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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크인 자존심…"철광도시에 문화를 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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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크인 자존심…"철광도시에 문화를 심다"

[온 가족 세계여행기] 스페인 빌바오로 가다

프랑스 남부지방에 접해있고 스페인 서북부에 위치한 도시 빌바오로 간다. 빌바오는 바스크 지방의 주요도시다. 특히 지금까지 보던 스페인과는 다른 자연과 다른 모습을 가진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광활한 평원을 자랑하는 다른 스페인과는 달리 바스크 지방으로 들어가는 길목부터 온통 첩첩이 산으로 뒤덮혀 있다. 마치 강원도에 가기 위해서 대관령이나 미시령을 지나야 하듯이 스페인의 빌바오도 빽빽한 산들을 하나씩 들춰가며 한참을 들어서면 비로소 빌바오를 만나게 된다.

들어가는 길목의 휴게소부터 키가 다소 아담하고 약간 통통한 사람들이 주문을 받는다. 특이한 음식은 안 먹어 보고 못가는 내 성미 때문에 딱 순대같이 생긴 음식 한 접시와 시원한 생맥주를 마셔본다. 마치 새로운 세계에 들어갈 때 거치는 통과의례처럼.

빌바오는 과거에는 철광산업으로 도시가 융성했으나 철광산업의 쇠퇴로 곤란을 겪다가 1980~90년대 들어서서 문화도시로 탈바꿈하여 지금의 면모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문화도시로 변화하는데 환경과 시민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았기 때문인지 빌바오는 안락하고 친근한 문화도시로 기억된다.

바스크 지역과 바스크인은 스페인에 속하기는 하지만 기원 전부터 이곳에서 살던 소수민족이다. 이 지역사람들은 언어와 생김새도 다를 뿐만 아니라 중앙스페인과 지리적 환경도 상당히 다르고 바스크족이라는 민족적 고유혈통을 유지하는 곳이다. 그래서 스페인에 대한 독립요구가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였으며, 한때는 폭력 사태를 동반하기도 했었다.

또한 바르셀로나에서 월드컵을 개최하자 그에 대한 반발로 세계적인 현대미술관인 구겐하임 미술관을 기획했다고 하니 같은 나라이지만 중앙 스페인과 바르셀로나 그리고 빌바오 간의 지역적, 민족적 갈등과 경쟁은 상당한 듯하다.

빌바오 축구팀은 오로지 바스크족만 클럽에 가입할 수 있다고 한다. 즉,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만 국가대표팀이 되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조건이다. 이 정도 되니 축구에 대한 열기가 대단한 것은 당연한 얘기다. 우리는 빌바오에서 때마침 열리는 리그 마지막 경기를 보려했으나 축구장은 이미 만석이라 자리가 없다. 단지 길거리에서 빌바오팀 티셔츠를 입고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축구팬들만 실컷 구경하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마치 우리가 한일 축구대항전을 할 때처럼 그렇게 소리치며 축구장에서는 축구장대로 길거리에서는 길거리대로 응원의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빌바오의 현실을 모르고 바보같이 발품을 팔고 돌아다닌 셈이다.

빌바오 근처에서 숙소를 찾는다. 빌바오에서 10~20km 정도 떨어진 대서양 위쪽 해안을 끼고 있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해변이 한눈에 들어오는 캠핑장에 숙소를 잡았다. 가온이와 가람이도 우와!하는 탄성을 연발하며 엄지를 치켜세운다. 깍아지른듯한 절벽과 투명한 물빛, 드넓은 모래해변을 가진 곳이다. 특히 석양이 아름다워 수많은 연인들이 해변근처의 카페에서 서로를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의자를 한쪽으로 모아 어깨동무를 하고 붉게 퍼져나가는 노을을 향해 한곳을 바라보고 있다. 청정해변과 아름다운 절벽, 그리고 붉게 타오르는 석양은 연인들의 발길을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다음날 빌바오의 대표 미술관인 구겐하임 현대미술관과 아롱디하 문화센터를 둘러보기 위해 아침 일찍 캠프장을 나섰다.


