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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찾아 중국이 이용하는 광개토태왕비

[압록·두만에서 바라본 북한의 오늘]<5>

지난 8월 초순 한국의 북한전문가들이 8박9일 동안 압록강 서쪽 끝 단동(丹東)에서 두만강 동쪽 끝 방천(防川)까지 북·중 국경 1376.5㎞, 3000리가 넘는 거리를 답사하면서 강 건너 북한 땅의 사정을 보고 듣고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이번 답사는 북한 전문가들이 그 동안 문헌자료와 현장경험을 통해서 축적해온 지식과 눈앞의 현실을 대조하고 검증하는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답사단의 분석과 평가는 정보와 자료로서 가치가 적지 않습니다. <프레시안>은 답사단의 일원이었던 황재옥 박사가 이번 현장답사에서 보고 듣고 느낀 내용들을 정리한 글을 게재합니다. <편집자>


[셋째 날 - 오전] 지안의 고구려 유적지, 그리고 동북공정

일본의 광개토태왕비 비문(碑文) 조작(造作)

8월 5일 오전 지안(集安)의 고구려 유적지를 답사했다. 버스에 오르기 전, 이른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호텔 건너편 공원에는 중국인 남녀노소가 어울려 춤을 추듯이 아침 체조를 하고 있었다. 아마 태극권(太極拳)이라는 일종의 무술체조가 아닌가 싶었다. 중국 도시를 방문할 때 아침에 가끔 볼 수 있는 광경으로, 가늘고 간드러진 음악소리가 '내가 지금 중국에 있구나'라고 일깨워준다.

중국 당국은 2002년 동북공정 이후 지안 시의 국내성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호텔을 나와 광개토태왕비(廣開土太王碑)로 가는 길에, 도시 중심부에서도 성(城)의 일부로 보이는 돌 축조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 같은 돌 축조물을 전날 저녁 식당을 찾아가는 길목에서도 보았었다. 이것이 고구려 성곽의 일부인 이유는 중국의 대표 건축물인 만리장성처럼 벽돌로 쌓은 전성(磚城)이 아니라 석성(石城)이기 때문이다.

지안은 고구려 제2대 유리왕 때인 서기 3년부터 209년 산상왕이 환도성(丸都城)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206년 동안 고구려의 수도였다. 고구려는 이곳을 중심으로 영토를 넓히고 문화를 발달시켰다. 그러기에 석성의 흔적들이 여기저기서 눈에 띄었다.

광개토태왕비 사적지 입구에는 이곳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는 푯말이 있었다. 넓고 깨끗하게 조성된 길을 따라 들어가니 관광객들이 이미 많이 와 있었다. 중국말, 일본말, 한국말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한국인에게만 인기 있는 관광지는 아닌 모양이다. 우리 문화재를 중국이 자신의 관광자원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었다. 이런 식의 보호·관리 행위가 2002년부터 본격화하기 시작한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일환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니 가슴이 답답했다.

중국 당국은 2002년 동북공정을 본격화한 이후 2004년 지안의 고구려 유적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우리의 역사 문화재인 것은 분명하지만 남의 영토 안에 있고, 중국이 이른바 '실효적 지배'를 주장하고 있어 대부분의 고구려 유적이 중국의 사적지가 되고 있었다. 더 나아가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언짢았다.

전형적인 중국식 정자 안에 광개토태왕비가 모셔져 있었다. 보호용 정자에서 중국냄새가 물씬 풍겨 나옴에도 불구하고, 사진으로 봤던 이미지보다 더 크고 웅장함에 매우 놀랐다. 보호 차원이라 하지만, 정자 안이 아닌 푸른 하늘 아래 버티고 서있었더라면 훨씬 성스럽고 더욱 웅장해 보였을 것이다. 이 비석은 높이 6.39m로 동양에서 가장 큰 비석이고 금석문 연구에서도 귀중한 자료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 광개토태왕비. ⓒ황재옥

고구려 19대왕인 광개토태왕(374~412)은 3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광개토태왕비는 광개토태왕이 사망한 2년 후인 414년에 건립됐다. 98세까지 장수한 아들 장수왕(長壽王)이 선왕의 공적을 새겨 후세에 알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고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1775개의 글자 중 현재까지 1600자가 해독됐다고 안내인은 설명했다.

광개토태왕비의 비문은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1단에는 고구려 역사로부터 시작하여 광개토태왕의 정통성이 설명되어 있다. 2단에는 광개토태왕의 재임 중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3단에는 광개토태왕 사후 장수왕과 고구려의 귀족들이 광개토태왕을 존경하여 그의 묘를 지키려고 했던 마음가짐이 기록되어 있다.

