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외채 위기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습니다. 6월 30일 그리스가 기술적 디폴트(부채 상환 불능)에 빠진 데 이어 오는 5일 그리스 국민들은 국제채권단이 요구하는 긴축안의 수용 여부를 결정하는 국민투표를 갖습니다. 조셉 스티글리츠, 폴 크루그먼 등 세계적인 경제학자들이 긴축안 거부를 촉구하는 가운데 5일 치러질 국민투표는 그리스의 미래는 물론이고, 2차 대전 이후 유럽인들이 이룩해온 복지국가, 민주주의, 그리고 유럽 통합의 운명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나아가 '사람보다 돈'을 앞세우며 1%의 부자들을 위해 99%의 보통사람들을 착취해온 신자유주의 체제의 지속에도 중대한 갈림길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그리스의 디폴트는 6월 하순부터 진행된 그리스 정부와 트로이카로 불리는 국제채권단(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유럽중앙은행, 국제통화기금) 간의 부채 상환 협상이 결렬된 때문입니다. 6월 23일 치프라스 총리가 이끄는 그리스 정부는 부자들이 긴축의 부담을 더 지는 협상안을 제시했습니다. 기업에 대한 법인세 세율을 26%에서 29%로 올리고 고소득자에 대한 소득세를 늘리며 기업의 초과 이윤에 대해 12%의 세금을 매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부가가치세를 무려 23%로 올리라는 트로이카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도 서민 생활 보호를 위해 식품이나 의료 등 기본 생필품에 대한 부가가치세는 6~13%로 낮추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바로 가기 : The Troika's 'Carrot and Stick': Greek Debt Negotiations at 11th Hour)
그러나 트로이카는 이 제안을 거부했고 결국 치프라스 총리는 6월 27일 국제채권단이 요구하는 긴축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선언했습니다. 그리스 국민들의 뜻을 물어 그리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굴욕적 긴축안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유로존 탈퇴(그렉시트) 등 극단적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리스의 주권과 국민의 안전을 지킬 것인가를 결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미 보도된 바와 같이 스티글리츠, 크루그먼 등 경제 석학들은 차라리 유로존 탈퇴를 선택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지난 2010년부터 시작된 긴축정책이 그리스 경제를 파멸시키고 그리스 국민들을 가난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5년간 그리스 경제는 25% 마이너스 성장을 했고, 청년층의 60%가 실업 상태이며, 연금 생활자의 60%가 빈곤선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바로 가기 : "그리스, 차라리 그렉시트 택하라" 스티글리츠·크루그먼 '위험한 제안'…왜?)
또한 채권단의 일원인 국제통화기금(IMF)조차도 현재의 긴축정책으로 그리스는 결코 모든 부채를 상환할 수 없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독일 신문 <쥐드도이체차이퉁>에 따르면 IMF는 이번 외채 협상에 즈음한 연구보고서에서 이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IMF는 이미 지난 2012년 그리스 경제가 감당할 수 있는 부채 규모의 상한선은 GDP의 110%라는 평가를 내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의 부채는 이미 2010년 GDP의 133%에 달했고 지금은 175%로 뛰어올랐습니다.
(☞바로 가기 : Austerity not enough to save Greece - leaked IMF documents)
그러니까 외채 위기가 발생한 2010년부터 이미 그리스 경제는 부채 상환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던 셈입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채무자가 부채 상환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악성 부채는 탕감해주고 부채 상환에 유예 기간을 두어 그동안 채무자가 경제능력을 키워 빚을 갚도록 하는 것이 정상적 수순입니다. 1980년대 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 등 중남미 국가들이 외채 위기에 빠졌을 때, 미국은 이러한 수순(브래디 플랜)을 통해 위기를 수습했습니다. 또한 현재 국제채권단의 주역인 독일이 2차 대전의 폐허에 빠졌을 당시인 1948년,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임금 채무를 제외한 모든 국내 채무를 탕감함으로써 독일의 경제 회생을 도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1972년 8.3조치를 통해 부실기업의 채무를 탕감해주는 조치를 취한 바 있습니다.
