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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반미운동은 끝났다?

[문학예술 속의 반미] 연재를 마치며

앞에서 1945년부터 반세기 동안 한국인들의 미국에 대한 인식 변화와 아울러 반미주의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았다. 한국인들의 태도와 행동뿐만 아니라 미국의 정책과 행위에 관해서도 분석해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은 1980년대 이전까지 "양키 고 홈"이란 구호가 나오지 않는 유일한 나라라고 주장했다. 1970년대까지 한국은 '반미의 무풍지대'라는 표현도 나왔다. 또한 1980년대의 반미운동도 주로 대학생들의 폭력 시위를 통해 표출되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주장이나 인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첫째, 반미주의는 한국에서 1980년대에 처음 나타난 게 아니었다. 미국의 도움으로 한반도가 일본에서 해방되던 1945년부터 반미운동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1970년대까지 '무풍'이 아니라 '미풍'도 불고 때때로 '강풍'도 불었으며, 1980년대부터 '폭풍'과 '태풍'으로 바뀐 것이다. 둘째, 반미주의는 주로 대학생들의 폭력적 정치 행위로뿐만 아니라 문학예술인들의 문화 행위에서도 표출되었다. 문인들과 예술인들은 그들의 작품 활동을 통해 미국을 비판하거나 비난하면서 거부하기도 했던 것이다.

한국의 반미주의는 불평등한 한미관계에 의해 손상된 민족적 긍지와 침해된 자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외침이요 몸부림이었다. 한국인들은 미국의 내정간섭과 지배를 받으며 미국인들의 오만함에 굴욕감을 맛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원한과 분노는 혹독한 정치적 탄압과 빈약한 사회 경제적 환경 때문에 자유롭게 표출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서의 반미주의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왜 그리고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펴보았다.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주로 1940년대의 '경향문학'(傾向文學), 1950년대의 '기지촌문학'(基地村文學), 1960년대의 '참여문학', 1970년대의 '저항문학'과 '마당극', 1980년대의 '민중문학예술', 그리고 1990년대의 '통일문학' 등을 통해 표출되었다.

1945년 조선인들은 미군들을 '해방군'으로 환영했다. 그들이 조선의 해방에 이어 독립까지 불러오리라 기대했다. 조선의 많은 문인들과 예술인들은 그들을 '은인'이나 '천사'로 묘사하면서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미군들은 조선에 '점령군'으로 왔으며 분명히 조선의 독립보다 미국의 이익을 위한 정책을 폈다. 조선은 분단되었고 독립은 연기됐다.

미 군정은 조선인들에게 일제 식민통치보다 나을 게 거의 없었다. 38선 이남에서의 미 군정 정책은 38선 이북에서 소련군의 정책과 비교하면 대체로 실패한 것이었다. 특히 일본 식민통치의 잔재를 없애기는커녕 오히려 부활시킨 게 가장 큰 잘못이었다. 게다가 미국과 이승만을 비롯한 조선의 극우세력은 38선 이남에서 단독정부를 세우는 것을 선호했다. 분단이 굳어지면서 독립이 지연되고 미군정의 정책이 실패하자 이에 따른 조선인들의 좌절과 분노는 궁극적으로 미국의 조선 점령에 반대하는 민족해방 투쟁을 이끌게 되었다.

그러나 1948년 38선 이남에 친미반공 정부가 들어서고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한국인들의 반미주의는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다음과 같은 이유였다. 첫째, 반미 성향을 보였던 많은 좌파 문인들과 예술인들이 38선 이북으로 넘어가거나 우파로 변신했다. 둘째, 반미감정을 표출하는 자체가 한국사회의 매카시즘 또는 반공문화 속에서 불법으로 간주되었고 '용공이적'으로 처벌되었다. 셋째, 미국이 한국전쟁에 참여해 한국을 구하고 전쟁 이후 복구와 재건을 도와줌으로써 한국인들에게 미국에 대한 우호적 인상을 심어주었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남한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 간주되었고, 북한은 최악의 적으로 취급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인들에 대한 미국인들의 거만함과 경멸은 민족적 긍지를 훼손시켰다. 특히 주한미군들이 한국인들을 강간하거나 살인하는 등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이른바 '기지촌소설'을 통해 잘 묘사되었다. 물론 어찌 보면 기지촌소설은 반미주의보다는 흑인들에 대한 외국인 혐오증이나 인종차별주의를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작품 속에서 모든 종류의 악행을 저지르는 미국인은 흑인병사들이었고, 흑인병사와 한인 양공주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는 경멸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1960년 4월 혁명 과정에서 안정적 친미반공 정부가 들어서도록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국 정치에 과도한 내정간섭을 했지만, 그러한 개입의 은밀한 속성 때문에 많은 한국인들은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킨 미국의 역할에 대해 감사할 뿐이었다.

