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세력이 세상을 뒤집으려면 대략 네 가지가 필요할 것이다. 물론 첫째는 비전이다. 세상을 뒤집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그렇게 뒤집어서 만들고자 하는 다른 세상은 무엇인가 하는 설득력 있는 그림과 간절함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비전이 조직 내부의 강한 공감대를 거쳐 외부로 확산되어 나갈 때 그 비전은 마르크스도 말한 바 '물질적 힘'이 될 것이다.
둘째는 비전을 뒷받침할 실력이다. 여기에는 조직력, 기획력, 정책 능력 등이 모두 포함될 것인데, 실은 비전이 뚜렷하다면 당분간 '이 없으면 잇몸'으로도 해나갈 수 있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시초의 인적 물적 자산이 태부족한 소수 세력이라면 제한된 자원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해야 물질적 힘을 현실화 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셋째는 꾸준하고 과감한 실천인데, 이러한 비전과 실력을 인정받을 계기와 과정을 의미한다. 넷째는 이른바 '운때'가 맞아야 한다. 그러나 세상을 뒤집는 것을 선거나 봉기 같은 어떤 일회적 이벤트로만 보지 않는다면 운때 역시 결정적인 것은 아니며 비전과 실력, 실천이 충만하다면 운때는 수시로 찾아올 것 같다.
얼뜨기 정치평론가도 할 법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세상을 뒤집는 정당이라는 녹색당의 다짐을 진담으로 받아보고자 함이다. 그리고 녹색당은 세상을 뒤집을 준비를 어느 정도 하고 있는지, 녹색당의 비전과 실력과 실천은 얼마만큼 자라있는지 물어볼 때도 되었겠다는 것이다.
녹색당의 작지 않은 성과
아직 녹색당은 작은, 그러나 자라고 있는 당이며 2012년 3월 전국당을 창당한 이래 3년 안에 적지 않은 일들을 이룬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당원의 꾸준한 성장세가 그렇다. 2015년 5월 중순 현재 당비를 납부하는 녹색당원은 6646명이라고 하는데, 진성 당원 비율은 한국의 어느 정당보다도 높을 것이다. 젊은 당원과 여성 당원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도 당의 활력이나 미래 전망에 긍정적일 측면이다.
다음으로, 법적 투쟁을 통해 당명을 꿋꿋하게 지켜낸 것도 높게 평가할 일이다. 녹색당만이 헌법재판소에 위헌 소송을 제기한 것은 아니지만, 다시 당을 만들 때 같은 당명을 쓸 수 있도록 하는 판결을 이끌어 낸 것은 당명 회복 투쟁에 큰 가치를 부여한 녹색당에게 많은 자긍심이 되었을 것이다.
탈핵 의제, 생명권 의제, 기본 소득 의제 등 당원이 참여하는 정책 의제 모임을 통해 상향식 당론을 만들고 당원들의 활동 기회를 부여한 것이나, 이러한 방식으로 농업 정책과 인권 정책을 생산한 것도 녹색당에게 뒷심을 보태는 일이다. 적잖은 논쟁과 진통을 거치면서 지난 3월의 당 대회에서 기본 소득을 당의 주요 정책으로 채택한 과정은 오히려 녹색당의 강점으로 보인다.
남녀 공동 대표제, 지역과 부문이 조직 구성과 운영에서 채택한 자율주의 원칙과 대의원 전원을 추첨으로 선출하는 추첨 민주주의 등이 실험을 넘어 전통으로 안착되고 있는 것도 성과다. 녹색당원들이 탈핵 운동 등 여러 현장에서 보여주는 실천들은 너무 당연한 것이어서 따로 성과라고 할 수도 없겠다.
녹색에는 좌우가 없다?
그러나 창당 4년차를 맞는, 그리고 세 번째의 전국 선거를 준비하고 있는 녹색당을 바깥에서 볼 때 느끼는 아쉬움 또는 불편함도 없지 않다. 게 중에는 녹색당의 주요 활동가들이나 평당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접하게 되는 태도나 입장에 관한 부분도 포함된다. 대표적인 게 "녹색에 좌우가 어디 있으며, 탈핵에 진보 보수가 어디 있느냐"는 말이다.
그동안 세계 여러 곳의 녹색 정치가 기득권 우파뿐 아니라 고답적인 좌파의 정치를 질타하며 등장한 사실과 그 가치를 인정하더라도, 역으로 좌와 우의 녹색이 동일한 것인지 그리고 찰스 황태자의 녹색과 영국 녹색당 캐롤린 루카스의 녹색이 동일한 것인지 하는 질문도 가능하고 필요한 것이다.
