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들이 강제징용됐던 일본의 산업 시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이 시설이 강제징용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겠다는 입장이지만 등재를 막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 <교도통신>은 4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산하의 민간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메이지(明治)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인 규슈·야마구치 지역의 23개 근대 산업시설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도록 유네스코에 권고했다고 보도했다.
세계문화유산 등록 여부는 세계유산위원회(WHC, World Heritage Committee)에서 최종 결정을 내린다. 그런데 그 전에 민간기구이자 WHC의 자문기구인 ICOMOS의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ICOMOS는 각국이 신청한 문화재를 심사해 등재, 등재 불가, 추가자료 요구 등의 결정을 내린다.
ICOMOS의 결정이 법적인 구속력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이 기구가 전문가들로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100% 독립성이 보장된 민간기구이기 때문에 이들의 결정이 WHC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현실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지난 10년 동안 ICOMOS의 등재 권고가 WHC에서 통과되지 않은 경우는 1건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는 이스라엘-아랍국가 간 영토 문제가 걸린 건이었는데, ICOMOS에서 등재를 하라는 권고를 했음에도 WHC에서는 영토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등재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10년 동안 단 1건의 반대밖에 없었을 만큼 WHC가 ICOMOS의 결정을 존중하고 따른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따라서 일본의 근대 유산들도 큰 무리 없이 WHC 회의를 통과할 수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앞서 일본 정부는 2014년 1월 후쿠오카(福岡)현 기타큐슈(北九州)의 야하타(八幡)제철소, 나가사키(長崎)현의 나가사키 조선소(미쓰비시 중공업) 등 현재 가동 중인 시설과 미쓰비시 해저 탄광이 있던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 등 총 23개 시설을 산업유산으로 등재 신청했다. 최종 결정은 오는 6월말~7월초에 독일에서 열리는 제39회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이뤄질 예정이다.
정부, "강제 노동 문제 제기할 것"
정부는 이에 대해 "그간 정부는 WHC 소속 21개 위원국 중 우리와 일본을 제외한 19개국에 강제 노동 문제를 강력히, 지속적으로 제기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밝혔다.
외교부 당국자는 "한국인 5만7900명이 동원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제기함에 따라 위원국들 사이에 '쉽게 처리할 일만은 아니'라는 공감대가 형성됐다"면서 "인도의 경우 한국 입장이 타당하다는 반응이었고, 단순히 문화부에서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 보다 큰 관점에서 결정해야 할 사안이라는 입장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위원국들은 ICOMOS의 권고 사항과 한국인 강제 노동 문제 등을 인식하고 있으나 한국과 일본 모두와 우방이고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상황이라서 (선택에) 어려워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어떠한 식으로든 우리의 우려를 반영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그간 위원국들의 의견을 청취해서 몇 가지 복안을 마련 중에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구체적인 전략에 대해서는 "협상 전략"이라며 말을 아꼈다.
일본의 강제징용처럼 비윤리적인 행위를 상징하는 것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적이 있다. 수십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에 대해 외교부 당국자는 "학자·언론인들이 쓰는 부의 유산(Negative Heritage)이란 개념인데, 2차 세계대전 시 유대인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범죄가 이루어진 것이 앞으로 반복되지 않도록 기억하자는 차원에서 등재가 됐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강제 노동의 비인간적이고 반인륜적인 측면을 전면에 내세워 해당 시설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막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오히려 해당 시설에서 일어났던 행위를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라도 세계문화유산 등재 자체를 막는 것 보다는, 이 시설에서 어떤 행위가 벌어졌는지 정확하게 명시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 것이 효과적인 전략이라는 지적이다.
이에 정부가 해당 시설에서 강제징용이 있었다는 사실을 명시하면 문화유산 등재를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인지, 아니면 등재 자체에 반대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 이 당국자는 "우리의 우려를 반영하는 데는 여러 가지 선택사항이 있을 수 있다"면서 구체적인 답변을 피했다.
다만 그는 "위원국들에게 일본의 등재 신청서가 공개됐는데 그 신청서에서는 강제 노동에 대한 내용이 없었다"고 밝혔다. 정부가 해당 시설의 문화유산 등재 철회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단, '강제징용'을 했던 시설이라는 내용을 명시하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풀어낼 여지를 남겨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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