그러나 곧 한국인들은 그들 스스로 혁명을 이행하지 못했다는 점을 깨달으며 훼손된 민족적 긍지를 느끼기 시작했다. 대학생들과 다양한 사회단체들은 주한미군 철수와 한반도 중립화 통일을 추구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1961년 미국의 지나친 내정간섭 때문에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양키 고 홈"이란 구호가 터져 나왔다. 영향력 있는 민족주의적 시인들은 이 구호를 그들의 시에 그대로 옮겼다.

4월 혁명의 흐름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 정반대로 바뀌어버렸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반공법을 악용하고 남용하면서 진보적 문화단체들을 해산시키고 표현의 자유를 혹독하게 제한했다. 문학예술 작품을 통한 미국에 대한 심각한 비판도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중반 한국인들에 대한 주한미군들의 범죄가 끊임없이 일어나면서 한국에서의 반외세 민족주의는 넓고 깊게 전개되었다. 게다가 미국은 일본과 굴욕적 한일협정을 맺도록 강요하고, 명분 없는 베트남전쟁에 파병하도록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했다. 처음엔 박정희가 베트남 파병을 간청하다시피 했지만 말이다. 이러한 미국의 개입과 지배에 의해 한국의 자주권이 훼손되자, 문인과 예술인들은 작품을 통해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묘사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 한국인들에 대한 주한미군들의 범죄를 고발하고 이른바 '양키문화' 또는 '미군 (GI) 문화'를 거부하는 기지촌소설이 많이 발표되었다.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표출하는 데 몇 가지 주목할 만한 변화가 생겼다.

첫째, 대부분의 작품에서 여전히 흑인 병사들이 한국인들에 대해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것으로 묘사되었지만, 일부 작품에서는 백인 병사들이 범죄자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둘째, 많은 작품들이 미국인들의 오만과 범죄에 한국인들이 고통을 겪으며 분노를 억누르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일부 작가들은 한국인들이 미국인들에 맞서거나 심지어 보복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셋째, 많은 한국인들이 양공주들을 경멸해오다 미국인들에 맞선 동포애로 그들에게 동정을 보이기 시작했다.

1970년대는 혹독한 '유신 독재'가 펼쳐진, 한국 정치의 암흑기였다.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는 박정희 정권과 미국에 대해 어떠한 종류의 비판도 금지했다. 극심한 탄압은 반대세력이 지하로 잠복하거나 새로운 형태의 저항으로 문화운동을 전개하도록 이끌었다. 미국은 한국의 민주화에 걸림돌로 간주되었고 이에 따라 반미주의는 민주화 투쟁의 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첫째, 일부 급진적 반정부세력은 한국을 미국과 일본의 신식민지로 규정하며 지하에서 민족해방운동을 벌였다. 둘째, 민주화운동 활동가들은 민주주의와 반외세 한반도 통일을 위한 투쟁의 유용한 수단으로 시를 활용했다. 셋째, 대학생들은 한국의 군사독재와 외세의 지배를 풍자하는 탈춤과 마당극을 발전시켰다.

이렇듯 항의시위는 혹독한 정부 탄압 아래서 다양한 문화 활동으로 대체됐던 것이다. 군사독재의 탄압이 반정부세력의 저항방법을 바꾸도록 만들었듯이, 정부의 검열과 처벌은 많은 작가들로 하여금 특히 미국의 문화 침투에 따른 부정적 영향 등 비정치적이거나 덜 정치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도록 이끌었다.

1970년대 중반엔 미국과 한국 정부 사이에 심각한 외교적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주한미군 철수, 워싱턴에서 벌인 한국의 불법 로비 활동, 미국 중앙정보국의 청와대 도청, 박정희 정권의 인권탄압 문제 등이 얽히고설켰기 때문이었다. 두 나라 사이에 긴장이 높아지자 친정부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이 미국을 비난하는 일이 생겼다. '정권 차원의 친미주의'가 약해지고 '도구적 반미주의'가 일시적으로나마 전개된 것이다.

1979년 10월 박정희가 암살당하면서 유신체제가 무너졌다.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민주주의에 대한 커다란 기대를 품게 되었다. 그러나 전두환이 이끄는 새로운 군사세력이 1979년 12월 군부 내 쿠데타를 일으키고 1980년 5월 광주에서의 민주화운동을 잔인하게 진압하면서 정권을 잡았다. 더 악랄한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군부쿠데타와 광주학살 과정에서 전두환의 신군부가 주한미군사령관 지휘를 받고 있는 한국군 병력 일부를 차출하는데 미국이 묵인하거나 방조했다는 의혹이 퍼졌다. 많은 한국인들이 그렇게 믿기 시작했다. 나아가 미국이 전두환 군사 독재 정권을 승인하여 합법화해주고 강력하게 지지해줌으로써 1980년대에 폭발적인 반미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수십 년 동안 켜켜이 쌓여온 억눌려왔던 원한과 더 이상 참기 어려운 분노가 한국이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국제사회에서의 지위가 향상되던 무렵에 폭발적으로 분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1980년대 가장 주목할 만한 사회현상은 민중운동의 발전이었다. 민주주의, 외세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실질적 독립, 외세의 간섭 없는 한반도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게 목표였다. 대학생들이 반미감정을 폭력적으로 분출하는 한편, 문인과 예술인들은 민중 문화운동을 전개하면서 작품 활동이나 다른 활동을 통해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강렬하게 표출했다.

