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대체 북한은 왜 지금 이 시점에 이같은 군사적 도발을 감행했을까? 이에 대해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북한이 박근혜 정부의 대북 정책을 전환시키려는 목적이 있다고 분석했다. 정 전 장관은 "북한은 박근혜 정부에게 DMZ세계생태평화공원은 꿈도 꾸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이는 무조건적인 긴장 고조를 노린 것은 아니고, 박근혜 정부에게 임기 후반부에도 계속 이런 상태로 남북관계를 끌고 가고 싶지 않다면 대북 정책을 바꾸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북한의 이번 도발로 안 그래도 냉각기를 겪고 있는 남북관계가 수렁에 빠진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남북관계 개선의 계기가 될 수 있을지 관심을 모았던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인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의 방북마저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정부가 이 이사장의 방북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던 인사들이 방북하지 못한 것도 문제였지만, 현 정부의 통일준비위원회에서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성재 전 문화부 장관이 동행했음에도 아무런 유의미한 메시지가 없다는 것은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정부의 안일한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그런데 정부는 이 이사장이 평양으로 출발하던 지난 5일 통일부 장관 명의의 서한을 북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앞으로 보냈다. 남북 고위급 대화를 열자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정 전 장관은 "굉장히 미숙한 일 처리"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 이사장 편에 보낼 메시지는 없다고 해놓고 따로 서한을 보내면, 북한 입장에서는 자신들과 함께 자신들이 초대한 이 이사장을 통째로 바보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 북한은 해당 서한 접수를 거부했다.
정 전 장관은 "회담을 제의하려면 북한의 상황도 고려하고 그쪽 요구도 들어주면서 우리 요구도 관철시켜야 한다. 우리가 필요한 것만,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자고 하면 대화가 되겠나?"라고 반문했다.
인터뷰는 지난 11일 언론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프레시안 : 지난 4일 비무장지대(DMZ)에서 북한군의 목함 지뢰가 폭발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 군 2명이 부상을 입었는데요. 현재로써는 북한군이 일부러 매설한 것이 유력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북한은 지금 이 시점에 대체 왜 이런 일을 벌인 걸까요?
정세현 : 참으로 걱정스러운 사태입니다. 하지만 북한 입장에서는 더 이상 박근혜 정부와의 대화 재개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대북 정책에 대한 거부감이 이런 식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번에 이희호 여사와 함께 북한을 방문했던 사람들을 만나 현지 사정을 좀 들어보니, 북한 내에서는 박근혜 정부에 대한 기대를 접으려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번 방북단에서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을 비롯해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인사들이 빠져 있는데, 북한은 박근혜 정부가 고의적으로 이 인사들을 제외시켰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북한은 남쪽 정부가 의도적으로 6.15 남북공동선언의 의미를 퇴색시키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근혜 정부가 말로는 6.15를 존중한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남한 정부랑 더 이상 얘기할 것이 없는 것 아니냐는 정서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북한은 DMZ에 지뢰를 매설했습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박근혜 정부에 DMZ세계생태평화공원은 꿈도 꾸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지뢰 밭에 평화 공원 만들겠다? 웃기는 소리하지 말라는 겁니다.
원래 DMZ 안에는 남북이 각자 자신의 지역에 지뢰를 깔아놓습니다. 자기들이 매설한 지역을 알기 때문에 피해 다니는 것이죠. 그런데 이번처럼 전혀 상상도 하기 힘든 지역에 지뢰를 매설하는 일이 또 발생한다면 DMZ는 정말 위험한 지역이 됩니다. 북한이 노린 건 바로 이겁니다. 이렇게 위험한 지역에 무슨 공원을 만드느냐는 것이죠.
그런가 하면 지뢰가 폭발한 다음 날 철원의 백마고지역에서는 경원선을 복원하는 기공식이 열렸습니다. 북한과 협의가 되지 않아 일단은 남쪽 선로만 복원하게 돼있는데, 이러한 일방적인 철로 복원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메시지도 있습니다. 철로 복원은 곧 박근혜 정부가 구상하고 있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이루기 위한 중요한 작업인데, 이러한 부분에서도 제동을 걸겠다는 겁니다.
