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도시이자 대학의 도시인 하이델베르크(Heidelberg)
하이델베르크에는 1386년 세워져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루프레히트카를 대학교)가 있다. 이 대학교의 연구소에는 턱뼈 화석인 '하이델베르크인의 하악골'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 화석을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로 분류하고 있단다. 우리는 그런 사전 정보도 없이 이곳에서 오래 머물지 못해 비스마르크 광장과 하우프 거리를 지나가며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언저리만 배회하다가 과거 유인원 시절 우리 선조의 유골도 직접 보지 못하고 그냥 오고 말았다.
아직까지 유럽의 최초 나라인 독일에 적응하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보편적으로 독일의 대도시는 주차를 지하에 하도록 되어 있다. 네비게이션이 알려주는 데로 지하주차장에 들어간다. 그러나 나오는 입구를 알 수가 없다. 겨우 입구를 찾아 나왔으나 여기가 어딘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우선 여행자안내부스를 찾아서 지도부터 하나 집어 들어야 감이 잡힐 듯 한데…. 입구에서부터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고, 할 수 없이 지나가는 사람에게 비스마르크 광장이 어디냐고 묻는다. 방향감각을 몰라 어리둥절한 우리에게 참 친절하게 어느 쪽으로 가면된다고 안내해준다. 심지어 가던 길을 돌아서 광장이 보이는 곳까지 와서 저쪽이라고 설명해준다. 독일의 어느 도시에서도 항상 느꼈지만 독일인들은 참 친절하고 예의바르다. 그곳을 어떻게 가야하는지 소상히 알려주면서도 키도 짤딸막하고 어리숙한 동양인들에게 미소 건네는 걸 잊지 않는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찾아간 광장의 여행자안내부스에서 지도를 한 장 받아들고 도시를 여기저기 배회한다.
정확한 일정과 계획을 세우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운 도시를 이동하다보니, 여행계획 세우기, 길찾기, 밥 먹기, 숙소 정하기라는 매일 닥치는 당면과제로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길 찾는데 2~3시간, 밥 먹는데도 2~3시간, 심지어 숙소를 찾는데도 2~3시간을 헤맨다. 이쯤되면 어느 도시를 유유자적 구경하는 것은 거의 접어두어야 한다. 하이델베르크에서도 숙소를 찾느라 한참 시간을 허비한다. 한인 게스트하우스도 들러봤지만 신통치 않다.
결국 저녁 늦게까지 숙소를 못 찾고 헤매다가 찾아간 숙소는 호프(hof)를 같이 운영하는 곳이다. 독일뿐 아니라 유럽의 많은 숙소는 호프(hof)나 레스토랑을 같이 운영하는 곳이 많다. 술집에 들른 그 도시사람들의 느낌도 알 수 있고 문화도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숙소도 나쁘지 않다. 이날 독일 뮌헨의 축구경기가 있어서 숙소를 겸하고 있는 이 작은 술집에는 맥주를 마시며 축구응원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빗나간 슛에는 탄성에 이은 아쉬운 한숨이 이어지고, 기다리던 골이라도 들어갔을 땐 술집이 터져나갈 듯이 소리를 지른다. 우리도 그들과 함께 꼽사리라도 끼어서 응원열기를 더하고 싶었으나 이미 자리는 꽉 차 있고, 서 있는 사람들도 제법 많아서 나처럼 작은 동양인은 TV도 잘 안 보인다. 이방인처럼 그들의 열기에 살짝 미소만 지을 뿐. 경기가 종료되자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고 술집이 한산하다. 그제야 우리는 겨우 자리에 앉아 맥주 한잔을 시켜본다. 히야~ 하우스맥주인 흑맥주와 생맥주 모두 맛은 역시 일품이다. 술잔 가득 풍미 좋은 거품으로 덮혀 있던 하이델베르크의 맥주는 독일을 떠난 이후에도 여행 내내 그리움으로 남았다.
