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헤지펀드와 삼성의 싸움이 시작됐다. 한국 정부도 엮일 수 있는 싸움이다. 투자자-국가 소송(ISD) 가능성 때문이다. 상당수 대기업의 대주주가 돼 있는 국민연금의 역할도 논란거리다. 헤지펀드가 한국 기업을 공격하는 빌미를 준 데는, 국민연금의 책임 방기도 한몫했다.
삼성물산 주식을 기습적으로 사들이며 '경영 참여'를 선언했던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법적 조치에 나섰다. 삼성그룹 지주회사 격인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임시주주총회가 다음달 17일에 예정돼 있다. 이날 주총에서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흡수 합병하는 걸 막겠다는 내용이다. 엘리엇은 9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 합병이 삼성물산 주주들의 이익에 반한다"며 "이 회사와 이사진에 대한 주주총회 결의 금지 가처분 소송을 제기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주가 기준으로 합병 비율 정하는 국내 법…ISD 가능성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비율은 '1 : 0.3500885'다. 삼성물산이 보유한 부동산과 주식만 해도 29조5058억 원어치다. 이런 회사를 8조6300여억 원으로 평가했다.
엘리엇은 이 대목을 파고 들었다. 삼성물산의 가치가 너무 낮게 평가돼 있어서 주주들이 손해를 봤다는 것이다. 따라서 합병에 반대한다는 것.
일리 있는 주장이다. 외국에선 자산을 기준으로 합병 비율을 정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방식대로라면,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흡수 합병하는 비용은 대폭 늘어난다. 하지만 국내 자본시장법은 다르다. 최근 주가를 기준으로 합병 비율을 정한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결정은 제일모직의 가치가 과대 평가돼 있고, 삼성물산의 가치가 과소 평가돼 있는 시점에 이뤄졌다. 삼성 측이 용의주도하게 시점을 골랐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법적으론 문제가 없다.
이 대목에서 ISD 변수가 등장한다. 엘리엇 측이 국내 자본시장법을 문제 삼으며,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주요 선진국과는 다른 법률인데, 외국 투자자에게 부당한 손해를 입힐 수 있다는 주장을 할 수 있다.
비상식적 주가에도 '나몰라라' 하는 2대 주주, 국민연금
국민연금의 소극적 행보를 문제 삼을 가능성도 있다. 국민연금은 삼성물산의 2대 주주다. 지분 9.79%를 갖고 있어서, 최근 지분 7.12%를 취득해 3대 주주가 된 엘리엇보다 지분율이 높다.
삼성물산 주가는 최근 1년 동안 5만1200~7만9700원 사이에 머물다 최근 하향 추세였다. 그리고 합병 결정 당시엔 연중 최저점에 근접했다. 보유한 자산 가치조차 반영하지 못한, 비상식적으로 낮은 주가가 장기간 유지된 셈. 그런데 대주주인 국민연금은 아무런 입장도 내지 않았다. 책임을 방기했다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그리고 국민연금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을 근거로, 한국 정부에 책임을 물을 가능성도 있다. 이건희·이재용 등 삼성 총수 일가가 이익을 얻고 삼성물산 주주들이 손해를 입은 데는, 정부의 책임 방기가 한몫했다는 논리다. 이런 주장과 함께 ISD를 걸 수 있다.
엘리엇, 삼성과 한국 정부 모두에게 돈 뜯을 수도
앞서 열거한 주장들이 얼마나 타당한지는 부차적인 문제다. 일단 ISD를 제기할 빌미가 된다는 게 중요하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국제통상위원회 소속 노주희 변호사도 같은 생각이다.
노 변호사는 "(헤지펀드가) 터무니없는 이유를 내세워서라도, 정부에게 ISD를 걸 수 있다"며 "그게 ISD의 무서운 점"이라고 설명했다. 만약 엘리엇이 ISD를 건다면 대상은 한국 정부다. 엘리엇 입장에선 꽃놀이 패다. 한편으론 삼성 및 국내 주식시장에서 이익을 얻는다. 다른 한편으론 한국 정부에게 돈을 요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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