북한이 박근혜 정부의 DMZ 세계생태평화공원, 경원선 복원 등등을 막고 싶다면 DMZ 내에서 긴장을 고조시켜야 합니다. 그러려면 남한에서 대응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 터져야 합니다. 실제 정부는 지뢰 폭발이 있고 나서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에 북한은 조준사격을 하겠다고 위협해올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게 되면 박근혜 정부가 구상했던 정책들은 다 날아가는 겁니다.
프레시안 : 그렇다면 북한은 남한과 대화를 포기하고 긴장을 높이는 방향으로만 움직일까요?
정세현 : 무조건적인 긴장 고조는 아닐 겁니다. 곧 있으면 박근혜 정부 임기가 절반을 지납니다. 정권 내에서는 '정권의 유산' 차원에서 임기 후반부까지 북한과 아무것도 못 하고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 것이고, 남한 내부 여론도 북한과 아무런 관계 개선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이 나올 겁니다.
북한은 이 부분을 노린 것입니다. 박근혜 정부에게 임기 후반부에도 계속 이런 상태로 남북관계를 끌고 가고 싶지 않다면 대북 정책을 바꾸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겁니다. 북한이 세게 압박하면 반북 정서가 높아지는 측면도 있지만, 이렇게 하면 남북관계가 불안해서 살겠느냐는 여론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여론을 일으켜 그동안 박근혜 정부가 펼쳤던 대북정책을 전환시키려는 일종의 '역발상 전략'이라고 봅니다.
이희호 방북, 6.15 의미 퇴색시켰다
프레시안 : 가뜩이나 꽉 막혀있는 남북관계에서 지뢰까지 터졌으니 앞으로 관계 개선은 어려워 보입니다. 그나마 개선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던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의 방북 마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채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정세현 : 6.15 남북공동선언을 만들었던 인사들이 북한에 오질 않으니, 북한에서도 이희호 여사 방북단에 딱히 전달할 메시지가 없었을 겁니다. 실제 북한은 지난해 12월 김양건 대남담당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이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할 때도 6.15 주요 인사들이 함께 방문할 것을 이야기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이러한 의사를 비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방북을 주최하는 측과 정부, 그리고 북한 간 방북 명단을 확정하는데 상당한 시간을 잡아먹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정부에서 6.15 관련 인사들의 방북을 제한한 모양새가 됐습니다.
프레시안 : 일부에서는 6.15 관련 인사들이 방북하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오면 북한이 이 이사장의 방북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있었습니다.
정세현 : 지난해 12월 김정은 제1위원장 명의로 친서를 보냈고, 여기에 화답해서 이희호 여사가 온다고 하는데 이걸 막을 수는 없지요. 다만 북에서 이희호 여사를 초청한 것은 6.15의 상징성이 있기 때문인데 난데없이 털모자를 들고 온다고 하니, 이 부분을 가지고 방북을 준비하는 사람들과 북한 간에 옥신각신하는 줄다리기는 있었을 겁니다.
북한은 6.15의 두 주인공인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없는 상황에서 상징성이 가장 높은 이희호 여사를 초청했습니다. 이는 남한 정부가 6.15 공동선언을 존중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일종의 장외 압박 전술입니다. 이희호 여사를 초청해서 6.15 공동선언 이행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쪽에서 이희호 여사 방북을 기획한 것은 사랑의 친구들 회장인 김성재 전 문화부 장관이었습니다. 물론 북한은 사랑의 친구들 중심으로 인도적인 지원물품 준비하는 것은 별로 달갑지 않다면서, 오려면 6.15 관련 인사들 같이 오라는 메시지를 여러 번 보냈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친구들 입장에서는 이게 달갑지 않았을 겁니다. 이희호 여사가 북한을 방문하는 계기도 사랑의 친구들의 인도적 지원 사업이 구실이 됐고, 박근혜 대통령에게 정치적인 방북 승인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자기들 때문이었는데 6.15 관련 인사들이 가면 좋은 일 해서 남 주는 격이 되지 않습니까?
