이었을 것 같다.
그런데 국민은 그해 대선에서 노태우 씨를 뽑았다. 민주화 운동에 찬물을 확 끼얹는 일이었다. 어떻게 쟁취한 직선제인데…. 직선제를 통해 합법적으로 권력을 갖다 바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 6월 거리에 나간 이들도, 노태우 전 대통령을 뽑는 사람들도 시민들이었다. 모순적이지 않나.
인간이 원래 그런 것인가 보다. 그때는 납득이 안 돼서, 참 분하고 억울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사람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합리적인 생명체가 아니다. 그 후로도 비슷한 사건을 여러 번 경험했다. 그래서 나는 '대중은 어리석지도 현명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사람들이 왜 저런 어리석은 짓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도 분통이 터지지 않는다. '그랬나 보다. 다음에는 잘하겠지' 하고 이해한다.
- 1991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후, 유학길에 올랐다. 독일로 가게 된 계기와 목적은 무엇이었나.
1980년대까지는 아무나 여권을 가질 수 없었다. 특히 병역미필 남자들은 국비유학생이나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외국으로 나갈 수 없었다. 우리는 지금껏 다른 나라의 역사를 순전히 책으로만 공부했지, 한 번도 밖에 나가보지 못했다. 87년 민주화가 되고 나서야, 해외여행이 자유화되면서 세계 이곳저곳을 다닐 수 있게 됐다. 북쪽은 철조망으로, 나머지 삼면은 바다로 막힌 이 좁디좁은 섬나라가 너무 답답했다. 여기에서 30년을 살았는데, 다른 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알아본 결과, 돈을 내지 않아도 공부시켜주는 곳이 독일이라고 해서 독일로 떠났다.
함께 운동했던 사람들이 정치 영역으로 많이 진입했던 때였다. 몇몇은 내게 아직 우리나라에 고칠 것도 많고 할 수 있는 일이 많은데, 왜 나가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이대로 계속 살면 억울하지 않나. 지금까지 길바닥에서 돌 던지고 유인물 만드는 데에 인생을 쓴 것도 억울한데 계속 이렇게 살라고? 우리 많이 했다. 세상을 바꾸겠다며 10년을 바쳤으면 됐지, 계속해야 하나? 우리도 우리 인생이 있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그러면 더는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 독일 유학 생활은 어땠는가.
한국에서 순 엉터리로 학점을 얻어 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에 경제학과를 나왔지만 경제학 원론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래서 독일에 있는 동안 열심히 공부했다. 당시 아이도 한 명 있었기 때문에 아내와 함께 열심히 살 수밖에 없었다. <한겨레> 통신원을 하면서 약간의 돈을 벌고, 출국하기 전에 썼던 <거꾸로 읽는 세계사>(푸른나무 펴냄) 인세도 조금씩 들어와서 독일에서 5년 동안 생활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국과 거리 두기는 잘 되지 않았다. 독일에 있으면서 한국 정치에 대해 괜히 쓸데없는 책을 쓰기도 했다.
1998년 외환위기로 한국에 돌아와야 했지만, 아내는 2년간 박사과정을 마치고 들어왔다. 아내가 독일에서 공부하는 동안 나는 한국에서 돈을 벌었다. 잡지·주간지·월간지·일간지·기업 사보 등 들어오는 원고 청탁을 마다치 않고 다 썼다. 원고지 1매에 1만 원짜리 원고였다. 칼럼 하나에 5만 원, 많이 쓰면 10만 원. 닥치는 대로 글을 쓰며 살다가 MBC 라디오 대담 프로를 진행했고, 이어 <100분토론>을 맡으면서는 벌이가 꽤 괜찮아졌다.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돌베개 펴냄)라는 책도 꽤 성공해서 건실하게 돈을 벌었다. 적어도 2002년 전까지는 말이다.
- 2002년 16대 대통령 선거 전 절필 선언을 하고, 그해 10월 개혁국민정당(개혁당) 창당을 주도했다. 제3의, 새로운 정당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또 어떻게 만들 수 있었나?