1980년대 중반 '새로운 마르크스주의'(neo-Marxism)와 '수정주의 학파'(revisionist school)의 영향을 받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한국사회의 특성에 관해 이른바 '사회구성체'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은 학계에서뿐만 아니라 문학예술 분야에서도 '주변부 자본주의'나 '국가독점 자본주의' 그리고 '반봉건 식민주의' 또는 '신식민지 국가독점 자본주의' 등과 같은 급진적 사상을 소개했다.

이에 따라 1980년대 민중문학 예술이나 민족문학 예술 작품들의 주제는 전쟁이나 핵무기 반대, 자본주의 반대, 미국의 제국주의와 신식민주의 반대 등을 포함했다. 당연히 문인과 예술인들은 미국이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고, 한반도 통일을 방해하며, 한국인들을 착취하고, 한국의 농축산물 시장을 개방하라고 압력을 행사하며, 제국주의적이고 물질적인 미국 문화를 퍼뜨리는 등의 행위를 비판했다. 간단히 말해, 많은 문인과 예술인들에게 미국은 '제국'이나 '적'이었고, 한국은 '식민지'나 '앞잡이'였던 것이다.

1992년 12월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거의 30년 동안 군사독재와 싸워온 지도자가 이끄는 '문민정부'가 1993년 2월 출범했다. 1961년 5월 군사쿠데타 이후 30여 년 만이었다. 정치 사회적 환경의 변화에 따라 폭력적인 민중운동이 쇠퇴하고 비폭력적 시민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저항문화 역시 폭력적 대중시위로부터 비폭력적 문화투쟁으로 바뀌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정책을 비판하거나 반대하기 위해 미국문화원을 방화하거나 성조기를 찢는 것보다 미국 관리들에게 항의 공개서한이나 엽서를 보내고 항의 전화를 하는 것이 더 효과적 방법이라고 간주한 것이다.

1990년대 들어 반미감정을 표출하는 강도가 낮아지고 빈도가 줄어들었지만 반미주의의 근원은 여전히 남았다.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묵인이나 방조, 한국인들에 대한 주한미군들의 범죄, 한국의 쌀시장 개방을 위한 미국의 압력, 한반도 통일에 대한 미국의 방해 등과 같은 문제들이 새로운 민족주의의 부흥과 함께 다양한 사회운동을 전개하도록 이끄는 역할을 했다. 한국의 경제성장과 국제사회에서의 지위 향상에 따라 일어난 현상이었다.

또한 지배계층의 미국에 대한 의존은 새로운 민족주의가 일어나는데 불을 붙였다. 앞에서 소개했듯, 미군이 한국인 양공주를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을 두고 정부 관료들은 무시하거나 축소하려 했다. 한국과 미국 사이의 외교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그러나 많은 한국인들이 이에 반발했다. 과거엔 미군 부대 주변의 양공주들을 극심하게 경멸했을지라도 1990년대엔 동포애와 동정심으로 그들을 대하게 되었다.

더욱 중요하게 1980년대 말부터 통일운동이 이와 비슷한 추세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남한 정부의 공식적 입장은 여전히 미국이 우방이고 북한이 적일지라도, 많은 한국인들은 미국은 언젠가 헤어져야 할 남이지만 북한은 껴안아야 할 동포라고 간주하게 된 것이다.

1990년대 한국의 가장 큰 문제는 평화와 통일에 관한 것이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국토와 민족이 분단된 채 반세기가 흐르도록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엔 미국이 아시아지역 안보를 구실로 한국의 군사독재를 지원했다. 국가안보와 지역안정 때문에 민주주의와 인권이 희생되었던 것이다.

현재와 미래엔, <뉴욕타임스>가 1992년 3월 8일 이미 예상했듯, 미국은 통일된 한반도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고 미국과 동맹을 맺을 것 같지 않으면 한반도 통일을 방해할 것이다. 미국의 이익 때문에 한국의 민족 정체성과 통일이 희생될 것이란 뜻이다. 따라서 한국의 반미주의는 1990년대의 새로운 민족주의와 동포애에 의해 강해질 것이며, 주한미군 철수와 한반도 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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