광개토태왕비의 발견과 관련하여 중요한 점은 첫째, 그것이 146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묻혀 있다가 1882년 일본군에 의해 처음 발견됐다는 사실이다. 둘째, 일본군 참모본부가 무슨 연구를 했는지는 몰라도 7년간이나 연구를 한 뒤 발굴 사실을 1889년에야 비로소 공표했다는 사실이다. 우리 역사 문화재가 일본에 의해 발굴되고 7년간의 '연구'를 거치는 동안에 역사왜곡이라는 문제가 생겼다고 할 수 있다. 비석을 최초로 발견하고 탁본을 한 일본이 이 비문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비문에 손을 댔다는 것은 한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재일교포 역사학자였던 이진희 전 와코(和光)대학 교수가 아니었더라면, 아직도 우리는 일본이 광개토태왕비 비문을 왜곡·조작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뻔 했다. 이진희 박사는 '일본이 광개토태왕비의 비문 내용을 슬쩍 바꿔치기 했다'고 주장하면서, 그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일본이 한반도 진출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글자를 비문에 첨가했다. 그러한 작업은 비석의 표면에 석회(石灰)를 바르고 석회표면에 글자를 써넣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비석 속의 불리한 글자 중 고칠 수 있는 것은 고쳤지만, 고치기 어려운 것은 아예 글자를 뭉개는 식으로 삭제했다."

이에 대해 일본은 자신들은 역사를 왜곡하지 않았다고 항변했다. 일본의 일부 연구자는, 1880년 전후 이미 중국에서 발견되어 비문 탁본이 제작되었고 해독되었기 때문에 탁본이 널리 알려져 있는 단계에서 비문을 고쳐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론을 제기했다.

광개토태왕비는 130년 전에 일본이 발굴해서 비문을 왜곡·조작했고, 지금은 중국이 마치 자기네 역사 문화재인 양 보호하면서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던 1880년대 초 우리 조상들은 일·청·러·미 등 열강들의 등살에 시달리느라 만주벌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중국이 우리 역사문화재를 자기네 역사문화재로 유네스코에 등재할 때는 알면서도 당했다. 이 같은 일련의 사건들이 마음을 우울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위대한 선조, 광개토태왕의 업적과 명성에 걸 맞는 비석의 웅장함과 당당함은 우리 후손들의 자긍심을 채워 주기에 충분했다.

장군총과 오회분

광개토태왕비를 둘러보고 나서 장군총(將軍塚)으로 향했다. 장군총이라 부르는 것은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장군의 지위는 되어야 이러한 규모의 무덤을 만들 수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장군총이라 부른다고 한다.

▲ 장군총 전경. ⓒ황재옥

돌로 각 지게 만들어진 장군총이 눈에 들어오면서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떠올랐다. 사막 한가운데 세워진 피라미드와 만주벌판에 세워진 장군총이 주는 감동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장군총에서는 만주대륙의 풀 냄새, 압록강의 물 냄새가 배어 나오는 듯 했다. 장군총 가장자리와 중간 중간에 모로 세워 놓은 장방형의 거대한 돌들은 돌무덤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지지대로 받쳐 놓은 것이라 한다. 그런데 이렇게 큰 돌들을 어디서 구해서, 어떻게 여기까지 운반했는지 궁금했다. 옛 우리 조상들의 대단한 지혜와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에는 무덤 안을 구경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다. 군데군데 무너진 석축(石築)을 발견할 수 있었다. 관리만 잘 될 수 있다면 들어가지 못하게 한들 괘념치 않을 것이다. 광개토태왕비와 장군총은 고구려의 위풍당당한 기상과 기량을 후세에 전하고 있었다.

장군총을 나온 우리는 지안에서 둘러 볼 마지막 유적지인 오회분(五會墳)으로 이동했다. 귀족의 무덤으로 보이는 봉토 고분 다섯 개가 모여 있다고 해서 부쳐진 이름이다. 여기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었다. 오회분 묘들은 토총(土塚)으로서 6세기 이후의 무덤이라고 한다. 제 4호묘와 제 5호묘의 벽화는 유명하다. 아마 우리나라 교과서에 이미 실린 벽화일 것이다. 제 5호묘는 3개의 합장묘 형태이다. 왕과 왕비의 것으로 추정되는 두 개는 한 덩어리의 돌로 되어 있었는데, 다른 하나는 한쪽 끝부분에다 이어 붙여 놓았다. 다른 돌로 붙여 놓은 이유가 궁금했다. 두 번째 부인이 아닐까 하는 안내원의 설명이 있었다.

