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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이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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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이웃입니까

[기고] 이웃에게 들은 416 세월호 참사 속 인간의 권리

세월호 참사는 내게는 이웃들의 아픔이었다. 직장 동료가 아이를 잃었고, 마을에서 함께 활동하던 언니의 아이를 떠나보내야 했다. 혹시 아는 사람을 분향소나 가족 대기실에서 만날까 두려워 쉽게 다가가기 어려웠다. 분향소에는 아는 아이들의 영정사진이 놓여있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우리 아기가 탄 배가 사고가 났대." 직장 동료가 단원고등학교로 달려갔다. 언론에서 나오는 소식과 다른 것 같다며 팽목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언니와의 통화 이후 소식을 전하거나 묻기 어려웠다. 누군가의 죽음이 확인됐을 때 동네 주민들은 모두 상주가 된 마음으로 장례식장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집을 방문해 식사라도 챙겨 먹는지 살펴보는 활동을 했다. 그때 세종시에서 왔다는 공무원들은 비슷한 일을 하며 바쁘다는 이야기만 들렸고, 정부의 컨트롤 타워 따위는 동네에 보이지 않았다.

2주쯤 지났을까? 아이의 생사를 알지 못해 돌아오지 못하는 직장 동료 언니가 걱정돼 팽목으로 찾아갔다. 피난이라도 온 듯, 큰 체육관을 가득 채운 겹겹 이불 사이로 개인의 사생활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 환경이었다. 피해 당사자들이 그런 부분까지 요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구조와 지원을 담당하는 정부는 부모들이 대안을 찾아 제안할 때까지 우왕좌왕이라고, 언니가 기력 없이 말했다. 피해 당사자들을 챙겨주며 인간적인 존중을 보이는 것은 자원봉사자들뿐이라고 했다.

ⓒ최형락

4월에는 시신이 바뀌는 일이 있었고, DNA 검사를 하자는 대안도 부모들이 냈다고 한다. 그러나 검사는 자신의 아이가 죽었음을 인정하는 일이었다. 검사를 받으려고 줄을 서는 동안 쓰러지는 어머니들도 많았다고 한다. 아직 내 아이가 살아있다고 끝까지 믿고 싶은 부모가 내 아이가 죽었을지도 모르고, 그 아이의 시신을 알아 볼 수조차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하는 DNA 검사. 그런데 심지어 검사한 시료를 잃어버려 다시 한 부모도 있었다고 한다. 검사나 보관이나, 정부는 인간에게 소홀했다.

처음에 시신을 씻기지도, 바르게 만져주지도 않고 보여주던 담당자, 시신 확인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가져가게 한 담당자, DNA 검사 결과를 잃어버려서 다시 하게 하는 담당자, 부패 방지를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장장 5시간을 이동하게 하는 담당자. 그것이 정부의 수습 과정이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아이도 바닷속에서 추웠을 거라며 이불을 덮어주는 부모와 달리, 그들에게는 그저 처리해야 하고 수습해야 하는 일이었을 뿐이다.

팽목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정부에게 피해 당사자들은 '국민'이기 이전에 골치 아픈 '세월호 참사 유가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아이가 죽은 이유조차 모른 채 2시간여 동안 배가 가라앉는 것을 가족을 포함한 전 국민이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했다. 밤이 와도 울화가 치밀어 잠을 청하지 못하고, 이웃의 신고로 경찰이 찾아올 만큼 목 놓아 울기도 한다. 형제자매들은 그 안에서 부모님들께서 걱정하실까 봐 눈물을 흘리지도 못한다. 사실이 배제되고 곡해된 기사들 속에 가족들의 삶은 뒤범벅이 되었고, 그 아래 쓰인 혐오세력의 댓글에 상처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형제자매들은 말한다. 일베들의 댓글보다 더 속상하고 깊은 상처를 받는 것은 이웃의 무심한 한마디라고.

"더이상 울지 않길래 이제 괜찮아진 줄 알았어."
"너무 유난스러운 거 아니야? 예민한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것 같으니, 모임에 참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우리가 사는 세상은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고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려는 깊이를 이미 잃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문제가 아니라고, 나 하나도 먹고 살기 바쁘다고 말하며, 슬픔은 유난스럽게 표현하면 안 되는 것쯤으로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한편에서는 이야기한다. 워낙 세상이 먹고살기 힘들고,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몰아가는 세상이다 보니 어쩔 수 없지 않겠냐고. 방송 3사와 인터넷 뉴스에서 보는 기사들이 진실인지, 사실의 한 조각인지, 소설인지도 파악되지 않으니 인간다운 삶과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려하며 살기 어려워졌다고.

피해자가, 난 피해자이니 나를 대할 때는 어떻게 해달라고 설명해야 하는 사회가 정상은 아닐 것이다. 아프다고 말하며 약은 이렇게 발라줘야 한다고 설명해야 하는 사회가 바람직하지는 않을 것이다. 피해자가 직접 조사를 하고, 권리를 말하기 위해 협의회를 만드는 과정에 집중하느라 치료받는 것을 '사치'라고 생각하게 하는 사회가 옳은 방향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달라져야 한다. 416인권선언은 우리 이웃들의 힘으로 다른 사회를 열자는 제안이다.

안산 지역사회는 그 사람들의 터전이다. 피해자들이 삶의 뿌리를 두는 땅이다. 피해자들 곁에는 가족들이 살아오며 관계해오던 이웃들이 존재하고, 이웃들도 이들에게 어떻게 반응하고, 보듬어 살아야 하는지 이제부터 알아가야 하는 숙제가 남아있다. 안산에서 서로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성찰은 의미가 남다르다. 416인권선언이 전환점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이 마음 편하게 치료받을 수 있는 동네, 아픈 사람의 인권을 이해하고 공감하여 보듬어주는 이웃, 함께 손잡을 수 있는 희망을 꿈꾼다. 희망고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성찰하고 새로운 희망의 싹을 틔울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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