자유로운 문화의 도시 뮌헨(Munich)
뮌헨은 독일인들이 살고 싶은 도시 1위이기도 하고 이민자들이 살고 싶은 도시 1위로 꼽는 곳이기도 하다. 아마 자유롭고 차별과 편견이 적은 도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본 뮌헨은 편리하고 세련된 도시로서 문화의 도시답게 극장, 박물관, 거리 퍼포먼스 및 교회(또는 성당)가 가장 많은 도시였다. 우리도 오페라하우스를 지나 뮌헨 시내 중심지인 마리엔 광장에 도착한다. 20세기 초에 지어졌다는 네오고딕양식의 뾰족 사탑인 뮌헨 시청사(Rauthaus)가 눈에 들어온다. 시청사의 정교함에 감탄을 연말하는데 시계탑 앞엔 사람들이 북적북적하다. 처음엔 영문을 몰랐는데 시계탑에서 12시 정각에 인형들이 나와서 춤을 추는 시계탑 쇼를 펼치기 때문이라고. 1층과 2층으로 인형들이 춤을 추는데, 위쪽은 빌헬름 5세의 결혼식을, 아래쪽은 사육제 댄스를 재현하고 있다. 정교한 네오고딕양식의 시청사 만큼이나 시계탑쇼 역시 그 고장의 전통문화를 보여주는데 실제 인물들이 춤을 추는 것처럼 선명하고 정교하기는 매한가지다. 뮌헨은 문화의 도시답게 수많은 길거리 공연이 있다. 퍼포먼스 하는 사람부터 클래식 음악연주까지 귀와 눈을 즐겁게 하는 볼거리가 많아 쏘다니는 내내 행복감이 가득했다.
그동안 유럽의 비싼 물가 때문에 주로 대형슈퍼에서 먹을 것을 사고 아침, 저녁은 캠핑장에서 해먹고, 낮에는 길거리 음식만 먹으며 다녔다. 어른들이야 비싼 유럽물가를 생각하며 숙박비, 식비를 조금이라도 아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하지만, 초등 4학년인 둘째 가람이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먹는 조각피자나 소시지, 빵이 질리나보다. "우리도 식당에서 밥 좀 먹자"는 가람이의 생떼에 못 이긴 척 분위기 좋은 스파게티 집에 들어간다. 자주 먹는 것도 아니고 가끔 한번 먹는 거니 가격쯤은 접어두기로 한다. 분위기도 좋고 맛까지 있는 스파게티와 샐러드에 피자까지 우아하게 먹고 팁을 달라는 점원에게 5유로나 팁을 줘서 남편에게 핀잔을 듣기도 했다.
이날 비싼 유럽물가를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꼭 하고야 마는 둘째와 원하는 게 있어도 참고 주위상황과 어른들 얘기에 순종하는 착한 큰딸에게 말해줬다. "가람이 봐!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걸 말하잖아. 그래야 그걸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아는 거고, 안 되더라도 부딪치면서 떼도 써보고 아양도 떨어보면서 서로의 타협점을 찾는 거야!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건 참고 넘어 가는 게 아니라 요구해야 얻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는 거야" 고개를 심하게 끄덕이는 큰딸은 앞으로 자신의 욕망을 잘 표현할까? 궁금해진다.
로만틱가도의 중심에 있는 중세도시 로텐부르크(Rotenburg)
도시 전체가 성곽으로 둘러싸여 중세의 자취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곳.
독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로맨틱가도(뷔르츠 부르크에서 퓌센으로 이어지는 360km의 도로로 독일 오스트리아 이태리까지 연결되어 중세부터 교역을 담당하는 도로였다고 함)의 중심지이고 중세의 보석이라고 불리는 로텐부르크는 첫인상부터 달랐다. 4~5km에 달하는 중세의 성곽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그 성곽을 따라 한참을 걷다보면 온통 붉은색으로 장식한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도시를 만나게 된다.
성을 지키기 위해 매일같이 저 좁은 구멍으로 적들이 오는지를 점검했을 병사들의 모습도 보이고, 정찰이나 전쟁을 위해 도시를 떠났다가 돌아오는 군사에게 성문을 열어주는 문지기의 모습도 보이고, 말을 타고 돌아온 군사가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도 눈에 선하게 보인다. 골목 구석을 누비다보면 나도 어느덧 시간을 거슬러 중세의 한 도시에 서 있는 모습이 오버랩된다. 이중으로 된 성문이 열리고 오랜 시간 집을 비워 반겨줄 식솔들을 만나게 될 집으로 들어가는 대문도 보인다. 말을 타고 그대로 성문을 통과하고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집의 대문은 사람의 키를 훨씬 뛰어넘게 높기만 하다. 조각난 돌들로 빼곡히 채운 가도는 그 당시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들어 갔을지를 실감하게 한다.