▲ 캠핑장 근처 해변. ⓒ가온가람이 가족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는 예술공간 구겐하임 미술관

구겐하임 미술관(Guggenheim Museum)은 황금색 파도에 둘러싸인 거대한 배 모양을 하고 있는데 티타늄 소재로 만들었다는 건물 외관은 보는 각도에 따라 모양과 색깔을 달리한다. 들어서는 입구에 있는 꽃으로 만든 거대한 강아지 조형과 건물 뒤쪽에서 볼 수 있는 대왕 거미는 마치 미술관을 돌보는 수호신인 듯 버티고 있다.

미술관의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인간의 신체 안으로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목구멍을 따라 인체의 내부로 들어가면서 끈적끈적한 위액에 둘러싸이게 되는 듯, 점성 강한 목젖이나 위액같은 거대조형물이 천정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한 층을 더 올라가면 구멍이 숭숭 뚫린 허파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얇은 막으로 뒤덮인 천위에서 아이들은 신이 났다. 한국 아이들이 방방이라고 말하며 점프하고 노는 놀이기구를 닮았다. 어떤 건 현재를 촬영해서 몇 초가 흐른 뒤 촬영결과를 현재와 다시 접목하여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시차를 가진 오묘한 촬영을 할 수 있게 된다. 과거와 현재, 미래 그리고 시간에 대한 상상력을 발동하게 한다.

맨 위층을 제외하고 미술관의 모든 전시관은 조형물을 만져보고 타보는 등 체험을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전통적인 미술관처럼 멀찌감치 떨어져서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작품을 만지고 조작해보고 때로는 유리거울 속에 들어가서 미로에도 빠져보며 다양한 예술적 표현이 가진 자유로움을 마음껏 흡수한다.

기존의 예술이 높은 천정위에 매달려 그저 눈으로만 바라볼 뿐 아무리 점프를 해도 닿을 수 없는 거리감이 있었다면, 구겐하임은 그 예술을 우리의 발밑으로 가져와서 만져보라고 채근하고 '기분이 어때?' 라고 묻는 장난꾸러기 같다. 예술에 대한 깊이가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술을 인간과 동떨어진 어떤 세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것, 그 표현을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는 예술이라는 측면에서 구겐하임은 친절하고 가까운 옆집 아저씨로 다가온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나이가 한참 돼버린 어른에게도 신선하고 행복한 경험이었다.


▲ 구겐하임 미술관 내부. ⓒ가온가람이 가족

작은 배려가 빛났던 다양한 문화공간 아롱디하 문화레저센터

이곳은 특이하고 정교한 건물구조가 특징인데 각각의 독립된 도서관, 영화관, 수영장, 헬스장 등 다양한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서 구겐하임 미술관과 함께 빌바오의 대표적인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문화센터는 바깥쪽에서 볼 때는 그냥 네모나고 밋밋한 하나의 큰 건물일 뿐이다. 반면에 안으로 들어서면 마치 입체퍼즐처럼 4~5개의 독립된 건물이 가로 세로로 연결되어 있다. 각각 테마별로 도서관, 영화관, 피트니스 센터 등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블록을 끼우듯 그렇게 모두 서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들어가는 입구에는 48개의 각기 다른 독특한 형태의 기둥이 있고 이 특이한 기둥은 각기 여러 나라의 문화를 표현한 상징물이라고 한다.

특히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은 건 도서관 건물이다. 4개 층으로 건물 전체가 도서관으로 되어 있는데, 책을 읽고 공부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있고 각 층마다 테마별로 책이 전시되어 있다.

먼저 어린이 도서관을 둘러보는데 무언가 이상한 걸 발견한 건지 가람이가 "어! 엄마 이게 뭐지?"하며 나에게 손짓하며 부른다. 가까이 다가서서 보니 책들마다 각각의 문양이 표시되어 있다. 자세히 책들을 비교해 보니 글을 모르는 아이들이 한눈에 책을 찾을 수 있도록 누구나 유추할 수 있는 문양으로 과학, 역사, 모험 등을 구분하여 표시해 둔 게 아닌가.