정당을 만드는 게 사실 별거 아니다. 그냥 만들면 된다. 2002년 무렵 갈수록 이상해지는 민주당을 보고, '이제 저 당은 안 되겠다' 싶었다. 특히 6월 항쟁 때 함께 운동했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새 정당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요즘은 인터넷으로 당을 만들면 된다고 했다. 옛날엔 활동가가 유인물을 들고 지방을 돌며 세를 만들어야 했지만, 웹하드라는 것이 있어서 유인물이든 문서든 거기에 올리면 각 지역에서 내려받아 배포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중앙에서 완성한 창당 제안문과 홍보 자료를 웹하드에 올렸더니, 지역에서 다운받아 사용했다. 또 계좌를 하나 개설해 창당 기금을 모았더니, 몇만 명이 모였다. 많은 것이 금방 진행됐다. '정당을 만드는 것, 진짜 쉽네!'. 그렇게 만든 거다.(웃음)
하지만, 유권자가 이런 형태의 정당을 받아들일 준비가 아직 안 됐다고 느꼈다. 사람들은 '9시 뉴스'에 나와야 정당으로 인정한다. 언론에서는 우리의 시도를 장난으로 취급했다. 정당과 관련한 10여 년의 활동 기간 동안 열린우리당처럼 큰 당에서도 활동해봤고, 그 당이 허망하게 없어져 제3 정당 창당 실험도 해봤다. 그런데 대중은 새로운 정당을 만드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결론을 얻었다.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는 신임을 주지 않는구나. 그러면 그만 해야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 정당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키고자 하는 가치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혹은 그 가치에 동의하거나 대변하는 지지 세력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일반 국민에게는 '인물'이 있어야 한다. 강령 같은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2002년 개혁국민정당을 만들 때 개혁과 진보 노선을 가진 진보정당이 아니라, 각계각층을 망라하는 지지 기반을 획득하고 당원을 확보할 수 있는 대중정당 모델을 구상해 강령 초안을 만들었다. 강령 초안을 개혁당 인터넷 사이트에 올리고, 전국에 있는 당원에게 의견을 받았다. 온갖 제안 중 반영할 것은 다 반영해서 강령을 완성했다. 이때 토대가 된 문서가 바로 독일 사민당 강령이었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강령을 우리 실정에 맞게 쓴 것이었는데, 내가 생각해도 멋진 강령을 만들었다.(웃음) 개혁국민정당 강령에 '사회민주주의'라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가족·성평등·준법·국방·통일정책·노동 분야의 사민주주의 사상을 내포했다. 그런데 이것으로는 여러 사람을 설득할 수 없었다. 아무도 안 읽더라.
그래서 인물을 규합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이름 있는 국회의원들이 우리 당으로 공천을 받아 선거에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민주당 공천을 받길 원했다. 그 사이에 개혁국민정당은 민주당과 단일화 게임에서 이겼고, 본선에서 '1번'당에게 지는 경험도 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내린 결론은 '우리 힘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진보 리버럴'만으로는 독자 정당을 만들 수 있는 역량이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러던 중 '노동자·농민과 같은 대중단체를 끼고 있는 민주노동당과 힘을 합치면, 제3 정당으로 원내에 진입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민주노동당과 연계했다. '누구는 광주, 누구는 부산에 가더라도 대전까지는 같이 갈 수 있는 것 아닌가. 최종 행선지가 어딘지는 묻지 말고 일단 서울에서 대전까지는 같이 가보자'해서 모인 것이 통합진보당이었다. 그렇게 대전까지 함께 가자고 약속하고 출발했다. 그런데 그 약속이 깨졌다. 처음부터 대전에 갈 생각이 없었던 사람들이 동승한 것이다. 그래서 기수한테 '북북서로 돌려라. 남으로 돌려라' 하다가 폭력이 난무하게 됐다. 지난 일을 얘기하니, 참 웃기다. 정치를 이렇게 웃기게 얘기 하니, 또 웃기다.(웃음) 사람 사는 일이 특별한 게 아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다 거기서 거기다.
