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에 서울에서 미국과 중국의 외교관리들이 충돌했다.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때문이다. 류젠차오(劉建超) 중국 외교부 부장조리는 3월 16일 "중국의 우려와 관심을 한국 측이 중요시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3월 17일 미국 국무부의 러셀 아태 차관보는 "아직 배치되지 않고 여전히 이론적인 문제로만 남아 있는 안보시스템을 놓고 제3국이 나서서 강하게 목소리를 내는 것은 의아한 일이다"고 받아쳤다. 모두 서울에서 일어난 일이다.
구한말이나 해방공간이 연상되는 한반도 정세
2015년은 한반도 분단 70년이면서 2차대전에서 제국주의 세력을 패퇴시킨 승전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또 6.15 남북정상선언 발표 15주년이면서 한일협정 5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한다. 남북관계와 동아시아 정세에서 또 한 번의 고비가 되는 해이다. 2015년이 아시아의 평화와 한반도의 화해협력이 정착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이런 기회를 현실로 만드는 첫 단추는 남북관계 개선이다. 북한에서 김정은 정권의 출범 이후 '전략적 인내'라는 미국의 대북정책에는 변화가 없었다. 북한은 핵실험이나 전쟁위기 조성 등 정세를 긴장시키는 불안한 모습을 보여왔다. 다른 한편 북한은 2014년 10월 고위급 인사들을 남한에 보내 남북관계에 대통로를 열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긴장과 화해가 교차되는 남북관계에 대한 상황관리능력이다. 상황관리의 첫걸음은 대화를 위한 전략을 세우는 것이다. 대화가 신뢰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2015년 벽두부터 김정은 위원장은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했고 박근혜 대통령도 이를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남한은 '작은 통로'를 이야기하고 북한은 '대통로'를 이야기했지만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기대 여론도 높았다. 북한체제의 특성을 고려해 볼 때 정상회담이 남북문제를 가장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정상회담이 남북관계의 돌파구로서 역할을 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남북관계는 정체되고 있다. 남북정상회담의 꿈을 꾸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 보인다. 정부는 4월 한미 연합 군사훈련이 끝나면 남북관계가 개선될 거라는 낙관론을 펼쳤지만, 6.15 공동선언 15주년 남북공동행사는 사실상 무산됐고 당국 간 대화 통로도 막혀있는 상황이다.
아베가 말하는 아시아 민주주의 삼총사
그 사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됐던 날에 맞춰 미국을 방문했다. 일본은 미·일 가이드라인을 개정하여 자위대가 한반도는 물론 세계 어느 곳이든지 파견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 자위대가 우리의 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 지역에 우리의 동의 없이 진출함으로써 우리의 국익과 대치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공산화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에 면죄부를 주면서 재무장을 추구했던 1952년의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되살아나고 있다.
일본은 미·일 동맹과 함께 인도, 호주와 준(準)동맹을 추구하면서 일본, 호주, 인도를 '아시아 민주주의의 G3'라고 지칭하고 있다. 가치외교를 추구하면서 한국은 일본과 가치를 달리하고 있다는 듯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아베 외교의 현실이다. 아베에게 공산권의 확산을 막기 위한 요충지로서의 한반도의 가치는 이제 호주, 인도, 필리핀이 대신하고 있다. 일본이 이들 나라들과 연대에 앞장서서 미국의 대(對)중국 포위 전략을 수행하는 선두에 서겠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5월 9일 2차대전 승전 70주년 행사를 치렀다. 이 행사의 열병식에는 'RS-24 야르'(RS-24 Yars)라는 다탄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등장했다. 'RS-24 야르'는 미국의 미사일 방어체제(MD)를 무력화시키는 무기체계이다. 이에 발맞춰 5월 9일 북한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은 잠수함 발사 미사일(SLBM) 실험에 성공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러시아 전승 70주년 행사에 참석하진 않았지만, 북·러 양측은 전승 70주년 행사에 맞춰 미국의 MD 체제에 맞서는 미사일 공조를 취한 셈이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중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아베 총리에 대한 강경일변도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 대륙과 해양에서 신(新)실크로드를 만드는 거대한 구상을 실현에 옮기고 있다. 이에 대한 투자를 위해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설립을 주도하고 있다. 저성장의 굴레에 갇혀 있는 영국, 호주를 비롯한 미국의 동맹국가들은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AIIB 가입 의사를 밝혔다.
시진핑은 오는 9월 3일 2차대전 승전행사를 대대적으로 치르고 나서 미국을 방문할 계획이다. 아베도 8월 15일 아베 담화를 발표하여 아시아 태평양 전쟁과 식민지 지배와 침탈에서 벗어나 보통국가화를 지향하는 선언을 할 것이다.