▲ 직관적인 도서 분류 문양. ⓒ가온가람이 가족

이미 문자와 숫자의 분류에 익숙한 우리에겐 아이들의 시선에서 바라본 이 문양표식은 참으로 신선해 보였다. 한국에서도 그렇고 해외에서도 도서관을 여러 군데 가 보았지만 아이들의 관점에서 꽤나 정교하고 직관적인 문양으로 분류한 이 표식은 왠지 나를 조금 들뜨게 했다.

나는 흥분해서 애들에게 '이것 좀 봐봐', '분류를 너무 잘 해 놨어. 글자 모르는 애들도 책 다 찾아보겠는데. 우왕!'하는 콧소리까지 섞여 나온다. 이곳에서 가람이는 까막눈이다. 한글은 알아도 외국어는 모르니 까막눈일 수밖에. 이 생동감 있는 문양을 가르키며 '가람아 우리 책 읽을래? 가서 책 골라와 봐!' 가람이는 자기가 친숙한 공룡책을 포함해서 어드밴처와 동물들에 대한 책을 골라온다. 띄엄띄엄 책을 설명해 주며 가람이와 한참동안 책을 읽는다.

그런데 가온이가 사라지고 없다. 어디를 갔는지 보이지가 않는다. 나중에 물어보니 도서관 전체를 돌아다니며 한국책이 있는지 찾은 모양이다. 어딘가에서 한국책 하나를 찾았다며 좋아라 하던 가온이.


▲ 아롱디하 도서관 내부. ⓒ가온가람이 가족

매번 도서관에 갈 때마다 '한국책이 있나?' 뒤지곤 한다. 도서관이나 서점을 둘러볼 때 여기저기 일본책과 중국책은 자주 눈에 띠는데 한국책은 별로 안보이니까 자존심이 상했는지 항상 갑자기 사라져서 한국책이 어디 있는지를 찾으러 다니곤 한다. 찾다가 안보이면 시무룩해 하고 찾고 나면 신나서 '여기 한국책 있어!'라며 좋아한다. 우린 이 도서관에서 한참을 머물렀는데 특히 책을 좋아하는 우리 큰애 때문에 머무르는 내내 즐거운 시간이었다.

나는 한국에서도 아이들과 함께 도서관에 종종 가는데, 그때마다 아이들은 무슨 책을 읽어야 할지 몰라서 한참을 책 사이를 서성거리곤 한다. 그러면 여지없이 부모가 책을 골라서 '이것 읽어보자'하기가 일쑤다. 이미 아이의 동심을 잃어버린 우리는 교훈적이거나 교육적인 것에 자꾸만 손이 가는 습성을 버리기 힘들다. 그러나 아이들이 그들의 감각대로 책을 골라 오는걸 보면, 어른은 절대 가질 수 없는 열쇠를 가진 듯 기상천외한 동심의 세계를 여는 책을 골라 오곤 한다. 글자를 몰라도 그렇게 아이들 스스로 책을 고르고 어른들은 글을 읽어주는 정도의 보조적인 역할을 해준다면, 아이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책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그들의 길을 찾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아롱디하 도서관(Alhondiga Bilbao)처럼 아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문양을 표식으로 넣어두면, 글자를 모르는 어린 아이라도 읽고 싶은 책을 스스로 고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작은 배려 하나가 나의 눈에 유독 빛나는 보석처럼 보였던 이유는 아마도 지금처럼 부모가 모든 책과 공부하는 스케쥴을 다 짜주어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그들의 길이 어딘지 몰라서 우왕좌왕하는 어른아이가 너무 많은 상황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이도 유추할 수 있는 문양으로 분류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의 책을 고르도록 해놓은 도서관의 기지가 나의 눈엔 빛나는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이렇게 신선한 충격과 행복감을 가득 가지고 돌아온다. 어느덧 해가 한참 아래로 내려와 있다.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석양에 비친 빌바오와 구겐하임, 그리고 아롱디하. 가족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흐른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곳에 이대로 눌러 살아도 참 좋을 것 같다.

▲ 아롱디하 도서관 외부. ⓒ가온가람이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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