- '대중이 원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마음이 힘들었을 것 같다.
힘들기는 하지만, 인생이 그런 거다. 내가 어디 있는지 계속 점검해 봐야 한다. 우리가 물방울이라면, 절벽 위에서 아래로 세게 떨어지면 그 낙차를 가지고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한 번 떨어지고 나면, 살살 흘러간다. 누군가 이런 국면에 도달했다면, 이제는 더 이상 동력을 발생할 수 있을 만큼의 에너지를 못 만든다. 이런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정치하는 사람이나 정당은 선거를 몇 번 해보면 대중이 자기를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 알 수 있다. 원치 않는다면, 물러서는 것이 맞다.
- 새 정당을 창당할 때마다 견제와 위협, 원망도 있었을 것 같다.
당연하다. 정당을 만든다는 것은 기존 정당에 도전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1번'당에서도 때리려 하고 '2번'당에서도 때리려 했다. '1번'당은 내가 비판을 하니까 그런 것이고, '2번'당은 자기들하고 같이 안 하니까. 특히 '3번'당이 커지면, '2번'당이 곤란해지지 않겠는가. 그러니 '3번'이 크지 못하도록, '2번'은 '3번'을 밟아 죽인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당과 두 번째로 큰 당이 밟는데, 버틸 정당이 있겠는가. 진짜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라면 모르겠다. 내 역량은 제3 정당을 성장시킬 리더는 아니었던 것 같다. 설혹 대중들이 제3 정당을 원한다고 하더라도, 나 스스로 '너는 아닌 것 같은데?'라고 말한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 정치를 하는 동안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다. 정치의 관습을 깨는 파격적인 행동 말이다.
우리 정치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너무 끈적끈적하다. 나는 이게 너무 싫다. 왜 이렇게 질척거리나. 그대와 나는 운명이 맺어준 어쩌고저쩌고…. 어떤 남녀가 눈이 맞으면 연애하고 사귀어보다가 평생 살아도 괜찮겠다 싶으면 결혼하는 것이다. 살아보다가 판단을 잘못한 것 같으면 이혼할 수도 있다. 이런 게 인생 아닌가. 그런데 특히 정치에 대해서는 끈적끈적한 낡은 관념이 너무 많이 붙어 있다. 이들의 관습대로 보면, 내가 정치를 했던 방식은 안 맞는다. 좋게 보면 쿨(cool)하고 합리적이지만, 나쁘게 보면 싸가지 없고 무책임한 것이다. (대중이 생각하기에) '저 뽑아주세요. 싫으면 말고요'라고 얘기하는 정치인과 '저 뽑아주세요'라는 말 다음에 추상적이고 운명론적인 수식어를 붙이는 정치인은 큰 차이가 난다.
나는 기본적으로 '끈적끈적한 정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 태도가 현대적이고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 결과 선거에서 몇 번 떨어졌고, '그럼 난 아닌가 보다'라고 받아들였다. 내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될 것도 아닌데, 될 때까지 계속 물고 늘어지는 것은 좋은 행동이 아니라고 본다. 이런 것은 끈적거리고 봉건적인 것이다. 더 나가면 불합리한 것이다. 나는 이런 점이 공동체와 정치를 해치고, 사람들을 해치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 끈적끈적한 정치의 대표가 박지원·김무성 의원과 같은 사람들이다. 다 끈적끈적하다. 자신이 실제로 원하는 것은 '이것'이면서 말은 '저것이라고 다르게 한다. 어떤 원칙도 안 보인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늘, 권력에 대한 집착인 것 같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은 그런 것이 정치고, 그것을 하는 사람이 정치인이라고 생각한다.
- '끈적끈적한 정치'를 하는 정치인들이 다 바뀐다고 해서 정치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나.