빚 갚을 능력이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상환을 요구하는 것은 폭력적 강탈에 다름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고리대금업자가 채무자에게 '빚 갚을 돈이 없으면 신장 등 신체 장기라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은 조폭적 행태입니다. 미국의 비판적 경제학자 마이클 허드슨(미주리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국제채권단은 그리스에 대해 빚 갚을 현금이 없다면 전력, 통신, 항만, 수도 등 알짜배기 공기업을 헐값에 매각하라고 은근히 요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조폭적 행태이자 신자유주의의 말기적 증상입니다. 그래서 허드슨은 현재 트로이카가 그리스에 대해 벌이는 행위는 국제자본의 금융력을 동원한 전쟁이나 다름없다고 말합니다. 군사력만 동원하지 않았을 뿐이지, 돈의 힘을 앞세워 그리스 경제와 그리스 국민의 삶을 파탄 내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 경제가 파탄 나고 그리스 국민들이 죽어나가는(2010년 외채 위기 이후 그리스의 자살률은 극적으로 늘어났습니다) 한이 있어도 자신들의 이윤을 챙기려 한다는 것이죠. 허드슨은 이러한 금융침략에 대해 그리스 국민은 마땅히 저항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로 가기 : A New Mode of Warfare: The Greek Debt Crisis and Crashing Markets)
한편 한 나라가 금융위기 등으로 경제위기에 빠지면 금리를 내리고 정부가 돈을 풀어 경제를 살리는 것이 정상적 대처 방안입니다. 2008년 미국 금융위기, 2010년 유럽 재정위기 때 미국 정부와 유럽연합은 이른바 '양적 완화(막대한 통화 발행)'를 통해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강대국은 약소국들에 대해서는 이러한 처방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1997년 동아시아 외채위기 때 한국 등에 대해 가혹한 긴축과 고금리를 요구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지독한 이중기준이죠. 강대국은 약소국의 경제 회생보다는 자국 금융자본의 채권 회수를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유로존에 속해 있는 그리스는 독자적 통화정책을 펼 수 없습니다. 정부가 돈을 찍어내 경제를 살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가 경제 회생을 위한 독자적 통화정책을 펼 수도 없고, 채권단이 부채 탕감이나 상환 유예마저 허용하지 않는다면 유로존을 탈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스티글리츠나 크루그먼의 조언입니다.
(☞바로 가기 : Joseph Stiglitz: how I would vote in the Greek referendum)
(☞바로 가기 : Greece Over the Brink)
사실 2010년 그리스 금융위기가 발생했을 당시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의 지도 국가들은 그리스에 대한 부채 탕감을 고려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국 오바마 정부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이를 백지화했다고 허드슨은 전합니다. 오바마 정부에게는 그리스 경제의 회생보다는 그리스에 돈을 물린 미 금융자본의 채권 회수가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골드만삭스를 비롯한 미국의 금융자본은 그리스의 국채 발행을 자문해주고 막대한 수수료를 챙긴 데다 엄청난 헐값(액면가의 30%)에 그리스 국채를 매입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외채위기가 발생하자 IMF와 유럽중앙은행 등이 그리스에 대출해준 구제금융을 통해 액면가 전액을 회수했다고 하는군요. 한편에선 외채위기로 그리스 국민들이 죽어나가는 마당에 다른 한편에선 국제 금융자본들이 꿩 먹고 알 먹는 재미를 본 것입니다.
실제로 영국의 부채탕감 운동 단체인 '주빌리 부채 캠페인'에 따르면, 2010년 이후 그리스에 제공된 구제금융 2520억 유로 중 92%가 채권자에게 갔다고 합니다(이중 부채 원금 및 이자 상환에 들어간 돈은 59%, 1492억 달러). 그리스 경제 회생에 투입된 금액은 고작 8%(201억 유로)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그리스의 부채 규모는 2010년 3100억 유로에서 현재는 3170억 유로로 오히려 늘어났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 국민들이 지난 5년간 죽을 고생을 하며 빚을 갚았지만 빚은 더 불어난 것입니다. 반면 그리스 정부에 돈을 빌려준 국제 금융자본은 부채 위기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은 채 IMF 등으로부터 원금 플러스 알파를 되돌려 받고서는 그리스에 대해 '좀 더 허리띠를 졸라맬래, 아니면 알짜배기 공기업을 헐값에 넘길래' 하고 협박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바로 가기 : 그리스에 수혈됐던 '수천억유로', 그 많은 돈은 누구 주머니로?)