방북 날짜가 지난 7월 6일에 결정됐는데 출발 이틀 전까지도 방북 명단을 밝히지 못한 것은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의 모자를 쓰고 있는 북측과 김대중평화센터 사이에 방북단 구성 문제를 가지고 밀고 당기느라 시간이 많이 흐른 거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가 결국 최종 승인권자이긴 하지만, 정부는 마지막에 판정만 하면 되는 거지 미리 조율할 필요는 없습니다. 정부가 나중에 무슨 책임을 지려고 그런데까지 깊숙이 개입했겠습니까?
프레시안 : 그런데 사실상 6.15를 만들었던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의 경우에는 방북 명단에 들어있었는데 정부가 허가하지 않았습니다.
정세현 : 그렇습니다. 그 부분은 정부의 논리가 궁색한 측면이 있습니다. 임동원 전 장관이 정치인이라는 논리입니다. 관료 출신의 전직 장관이 졸지에 정치인이 됐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김성재 전 장관은 어떻게 북한에 갑니까? 김 전 장관도 장관 지냈는데 어떤 장관은 정치인이고 어떤 장관은 정치인이 아닙니까? 기준이 다르게 적용된 겁니다.
프레시안 : 정부가 이런 기준을 들이대는 것을 보면, 6.15와 관련한 주역들이 북한에 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정세현 : 결과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방북을 기획했던 사람들의 의중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봅니다. 이희호 여사의 뜻이라는 명분으로 6.15 관련 인사들이 꼭 같이 가야겠다고 하면 다녀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희호 여사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북한 사정을 잘 아는 분들과 가고 싶다,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을 때 바로 현장에서 상의할 분들과 같이 가게 해달라"라고 했으면 정부가 승인을 거부했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정부도 방문 승인을 무리 없이 낼 수 있었을 겁니다. 꼭 6.15의 주역이 아닌, 이희호 여사가 방북 기간 동행하면서 상의할 수 있는 자문위원 자격으로 같이 간 것이라고 설명하면 됩니다.
이번에 방북을 기획했던 측에서 준비가 미숙했고, 결국 6.15의 주역들이 함께하지 못하면서 별다른 방북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김대중평화센터의 간판이나 다름 없는 6.15의 의미는 자연스럽게 상당히 퇴색됐습니다. 통일 문제에 오랜 경험을 가지고 있던 전직 장관들도 이런 평가를 하고 있다면 분명 방북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프레시안 : 그런데 정부 역시 이희호 이사장의 방북에 대해 너무 안일하게 대처한 것 같습니다. 미국 같은 경우는 정치적으로 중량감이 있는 인사가 북한을 방문할 때 정부에서 브리핑도 하고 나름의 메시지도 전달하면서 이를 외교의 한 방법으로 활용하는데, 우리는 정부가 나서서 이희호 이사장에게 전달한 메시지가 없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이희호 이사장이 북한으로 출발한 당일 당국 차원에서 북한과 대화를 하자는 공식적인 서한을 보냈습니다. 정부의 행보에도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요?
정세현 : 굉장히 미숙한 일 처리입니다. 정부가 별도로 남북 간 고위급 회담을 하자는 서신을 준비했더라도, 이 이사장에게 메시지를 들려 보냈는지 아닌지 NCND(Neither Confirm Nor Deny, 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로 나갔어야 합니다. 그렇게 일단 이 이사장을 출발시키고 북한에 서신을 보냈다면 그나마 나았을 겁니다.
그런데 이 이사장 편에 보낼 메시지는 없다고 해놓고 정부는 출발하는 그날 따로 서한을 보낸 겁니다. 이건 북한이 이희호 이사장 불러놨는데 뒤통수에 대고 당국 간 회담 하자고 한 겁니다. 북측은 남한 당국이 자신들과 이 이사장을 완전 바보로 만들려고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프레시안 : 정부가 6.15의 주요 인사를 대북 통로로 쓰지 않겠다, 남북관계에서 자신들이 주도권을 잡아 나가겠다, 이런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요?