'물갈이'는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이 해왔다. 그렇지만 바닥이 여전하니, 누가 들어오던 다 똑같아진다. 더디기는 해도 변화는 조금씩 있다. 이런 정치 풍토를 바꾸기 위해서는 정당이 혁신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참 어렵다. 나는 정당을 바꾸고 싶어서 정치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기존 정당을 바꾸는 것에 실패했고,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서 현실에 안착시키는 것도 실패했다. 민주주의는 몇 번 해서 안 되면 그만 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실패했던 시도가 옳다면, 다른 사람이 조금 더 나은 방법으로 다시 시도해야 한다. 사실 이게 리버럴 또는 리버럴리스트가 정치를 대하는 태도다. 누군가는 이렇게 이야기하면 진지하지 않다고 하겠지만, 나는 정말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끈적이는 관계가 아니었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인간적인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었다. 내가 이 양반을 도와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당시 민주당 사람들이 '노무현'이 가진 훌륭한 점을 인정하지 않고 멸시한다는 느낌을 받아서였다. 당원은 아니었지만, 밖에서 보기에 노무현은 능력도 있고 머리도 좋고 야망도 있고 사회에 기여도 많이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학벌과 지연을 운운하며, 진보 운동권조차 그를 대접해주지 않는 것에 공분을 느꼈다. 내가 딴 사람 밑에는 안 가도 노무현 밑에는 간다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니 끈적이는 관계가 성립될 이유가 없다. 나는 실제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오랜 참모들이 모이는 '측근 모임'에 간 적이 한 번도 없다. 일없으면 연락하지 않고, 필요하면 연락하는 관계다. 노 전 대통령이나 나나 이런 관계에 적응이 됐고, 전혀 불만이 없었다. 나는 정치 지도자와 그를 돕는 사람과의 관계가 이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대가 나를 필요로 할 때 연락 주세요. 그러면 내가 만사 제치고 가서 도울게요. 연락이 없을 때는 내가 필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을게요.' 정치 지도자 또한 '저 사람은 내가 필요할 때만 연락해도 돼. 평소에 내가 전화해서 관리하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지도자와 참모·자원봉사자들과의 관계다. 이래야 이권이 개입하지 않는다.
- 그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유시민'을 복지부 장관으로 지명한 것은 정치권을 흔드는 일 중 하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나 사이에서 대통령이 나를 필요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딱 한 번 내가 먼저 대통령께 복지부 장관을 시켜달라고 한 적이 있다. 그동안 수도 없이 대통령을 위해서 싸웠지만, 대통령은 나를 위해 딱 한 번 싸워줬다. 온 사방이 반대하는데, 나를 지명했다. 복지부 장관이 돼서 진짜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 복지부 장관으로, 정말 하고자 했던 일 또는 만들고 싶었던 복지정책은 무엇이었나.
'기초노령연금'은 처음부터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국회의원 시절부터 '효도연금법'이라는 이름으로 제정 법안을 내며 관심을 가졌다. 노 전 대통령에게 복지부로 보내달라고 요청할 때 '이 정권이 끝날 때 보건복지 분야에서 '뭐 하나는 확실하게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겠다. '장기요양보험'과 '효도연금', 이 두 가지는 반드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제일 첨예하게 대두될 문제가 '노인 빈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도 공직자로서도 그 일을 하고 싶었다. 보건복지부에 있으면서 공부도 하고 보건행정·복지행정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다. 독일에서 경제학 석사과정을 공부할 때 선택 과목으로 노동시장정책·보건경제학·연금에 관한 수업을 들었다. 그때부터 관심이 많이 생겼다. 그 외에 국민건강보험을 중증만성질환자 중심으로 개편하고 싶었다. 의원 때부터 내가 직접 장관들에게 해달라고 요구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자꾸 예산이 없다는 이야기만 하니까 장관이 돼서 (주도적으로 일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5년 공직 중 1년 반 동안 장관직에 있으면서 그래도 밥값은 했다고 생각한다. 정치적으로 욕도 많이 먹었지만, 그래도 일은 많이 했다.(웃음)
- 본인 스스로를 '리버럴리스트(자유주의자)'라고 이야기한다. 정치를 하면서도 '자유롭다'고 느끼거나 행동할 수 있었나?