지정학의 회귀와 지경학
남북관계는 정체되고 있는데 동아시아 정세는 격동하고 있다. 어느새 2015년은 벌써 다섯 달이 지났다.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한반도가 더 이상 대륙의 변방이나 해양의 변방이 아닌 유라시아와 태평양을 연결하는 교량 국가로서 발돋움 하겠다는 구상은 여전히 '구상' 수준에 머물러 있다. 성장의 한계에 직면해 있는 것은 유럽이나 아시아 국가뿐만 아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한국 입장에서는 환황해경제권과 환동해경제권을 중심으로 해서 북방 네트워크를 구축해 나가는 것이 새로운 성장동력을 창출하는 길이다. 동아시아에서 협력적 성장네트워크를 구축해 나가는 것이 새로운 성장동력을 창출하는 길이라는 데에는 이미 많은 전문가들이 공감하고 있다.
한반도 동남단 도시인 부산에서 시작하는 환동해경제권은 남한의 동부지역을 거쳐 나진·선봉 등 북한의 동해안을 따라 올라간 뒤, 중국과 러시아의 동북부지역으로 연결되는 거대한 산업경제권이다. 환황해경제권은 한반도의 서남단 도시인 목포와 여수에서 시작해서 충청, 인천 경기와 같은 한반도의 서부지역을 거쳐 북한의 서해안, 나아가 중국과 연결되는 산업경제권으로 일본의 일부 지역까지 포함하는 또 하나의 산업 경제권이다. 환동해경제권과 환황해경제권은 유라시아 대륙과 태평양을 연결시키는 '경제 허브'가 될 것이다.
아시아에서 중국과 러시아가 결탁해서 미·일동맹과 대립하는 현재 상황을 '지정학의 회귀'(return of geopolitics)라고 말하기도 한다. 구한말이나 해방공간과 같은 지정학의 위기가 다시 초래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환황해권과 환동해권은 지정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지경학'(geoeconomics)의 접근이다.
한반도의 분단상황은 대한민국을 대륙으로 향한 길이 막혀 있는 고립된 섬으로 만들고 있다. 분단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동남단에 위치한다는 지리적인 장점이 사라져버렸다. 동북아시아에서 교류와 협력이 활발해지고 나아가 유라시아 대륙과 태평양을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교류협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동아시아 지경학이다.
한미동맹과 한중협력이 충돌할 때
중국이 미국과 함께 아시아 지역에서 패권국가로 성장하고 있고, 한중 경제관계가 비약적으로 증대하고 있는 현실에서 동아시아의 지경학은 '지정학의 회귀'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다. 내수 확대정책을 펼치고 있는 중국의 경제정책은 한국이 북방으로 진출해서 유라시아 대륙과 태평양을 잇는 교량 국가로 발전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를 제공하고 있다.
안보와 경제발전에서 협력해온 미국과 한미관계를 더욱 성숙하게 발전시켜나가면서도, 중국과 전략적 협력의 폭을 확대하고, 아시아 국가들과 다자협력을 강화해나가야 하는 지략이 필요한 시대이다. 그 지략이 바로 '균형외교'이다.
균형외교란 한반도 문제와 관련된 국제관계에서 역내국가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평화와 협력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한미동맹과 한중협력 발전을 균형적으로 사고하며, 동시에 다자협력을 추구하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이 대립하고 협력하는 현재의 동아시아 상황에서 한국이 나아갈 길이 대해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견해가 많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단순한 사고라는 것도 분명하다. 안보와 경제가 충돌할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지략이 생략돼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중국을 왼쪽 날개로 하고, 미국을 오른쪽 날개로 삼아 21세기를 향한 대항해를 하기 위해서는 중심과 전략이 필요하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호혜적 이익을 중심으로 평화와 협력의 동아시아 미래를 개척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지경학적인 접근과 균형외교가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것이 바로 남북관계 개선이다.
한반도의 분단과 긴장은 동아시아에서 진행되는 갈등의 씨앗이다. 미국이 사드를 한반도에 배치하면 중국과 충돌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여기에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이 집단자위권을 행사하는 것은 동아시아 내 군사적 긴장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결국 한반도에서 남과 북의 화해는 미국과 동맹을 성숙하게 발전시키고 중국과 경제협력을 심화시키는 안전장치이다. 남북관계 개선이 없이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구호만을 가지고 유라시아와 태평양을 잇는 지경학의 외교를 추구하는 허브 국가로 도약할 수는 없다.
박 대통령, 미국 방문 연기 결정은 잘했지만…
하지만 현재의 남북관계는 긴장과 갈등의 연속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통일대박론을 이야기하고 통일준비위원회를 대규모로 구성했지만, 대북 전단 살포 문제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정부에게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구호는 어쩌면 능력 밖의 일, 힘에 부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나라가 온통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로 혼란스러운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방문이 연기됐다. 방미 연기 자체가 메르스의 공포를 확산시킬 수 있다는 방미강행론도 근거가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모처럼 민심을 제대로 읽는 결정을 한 점은 평가할만 하다. 물론 미국에 갔다고 해도 했다고 한들 ‘지정학의 회귀’라는 동아시아 상황을 지경학으로 접근해서 새로운 질서 변화에 한국이 대처하기를 기대할 수도 없었다. 4월 아베 총리의 방미와 비교만 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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