정세현 :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귀띔하는 '다리' 역할 조차도 시키지 않겠다는 건 너무 옹졸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번 방북단에는 통일준비위원회 소속 위원도 있지 않습니까? 박근혜 정부가 통준위 소속 위원에게 뭔가 귀띔을 해주거나 이번 8.15 상황에 대해 접점을 찾아보는 제안을 한다든가 하는 방식으로 얼마든지 방북단에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6.15 핑계를 댈 것이 아니라 의지나 전략이 없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북한은 6.15를 상징하는 사람들이 왔으면 더 좋았겠지만, 오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남한 정부에서 방북단에 인편으로라도 메시지를 줬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통준위 위원이 수행 단장이었으면 틀림없이 메시지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평양에 비행기가 도착하기도 전에 따로 메시지가 오니 '대체 이게 뭐하자는 건가'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정부가 너무 일방적인 메시지를 보냈기 때문에 북한이 서한을 수신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희호 여사 방북 이전에 대북 전단을 살포하는 일이 있었는데, 여기에 대해 정부가 기존 입장을 고수하면서 회담을 하자고 하니, 북한으로서는 이 회담을 받아봐야 별다른 성과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받고 나서 거절하느니, 받기 전부터 접수를 거절하자는 겁니다.
정부가 2년 전에 그렇게 강조했던 회담 대표의 '격'(格) 문제를 보더라도 이번 서한을 북한이 받기 힘들었을 겁니다. 통일부 장관 명의로 북한 통일전선부장에 보냈다는데, 2013년 6월 격 문제 때문에 장관급 회담이 무산되기도 했습니다. 북한은 통일전선부장을 통일부 장관의 상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남북회담에서 통전부장이 전면에 나선 적이 없습니다. 방송국 PD가 방송 화면에 나옵니까? 보통 배우들이 나옵니다. 통전부장은 방송국으로 치자면 책임 프로듀서입니다. 우리는 장관이 PD와 배우 역할을 겸하기도 하지만 북한은 이를 엄격하게 구분합니다.
회담을 제의하려면 북한의 상황도 고려하고 그쪽 요구도 들어주면서 우리 요구도 관철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만,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자고 하면 대화가 되겠습니까?
프레시안 : 이희호 이사장이 방북했을 때 김정은 제1위원장을 면담하지 못한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정세현 : 방북 준비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방북했던 사람들끼리도 말이 다른데, 방북 일정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김정은 위원장의 면담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평양 순안 공항에 도착했을 때 맹경일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이 마중을 나왔는데, 이때 김 제1위원장이 나오지 못해서 실망했다는 이야기도 전했습니다. 이희호 여사는 서울로 돌아올 때 맹경일 부위원장에게 김 제1위원장을 만나지 못해서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돌아간다고 말씀을 전해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말이 안 됩니다. 이 모든 말이 맞다고 한다면, 만나지 못할 것을 미리 알았으면서 왜 아쉬워합니까? 결국 방북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철저한 준비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김대중평화센터의 간판인 6.15 공동선언의 의미를 스스로 퇴색시킨 겁니다. 김대중평화센터도 더불어서 망신스럽게 된 것 아닙니까?
프레시안 : 그런데 일부에서는 김정은 제1위원장이 대외적인 자리에 나서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이희호 이사장을 만나지 않았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정세현 : 김정은 제1위원장의 외교 능력이 의심된다는 평가도 있던데, 김 위원장의 통치 전략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김 위원장은 본인이 지도자 경력이 짧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지도자로 군림할 때 써먹을 수 있는 전략이 바로 신비주의입니다. 그래서 러시아에도 가지 않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김 위원장 본인이 이희호 여사를 초청했고 인간적으로 봐도 할머니 같은 분이기 때문에 잠깐이라도 인사를 하는 것이 예의였음은 분명합니다. 긴 시간 동안 담화를 나누는 것은 어려울 수 있지만, 이 여사의 숙소인 백화원에 와서 간단하게 인사 정도는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럼에도 김 위원장의 이번 행보를 두고 김 위원장이 경험부족으로 대외적인 문제에 관심도 없고, 그래서 능력도 없다고 진단하는 것은 과도한 해석이라고 봅니다. 북한 같은 일인 지배체제 국가에서 최고 지도자나 권력자는 많은 것을 배우고 알아야 합니다. 결정을 해줘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관심이 없다고 단정 짓는 것 자체가 틀린 것이고 능력이 없다고 평가하는 것도 좀 '오버'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아베와 김정은 만나면, 박근혜는?