한국이 독일식 비례대표제 선거제도를 가지고 있다면, 나는 자유롭게 내 색깔을 선명하게 냈을 것이다. 정당 득표율대로 의석을 갖는 제도 하에서 나는 5% 이상의 지지율은 항상 끌어모을 수 있다. 지금이라도 말이다.(웃음) 사실 독일 녹색당의 요슈카 피셔(Joschka Fischer, 1948~)가 정치적으로 보면,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과거 독일 녹색당의 지지율은 몇십 년 동안 평균 7% 수준이었다. 그리고 전체 의석 중 7%에 해당하는 45석 정도의 의석을 항상 차지한다. 녹색당은 30년이 넘게 지역구에서 한 석도 얻지 못했지만, 비례의석으로 국회에 진출해 장관을 배출하고 연정에도 참여했다. 자유당도 정당 지지율이 5%와 8% 사이다. 디트리트 겐셔(Hans-Dietrich Genscher, 1927~)가 외교부 장관만 20년을 해서 대단한 것 같지만, 그가 속한 자유당의 지지율은 평균 7%다.
나 같은 리버럴들은 새정치민주연합에 있으면 불편하다. 자유주의지만, 보수적인 것에 동의할 수 없다. 과거 민주노동당과 달리, 노동자 편도 농민 편도 아닌 누구의 편도 아니다. '우리는 누구를 위한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정의와 같은 가치를 숭상하는 정당이다'라며 우리의 색을 분명하게 낸다면, 나는 대중들에게 항상 10% 정도의 지지율은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선거제도 하에서는 10%의 지지율로 비례대표 몇 석밖에 못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1번'과 '2번'정당이 아니면, 우리 정치체제에는 존재할 수 없다. 존재한다고 해도, 큰 정당 속에서 자기 색을 못 낸다.
나는 우리 정치를 '분재(盆栽)의 정치'라고 말한다. 소나무를 철사로 얽어매서 가지가 그 철사대로 뻗어 나가게 하는 것처럼 '1번'당에 간 사람은 '1번' 모양으로 분재를 하고, '2번'당에 간 사람은 '2번' 모양으로 분재를 한다. 거기에서 삐져나오면 다 잘라낸다. 잘라내는 이유는 그때마다 다르다. 내가 정치인으로 정치권에 속해 있을 때 분재가 된 소나무의 아픔과 슬픔을 느꼈다. 직접적으로 말을 못하게 하지는 않았지만, 내 색깔을 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내가 느낀 자유의 제약이었다.
정당과 선거제도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정치가 30년 넘게 사람을 바꿔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이것을 바꾸려고 하는데 잘 안 된다. '정당을 혁신하자. 선거제도를 개혁하자'고 호소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심이 없더라.
- 뉴질랜드를 비롯해 선거제도를 개혁한 국가들도 있지 않나.
영국도 부결되긴 했지만, 2010년에 선거제도 개혁을 위해 국민투표를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때도 독일식 비례대표제로 선거제도를 개혁하자고 건의하며 국민투표를 시도했다. 그런데 헌법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반대가 심했다. 이를 조건으로, 대연정을 제안했다가 오히려 더 큰 비난을 들었다. 일종의 '경로 의존성'이다. 백지 위에 설계를 하면 독일식 비례대표제를 들어올 수 있지만, 의석의 90% 이상을 이미 점유하고 있는 두 개의 당이 현행 선거제도에 완벽하게 적응했기 때문에 절대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당시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도 독일식 비례대표제를 제안했지만, 역시 잘 안 됐다. 그렇다면, 제3 정당을 강하게 규합해 선거에서 한바탕 붙어야 한다. 진입 장벽을 넘어 정치권 안으로 들어가 '캐스팅 보트(casting vote)'를 쥐고 흔들어야 한다.
- 우리 정치에 김대중·노무현과 같은 사람이 또 나올 수 있을까?