IMF 등 국제채권단이 그리스 정부와의 협상에서 초강경 자세를 유지하는 데는 경제적 이유 외에 중대한 정치적 저의가 있습니다. 바로 유럽 최초의 반긴축 정권인 치프라스 정부를 붕괴시키겠다는 것입니다. '돈보다 사람이 먼저'를 내세우는 치프라스 주도의 시리자 정권이 정치적 성공을 거둘 경우 신자유주의적 패권의 최대 적수인 반긴축 세력이 마치 바이러스와도 같이 유럽대륙으로 퍼져갈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미 스페인의 제2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포데모스가 올 연말 총선에서 정권 장악의 가능성을 보이고 있으며,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도 독일 주도의 유럽 신자유주의 세력에 저항하고 있습니다. 이참에 반긴축 정치세력의 싹을 꺾어놓지 않는다면 신자유주의가 패퇴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이 때문에 사미르 아민, 제임스 페트라스, 보리스 카갈리츠키 등 세계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이번 그리스 위기는 단순히 그리스만의 문제가 아니라 2차 대전 이후 유럽인들이 힘들여 이룩해온 복지국가, 민주주의, 그리고 민주적이고 평등한 유럽 통합의 꿈이 계속되느냐, 좌절되느냐의 중대 기로에 섰다고 말합니다. 시리자 정권이 패퇴한다면 앞으로 유럽은 1%의 부자가 99%의 보통사람들을 마음대로 착취하고 지배하는 신자유주의의 천국(99%에게는 지옥)이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바로 가기 : On Greece and Europe: On the Delphi Declaration)
특히 파키스탄 출신의 영국 지식인 타리크 알리는 최근 저서 <중도적 극단주의(The Extreme Center)>를 통해 지금 세계는 미국이 주도하는 '중도적 극단주의'가 지배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첫째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도처에서 전쟁이 지속되고 있고, 둘째 유럽과 북미 등에서 오직 이윤 추구를 위한 1% 부자들의 보통사람들에 대한 착취가 만연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한때 평등과 공정을 지행했던 독일의 사회민주주의마저 미국식 신자유주의에 완전히 굴복했으며 이에 따라 현재 유럽은 유럽연합집행위원회와 유럽중앙은행 등 금융관료에 의해 지배되는 비민주적 상황에 놓여 있다고 진단합니다. 유럽연합이 유럽인들의 민주적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국제금융자본에 조종되는 관료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10여년 전 제레미 리프킨이 말했던 '유러피언 드림'은 이제 머나먼 과거의 얘기가 돼버린 것입니다.
알리는 현재 유럽과 미국의 정치는 민주주의 이상을 저버린 채 돈의 노예가 돼 스스로 자살극을 벌이고 있다면서 서방의 민주정치는 사실상 파탄 난 상태라고 지적합니다. '중도적 극단주의'란 산자유주의적 국가의 정치적 표현으로서 이들 정치세력은 패권적 금융세력과 너무나도 깊이 결탁한 나머지 이제 정치는 금융자본의 하수인으로 전락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대안적 자본주의, 진보적 케인스주의, 경제적 약자를 돕기 위한 국가의 개입, 민영화 반대 등 신자유주의를 대체하려는 모든 정치적 시도들이 봉쇄된 상태라고 그는 말합니다.
(☞바로 가기 : Disfunction in the Eurozone: Greece and the Future of European Democracy)
(☞바로 가기 : We Are Living in the Anti-Europe)
그리스 시리자 정부의 반긴축 정책은 바로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패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도전의 성패는 일단 오는 5일의 그리스 국민투표에서 판가름 날 것입니다. 지난 24~26일의 여론조사에서 국제채권단의 긴축 방안에 대한 찬성(47.2%)이 반대(33.0%)를 앞섰습니다. 그러나 협상이 결렬된 직후인 28~30일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는 반대(57%)가 찬성(30%)보다 갑절이나 많아졌습니다. 채권단의 가혹한 긴축 요구를 더는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분위기가 커지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스의 행로는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의 진로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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