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일 오전 7시 30분 국회 귀빈식당에서는 집권당과 정부 핵심 인사들이 주축이 된 외교·안보 대책 긴급 당정협의가 진행됐다. 이어 며칠 후인 4일에는 국회 외교통일위원회가 외교부 장관을 출석시킨 가운데 당면한 외교 현안에 대해 집중 추궁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 변화가 심상치 않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의 급격한 정세 변화는 '다원적 고차 방정식'으로 불릴 정도로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며 전개되고 있어 대응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만도 없고, 또 우리만 직면하고 있는 문제도 아니다.
우선 이 방정식을 잘 들여다보면 몇 가지 주요 변수가 발견되는데, '경제'와 '안보', 그리고 '역사'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들 변수들은 '일대일로'(一帶一路)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사드'(THAAD),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양 분쟁 등의 이슈로 구체화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와 경제, 안보를 융합시키는 중국의 풀이법
그렇다면 중국은 이 방정식을 지금 어떻게 풀어가고 있을까?
올해 '역사'와 관련하여 몇 가지 중요한 행사가 있다. 지난 4월 23일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반둥회의'(Bandung Conference)가 그 중의 하나인데, 올해로 60주년을 맞으며 대규모 행사로 치러졌다. 반둥회의는 냉전 시절 미국과 소련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대 진영에 속하지 않은 신흥독립국들이 연대를 모색하며 개최했던 역사적인 회의로서 여기에 속한 국가들은 '제3세계' 혹은 '비동맹그룹'이라고 불리었다.
중국에서는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대규모 인사를 이끌고 직접 회의에 참석했는데, 중국의 이러한 외교 행보에는 반둥회의의 또 다른 이름이 '아시아-아프리카 회의'(Asian–African Conference)라는 점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중국은 지금 지속적인 경제성장에 필요한 해외 시장 개척과 자원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데, 그 역점 지역이 바로 중국의 앞마당인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 주석이 직접 반둥회의에 참석하여 많은 아시아, 아프리카 정상들과 교류를 하고 우호관계를 구축한 것은 매우 전략적인 행보였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시 주석은 이번 회의 기간에 전체 일정 이외에도 짐바브웨와 캄보디아, 미얀마, 이란, 일본 등의 정상들과 개별 정상회담을 진행하는 등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펼쳤다.
그런데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하는 것은 시진핑 주석이 반둥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인도네시아로 가기 전에 들렀던 파키스탄에서의 국빈 방문이다. 중국은 파키스탄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는 가운데 460억 달러(약 50조 원) 규모의 '경제 회랑'을 구축하기로 합의하는 등 엄청난 자금을 지원하기로 했고, 그 대가로 40년간 파키스탄의 과다르항 운영권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과다르항은 중국이 최근 역점 추진하고 있는 '일대일로' 사업의 한 축인 해상 실크로드 건설과 독자적인 에너지 수송 노선을 확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전략 거점이다. 과다르항을 포함한 파키스탄과의 경제회랑이 계획대로 건설된다면, 중국은 해양 분쟁 등으로 골치 아픈 남중국해를 거치지 않고도 중동으로부터 안정적으로 원유를 들여올 수 있게 된다. 즉 중국은 파키스탄과의 이번 합의를 통해 '경제'와 에너지 '안보'를 모두 챙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다. 이번 주 토요일인 9일에는 러시아에서 또 하나의 '역사'적 행사가 진행되는데, 바로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제2차 세계대전 승전 70주년 기념행사이다. 70년 전 파시스트에 대항하여 러시아를 비롯한 연합국이 승리한 날을 기념하는 것으로 이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등 이념에 관계없이 전 인류적으로 기념해야 할 의미 있는 행사임에 틀림없다. 이에 따라 유엔 반기문 사무총장도 참석할 예정이며, 중국에서는 또 다시 시진핑 주석이 직접 행사에 참석한다. 승전국으로서의 역사적 정체성을 강조하면서도 일대일로 사업과 안보 문제에 있어 중요한 파트너인 러시아와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계산이다.
그리고 이번 시진핑 방문 일정에서 우리가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러시아 방문 전후로 계획되어 있는 카자흐스탄과 벨라루스에 대한 국빈 방문이다. 이 두 국가 또한 '일대일로' 사업에 있어 중요한 전략 거점인데, 카자흐스탄은 '신 실크로드'의 철로가 중동과 러시아로 갈라지는 요충지가 될 곳이며, 벨라루스는 러시아까지 들어온 철로를 유럽 지역과 이어주는 통로 역할을 한다. 이에 따라 이 두 국가에 대해 중국이 또 어떤 협력 방안을 제시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와 같이 중국은 역사와 경제, 안보 변수를 적절히 융합하며 다원적 고차 방정식을 풀어가고 있다. 반면, 미국과 일본은 역사 변수의 비중을 최대한 낮추고, 안보 변수의 비중을 최대한 끌어 올리는 양상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미국 방문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듯, 오바마 행정부는 아베 정부에게 역사의 짐을 덜어주고, 대신 아베 정부는 오바마 행정부의 안보 부담의 짐을 덜어주는 형식으로 서로 윈-윈을 꾀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즉, 미국과 일본에서는 각각 '아시아로의 이동'(Pivot to Asia)과 '적극적 평화주의'(積極的平和主義)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결국은 알맹이가 비슷한 하나의 방정식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미일 간에 진행되고 있는 TPP 협상이나 후텐마(普天間) 미군기지 이전 문제도 이러한 방정식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조만간 타결될 것으로 전망된다.
우리에게 시급한 과제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일본의 우(右) 편향적 역사 인식에 대해서는 격하게 비난하면서도, 이 부분에 있어 인식을 같이 하는 중국이나 북한과는 공조를 거부하고 있다. 심지어 마땅히 함께 기념해야 할 역사적 행사에도 참석을 꺼리면서 우리의 역사적 정체성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 반둥회의에는 대통령 대신에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참가하는가 하면, 러시아에서 열리는 승전 기념행사에는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여당 의원이 참석하는 정도다.
심지어 북한이 반둥회의와 러시아 기념행사에 헌법상 국가수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보낸 것과도 비교가 된다. 우리 정부는 9월 중국에서 열리는 항일전승 기념행사에도 대통령 참석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한중 FTA를 서둘러 체결하면서 경제 문제를 중시하는 모습을 보이려 했지만, AIIB 가입 과정이나 '일대일로' 사업에 대한 고민 수준을 보면 과연 경제 활로를 찾을 의지가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남북관계가 꽉 막힌 상황에서 북·중 교역으로 중국만 배부르게 해 주고 있는 상황을 보면 한숨만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 우리에겐 세 가지 시급한 과제가 있다. 하나는 복잡한 다원 고차 방정식에서 '역사'와 '경제', '안보'의 비중을 어떻게 둘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연이은 인사(人事) 악재로 인해 총체적 난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국내 정치를 안정시켜 외교·안보 컨트롤 타워가 제 역할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통해 외교 문제에 대해 보다 입체적이고 체계적인 접근이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세 번째는 우리의 방정식에서 남북 관계 변수를 하루 빨리 상수(常數)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최근 민간단체의 인도적 대북 지원 사업이 정부로부터 승인을 받고, 6.15 남북 공동행사 개최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8.15 공동 행사 및 지자체의 남북교류 사업 등도 적극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얼마 전 외교부 장관의 "축복 외교" 발언이 도마에 올랐는데, 긍정적인 생각을 갖는 것은 좋지만 근거 없는 긍정은 곧 재앙이 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허재철 교수는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정치외교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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