그런 일은 안 생길 것 같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말 특별한 사람이었다. 일제 말기에 이미 청년기에 들어선 세대 중 그런 인물 됨됨이와 그런 사상, 그런 삶의 방식, 그런 정도의 역량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정말 이례적이다. 김 전 대통령은 자기 세대에서 굉장히 돌출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동세대 보다는 젊은 세대들이 그를 좋아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동세대가 아닌 다음 세대들이 좋아했던 지도자였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한국이 망조가 든 이유는 동세대가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국가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퇴행이 일어난다. 나라가 잘되려면, 다음 세대가 좋아하는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더이상 '김대중'이나 '노무현' 같은 사람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예외적인 인물이 대통령이 된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호하사' 된 것 같다.(웃음) 보통 사람들은 '김대중·노무현 두 번의 대통령 선거가 정상적인 것'이고, 지금이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이 어렵고 힘든 것이다. (지식인들을 비롯해)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의 정치에 대해 혹은 정치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김대중 혹은 노무현은 이렇게 했는데, 당신은 왜 그렇게 안하느냐?'고 따진다. 하지만 이는 불가능한 비교 대상을 설정해놓고 자해하는 것과 같다. 김대중의 정신·리더십과 노무현의 매력·승부기질·캐릭터를 현실 정치의 리더들을 망가뜨리는데 쓰고 있다. 우리가 그런 지식인들에게 '너는 왜 함석헌 선생같이 글을 쓰지 못하는가. 왜 문익환 목사처럼 행동하지 못하는가. 왜 장준하처럼 포효하지 못하는가'라고 하면 기분이 좋을까? 기독교인들에게 '왜 예수님처럼 못하느냐'고 따지면, 누가 견딜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이런 식의 프레임(frame, 고정된 생각)으로는 제대로 된 리더십이 나올 수 없다.
나는 김대중·노무현 캐릭터의 초식(招式)을 잊어버려야 한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그런 특별하고 이례적인 인물들을 흉내 내지 말고 자기 스타일대로 가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현실 정치인들을 김대중·노무현과 비교해서 비판하고 비난하는 걸 그만해야 한다. 지금 정치하는 사람들의 장단점을 봐주면 된다. 나는 정치하던 시절에 우리 지식인 사회가 좀 무섭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은 정치를 그만뒀기 때문에 무섭지 않지만….(웃음)
-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위로하는 사람들에게 현혹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청년들은 위로를 안 받아도 된다. 젊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이고 행운이고 강력한 무기인가. 오히려 내가 그들에게 위로를 받아야 한다. 나는 이제 나이를 먹어서 인생의 끝이 보인다.
청년 때는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게 중요하다. 인생은 짧고 덧없다. '나의 하루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내게 어떤 의미인가.' 이것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 있는 하루하루가 쌓여 인생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지금 보내고 있는 하루가 내게 의미 있는가?'를 항상 물어야 한다. 부정적인 답이 나오면, 뭐가 문제인지 찾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젊을 때는 외부 평가에 민감하다. 내 나이가 되면 덜 민감해진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외부의 평가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 부여하는 의미다. 청년 때 그것을 잘 찾아내야 나중에 후회가 적을 것이다.
- 유시민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란 내가 원하는 삶을 내가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그게 없으면 삶의 의미가 없다. 내가 원하지 않는 삶을 살거나, 원하는 삶을 살기는 하는데 내가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 방식으로 산다면, 인생이 비천해지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 어떻게 살든 삶은 내가 원하는 범위 안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이 삶을 영위하는 방식이 옳지 않다고 생각되면, 뭔가 께름칙한 느낌이 든다. 그러면 자유가 없다. 진짜 자유는 모든 것을 자기 의사에 따라 형성하고 변화시키는 권능(權能)을 가리킨다. 자유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제일 중요한 게 바로 자유다. 자유가 모든 것을 해결하진 않지만, 자유가 없다면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다분히 저 잘난 맛에 사는 '리버럴'의 생각이다.(웃음)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인터뷰는 정치경영 석사인 손어진 씨(녹색당 당원)가 정리는 손어진 씨와 오진주 정치경영연구소 연구원이 담당했습니다.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