프레시안 : 김정은 제1위원장이 신비주의적인 전략을 쓰는 것이라면, 9월 초 중국에서 열릴 제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식에도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것 아닌가요?
정세현 : 그렇다고 봅니다. 일단 김 위원장은 북한 내부에서 소위 '최고 존엄'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북한 지도부 입장에서 보면, 외국에 나가도 김 위원장이 제대로 대접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김 위원장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 오른쪽에 설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북한 지도부나 김 위원장 입장에서는 이럴 바에는 차라리 나중에 단독으로, 따로 중국을 방문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프레시안 :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세현 : 우리는 박근혜 대통령이 가야 합니다. 안 그래도 미국이 박 대통령 대신에 김장수 주중 대사가 참석하는 것이 좋겠다고 보도되기도 했는데, 여기서 정말 김 대사가 참석하면 국제사회에 한국은 미국이 말하는 그대로 실행하는 속국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게 됩니다.
물론 지난 5월에 러시아에서 개최했던 전승절 기념행사와 관련해서도 미국은 우리에게 박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그 건의 경우에는 러시아와 미국의 관계도 있었고, 우리와 러시아 간의 경제관계가 그다지 깊지 않기 때문에 박 대통령이 직접 가지 않는다고 해도 큰 손해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이번에 박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으면 향후 우리의 입지가 상당히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또 마침 미국 국무부에서 한국에 누가 참석하라고 압력을 가한 적이 없다고 밝히기도 했기 때문에 박 대통령이 참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프레시안 :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중국과 관계 개선을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요. 아베 총리는 참석할까요?
정세현 : 중국에서의 행사가 일본과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기념식인데, 패전국 대표로 아베 총리가 참석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오히려 아베 총리는 다른 곳을 방문할 수 있습니다. 바로 북한입니다. 아베의 방북이 현실화되면 상당한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달 말에 양측이 몽골에서 접촉을 가졌고 이어서 중국에서도 만났다는 보도가 나왔는데요.
납치 문제에 대한 과거 아베 총리의 접근 방식을 보더라도 그가 이 문제에 정치적 의도를 갖고 접근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베 총리는 지난 2002년 평양에서 열린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 당시 관방 부(副)장관 자격으로 고이즈미 총리를 수행했습니다. 일본은 당시 북한에 납치 문제를 강하게 제기했고 결국 요코다 메구미(橫田惠)의 납치 및 그의 사망을 확인했습니다.
이후 2004년 일본은 요코다 메구미(橫田惠)의 유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유골이 메구미가 아닌 다른 사람의 유골임이 밝혀졌는데요. 이 유골의 진위 여부를 공개한 사람이 아베 당시 관방 부장관입니다.
만약 아베가 이 사안을 정치적인 문제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메구미의 유골을 확보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면 이런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베는 이런 경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한국이 계속 자기를 외면하면서 미국이 한국 정부에 일본과 잘 좀 해보라고 하는데도 막무가내로 버티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일본으로서는 박근혜 대통령을 한일 정상회담 자리에 끌어내려면 북한 카드를 이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아베의 방북이 현실화된다면 박근혜 정부는 뭐하고 있는 거냐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아베와도, 김정은과도 대화의 통로를 닫아버리면 동북아 정세에서 한국이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겁니다.
그리고 설사 아베의 방북이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방북할 수도 있다는 일종의 '설'이 존재하는 한 한국 정부는 노심초사하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북한이 현 상황에서 통일봉남(通日封南), 즉 일본과는 이야기하고 남한과는 문을 닫아버리는 식으로 외교를 펼치면, 우리가 코너에 몰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과 일본은 만나는데 남북, 한일 간 대화 안되면 우리 외교는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 남한 정부는 북한과 만나든지, 아니면 아베가 북한에 가지 못하도록 일본과 관계를 개선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이 이걸 노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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