▲ 오회분 ⓒ황재옥

무덤 내부는 축축하고 서늘했다. 습도 조절이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변방 소수민족의 역사 유적이라 충분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수 천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정교하게 그려진 벽화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중국인 안내인이 천정에 그려진 벽화에 대해 설명했다. 삼족오(三足烏)를 가운데 두고, 현무 주작을 탄 선인(仙人)의 모습이 있었고, 토끼가 월계수 나무 아래에서 방아 찧는 모습도 있었다. '토끼가 방아 찧는' 설화가 1500년 전에도 있었다는 말인가? 이 설화의 역사가 그렇게 오래된 것인 줄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환도산성(丸都山城)

오회분을 보고 나서 환도산성으로 가는 길에 지안박물관을 둘러보려 했으나 2011년 문을 닫아서 들어가지 못했다. 지안시의 북쪽에 위치한 환도산성에 도착했다. 환도산성은 옹성(甕城: 항아리 모양의 성) 형태의 산성이다. 우리의 남한산성과 같은 형태인데, 환도산성 같은 옹성은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축성된 요새라고 한다. 그 둘레는 6,395m이고 성곽은 342년에 무너졌다고 적혀 있었다.

▲ 환도산성. ⓒ황재옥

터만 남아 있어 관광지로서의 매력이 없어서인지 관광객은 우리 밖에 없었다. 고구려는 수도에 평지성과 산성을 쌓고, 평상시에는 평지성에 활동하다가 적이 침입하면 산성으로 들어가 대항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내려 쪼이는 태양 아래 고즈넉함이 느껴지는 산성이지만, 잠시 그 옛날 이 산성으로 들어와 최후의 항전을 했을 그 시절을 상상해 보니 나무 한 그루, 돌 한 덩어리가 달리 보였다. 그 시절의 처절함은 온데간데 없고 8월의 뜨거운 태양아래 풀벌레의 울음소리만 간혹 들려 왔다. 산성 가운데 맑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개울물에 발도 담그고 두런두런 모여 앉아 못 다한 고구려 얘기를 했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 유적 답사 일정은 끝났다.

동북공정에 대한 단상

지안의 고구려 유적답사 일정을 마치고 난 우리는 동북공정(東北工程)과 고구려의 정체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지 않을 수 없었다.

1963년 저우언라이(周恩來)는 북한 학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발해는 고구려의 후예이고, 발해는 조선족으로서 독립된 국가"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저우언라이 발언 시점이 1963년이라면, 북·중 국경문제에 대해서도 중국이 북한의 입장을 최대한 존중하던 시점이었다. 그런 점에서 저우언라이 발언이 정치적 발언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일국의 총리가 한 말은 시공을 초월해서 국가의 정책과 방침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50여년이 지난 지금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정치적으로 영토문제를 새롭게 설정하고 있다. 혹시나 통일 이후 한반도와의 영토문제로 인한 분쟁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의 고조선, 고구려, 발해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된다.

우리 고대사와 관련하여 최근 중국은, 저우언라이의 발언과는 정반대로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단군조선은 존재하지 않았고,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은 중국인이 세운 고조선이다. 한사군은 중국의 영토였고, 그 영토 안에 세워진 고구려와 이를 계승한 발해는 고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 따라서 그 역사는 중국사에 귀속된다. 그리고 고구려 멸망 시 조선족은 한족과 융합됐다"고 주장한다.

참으로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왜곡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2004년 고구려 유적에 이어, 발해유적도 세계유산에 등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중국은 그들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역사공간을 동북3성 지역에 구축, 이를 대중에게 전도하고 있는 것이다.

동북공정의 정식명칭은 '동북변강 역사와 현상계열 연구공정'이다. 2002년 본격적으로 시작된 동북공정은 중앙의 정치적 의도와 지방학계의 학술적 수요가 절묘하게 상호 부합한 결과로 시작된 것이라 한다.

중국 중앙정부로서는 소수민족의 이탈을 방지하고 변강의 안정을 수호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한편 동북3성 지방학자들은 일찍부터 고조선, 고구려, 발해 등 한국 고대국가를 중국 동북 지방사에 포함시켜 설명하여 왔다. 동북공정은 명백한 정치적 목적을 가진 학술연구인 셈이다. 다시 말해서 동북공정은 순수한 학술연구라기보다는 국가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학술연구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런 점에서 동북공정은 기왕의 학설들을 중국 정부의 지원 하에 정설(定說)로 굳혀 나가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동북공정은 사실 남북 모두에게 불편한 주제이다. 한국에서는 중국의 처사에 대해 비판적이고, 그동안 고대사 연구에 소홀했던 것을 자성하는 분위기이다. 그런데 북한은 동북공정에 대해 일체 논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아예 무시하는 것인지, 아니면 북중관계를 고려하여 말을 아끼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남북대화 과정에서 우리가 남북 공동대응을 제안했을 때도 북한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고 한다.

중국의 이러한 움직임이 혹시라도 통일 이후 한반도와의 영토분쟁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하여 선제공격 또는 '굳히기' 차원에서, 고조선, 고구려, 발해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다. 고구려와 발해의 정체성을 밝히는 연구를 좀 더 체계적으로 추진해 나가고, 중국의 동북공정 정책에 대해서도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할 필요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남북이 협력하고 공동으로 대처하는 것도 앞으로 검토되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의 어깨가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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