이런 아기자기함과 고풍스러운 매력에 푹 파진 탓인지 아이들은 신이 났다. 점프 샷을 찍어달라고 족히 20~30번은 넘게 뛰기를 반복했고 나의 문제인지 애들의 점프 실럭의 문제인지 겨우 이정도의 사진에 만족한다. 그리고 돌아온 숙소의 캠핑장 내 캐빈에서 맛있게 구운 스테이크와 멋지게 장식한 애들의 상차림, 그리고 싸한 와인 한잔에 중세의 가족파티를 하는양 행복한 중세여행을 마무리한다.
우연히 들렀지만 고즈넉함에 푹 빠져버린 린다우(Lindau)
독일 베르히데스가덴에서 스위스로 가는 길에 해는 뉘엿뉘엿 저물고 숙소를 찾아야 한다.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차에서 밤을 새울 수도 있었다. 스위스보다는 물가가 싼 독일에서 차에 기름도 가득 채우고 하루밤 자고 넘어가자하며 기대 없이 들렀던 곳 린다우(Lindau).
그러나 린다우는 보덴세라는 큰 호수가 있고 행정구역상 독일이지만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국경에 인접해 있고 잔잔하고 고즈넉한 정겨움을 가진 아름다운 도시였다.
저녁 느지막이 도착한 이곳에서는 숙소잡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는데 때 마침 그곳 휴일과 겹쳐 어렵게 잡은 유스호스텔도 꽤 비싼 가격을 지불했다. 투덜대며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조식을 먹으면서 이것저것 살펴보니 전날 저녁부터 다음날 조식과 점심 도시락까지 챙겨갈 수 있도록 해놓은 곳이었다. 또 호스텔 내에 온갖 시설(축구, 농구, 당구, 탁구, 볼링 등)이 갖춰져 있어서 몸만 와서 종일 놀다가는 휴양지였다. 저녁과 아침에 점심 도시락까지 챙겨준다면 그 정도 가격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전날은 좀 화도 났는데….
우리는 전날 너무 늦게 도착해서 저녁도 못 먹고 시설도 못 이용한 것이 아쉬워서 다음날 아침 풀밭 공놀이로 겨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푸른 하늘과 초록잔디에 여기 저기 마치 조경처럼 세워진 놀이터와 미니 축구장은 인공시설이 아니라 오랜 시간 자연이 선물한 것처럼 그렇게 자연과 함께 동화되고 아이들도 어느덧 자연의 일부가 되어간다.
린다우의 고즈넉함을 한껏 보여준 보덴세 호수는 아직도 그 편안함이 눈에 떠오른다. 따사로운 햇빛에 반사된 물빛과 그림책에 항상 등장하는 뭉게구름은 엽서의 한 장면이 되고, 호수인데도 자그마한 모래해변을 가진 곳에서는 제 집인양 누워 낮잠을 자거나 책을 보는 사람들이 보인다. 나도 한가롭게 모래해변에서 종일 잠도 자고 책도 좀 읽고 호수를 여기저기 떠다니는 오리들에도 시선을 빼앗기고 싶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갈 길이 바쁜 여행객, 호수를 한바퀴 산책하는 것으로 마음을 달랜다.
하이델베르크를 지나 뮌헨, 로텐베르크 그리고 베르히데스 가덴을 거쳐 린다우까지 독일의모든 도시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색깔과 각자의 자태를 발산하며 빛나고 있었다. 또 독일의 어느 도시를 막론하고 깨끗하고 편안했으며, 사람들은 친절하고 오래된 학교와 고성들은 감탄사가 터져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독일의 그 유명한 아우토반은 통행료 없이 어느 곳이나 오고갈 수 있게 잘 설계되어 있었고 특별히 다른 도로들과 달라 보이지 않는데도 나름의 규칙에 따라 최고의 속도감을 자랑하는 차들이 우리 옆을 광속으로 질주한다. 광속질주에도 불구하고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는다. 왜일까? 그것은 그들의 잘 설계된 도로 때문만은 아닌 듯 했다. 규칙을 정해놓고 정해진 틀 안에서는 최대한의 자유를 허용하는 그들의 태도가 오히려 위험 신호를 줄이고 지나가는 관광객에게 마저 편안함을 주는 건 아니었을까? 심지어 도시 간 이동을 하며 스치듯이 눈에 들어온 독일 시골의 모습마저도 여유롭고 편안해 보였던 건 독일을 바라보는 우리만의 착각이었을까?
- 가온가람이 가족 세계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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