실은 한국 사회에서 지난 십수 년간 자본주의 체제 극복의 필요성과 방도를 여느 좌파 논자들보다 더 분명히 그리고 진지하게 이야기해 온 이들은 다름 아닌 <녹색평론>같은 매체와 생태주의 활동가들이었다. 녹색 정치를 지향하는 정당이라면 무엇을 지키고 그것을 위해 누구와 싸우고자 하는 것인지를 더욱 분명히 해야 한다.
기존의 좌파와 우파, 보수와 진보를 한 번에 낡은 것으로 재단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편리하고 당 내의 피곤한 논쟁을 피할 방법일 수 있겠으나, 녹색당 스스로에게 언제든 확인해야 할 질문까지 희석해서는 곤란할 것 같다.
녹색당원들이 스스로를 규정하면서 자주 쓰인 "생애 첫 정당"의 당원이라는 표현도, 생애 처음으로 가입한 정당이기 때문에 갖는 긍지와 함께 함부로 다른 당과 연합하거나 노선을 바꾸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임을 십분 이해하면서도 조금은 불편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생애 두 번째 세 번째 당적을 갖게 되는 이들이더라도 일부 정치 철새들이 아닌 다음에야 매우 깊은 고민 끝에 행한 선택일 경우가 많을 것이거니와, 녹색당 이전에 힘들게 대안/진보 정당 운동을 시작하고 희생하고자 한 이들의 선택 역시 못지않게 존중받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순수주의가 정치적 선민의식이 되어서도 곤란할 것 같다.
또 하나 아쉬움은 녹색당 내 노선 논쟁의 부족이다. 지난 해 대표단 선거에서 남성 여성 명부 모두 두세 명씩의 후보가 출마하면서 모처럼 묵혀두었던 여러 주제들에 대한 논의가 벌어졌던 것이 그나마 이례적으로 느껴질 만큼 평소에는 노선 경쟁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도 기본 소득 정책 논쟁은 의미가 있었다.
다른 정당들에서 흔히 보이는 분립과 갈등만을 양산하는 퇴행적 정파 구도에 대한 경계는 분명히 필요하지만, 한국의 녹색당은 다른 나라의 녹색당이나 한국의 다른 진보정당들에 비해서도 너무 조용한 편이다. 풀뿌리 활동가들이 이끌고 착한 당원들은 순순히 따라가기만 하는 당은 재미도 덜하고, 미래를 열어 갈 역량 양성을 위해서라도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착한 정당을 넘어 현실 정치를 준비해야
마지막 아쉬움이자 동시에 바람은 현실 정치에 대한 현실의 도전을 실제로 준비하고 있느냐 하는 부분이다. 다른 정당에게 별로 해로울 것도 없는 시민단체처럼 취급되는 녹색당의 위상은 당 바깥에서도 안에서도 올해까지여야 할 것 같다. 창당 직후 바로 맞은 총선과 2년 후 치른 지방 선거는 녹색당의 독자성과 자생력을 보여주었지만, 두 번째 맞게 될 전국 중앙 선거는 현실 정치권의 문지방을 넘을 수 있느냐는 객관적 시험대가 될 것이다.
정당 득표 3%라는 목표를 생각해서나 전국적으로 펼치는 조직 선거를 위해서나 일정한 수의 지역구 후보를 출마시킬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쉽게 말해 내년 총선에서 녹색당이 20명 이상의 지역구 후보를 내는 것이 현실정치에 정말 도전할 것인지를 평가하는 한 기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21명의 지역구 후보를 출마시켜 1.18%의 전국 평균 득표를 얻고, 2002년 지방 선거와 2004년 총선에서 도약했다.
이런 저런 참견 섞인 불만을 늘어놓았으나, 녹색당이 성공하는 만큼 한국 전체의 녹색 정치도 성장할 것이고 녹색당이 어떻게 성공하느냐에 따라 어떠한 깊이와 너비를 가진 녹색 정치가 실현될 것인지도 좌우될 것이기에 이런 정도의 비판은 양해될 것으로 생각한다.
녹색당이 앞서의 현수막과 함께 내건 다른 현수막은 "한국에도 녹색당이 있습니다"라는 문구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정당과 존재감을 소심하게 웅변하는 정당, 두 문구의 사이의 간극은 녹색당 스스로 채워가야 할 것이다. 세상을 뒤집을 녹색당을 기대한다.
(김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은 노동당 당원입니다.)
'초록發光'은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으로 기획한 연재입니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는 이 연재를 통해서 한국 사회의 현재를 '초록의 시선'으로 읽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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