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바람이 이렇게 추운지 몰랐어요. 물은 얼마나 더 차가울까요"
단원고등학교 고(故) 서현섭 학생의 셋째 누나 아름 씨가 객실 밖 난간 앞에 앉아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었다. 오들오들 떠는 아름 씨 앞에 어머니가 섰다. "엄마가 바람 다 막아줄게"라고 하지만, 어머니의 가냘픈 몸으로 바다 추위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진도는 벚꽃도 거의 질 만큼 봄이 무르익어가고 있지만, 바닷바람만은 여전히 겨울처럼 시리고 아팠다. 지난해 5월, '누나들 말 잘 듣던 착한 동생' 현섭이를 찾고 거의 1년 만에 와본 진도 앞바다는 여전히 추웠다. 아름 씨는 "춥다, 춥다"를 연발하면서도, '객실 안으로 들어가는 게 어떠냐'는 얘기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동생 생각하면 괜찮아요. 이 정도는"
"미안해", "사랑해"…바다에 말하다
15일, 진도 팽목항에서 열린 위령제가 끝난 뒤, 이날 오전에 이어 200여 명의 다른 희생자 가족들이 사고해역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관련 기사 : "꼭 꺼내줄게…무서워하지 말고 기다려")
품에 한 가득 꽃다발을 든 유백형 씨는 이날 오후 탑승자 가운데 유일한 실종자 가족, 단원고등학교 양승진 교사의 아내다. 꽃다발 덕분에 객실 안에 국화와 장미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이 꽃은 지난달 24일 생일이었던 남편에게 주기 위해 유 씨가 안산에서부터 품에 꼭 넣어 가져온 소중한 선물이다.
"작년 남편 생일에 아침상 차려준 게 기억 나. 새벽부터 일어나 미역국 끓이고 잡채 하고, 조기 굽고 나물 세 개 무치고, 전날에 산 주먹만 한 케이크도 상에 올리고…. 그게 마지막이 될 줄 몰랐지."
객실 안에 있어도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행여나 바람에 꽃잎이 떨어질세라 유 씨는 꽃다발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
"작년에 처음 배 띄운 날이 17일이었는데, 그때도 이렇게 바람 불고, 그땐 심지어 비도 왔었어. 얼마나 추웠는지 몰라. 딸하고 아들하고 담요 두 개씩 두르고."
출항 1시간 30여 분이 지나자, 바람에 비해 비교적 잔잔하던 배가 급격히 출렁이기 시작했다. 대다수 유가족이 불안해하는 것과 달리, 유 씨는 조금 느긋해보였다. 지난해 수색이 한창일 무렵 유 씨가 바지선에 오르내린 것만 16~17번이다. 굳이 시간을 계산하지 않아도, 이렇게 파도가 유달리 거세지면, 사고해역이란 걸 유 씨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고 했다. 이곳이 바로 '맹골수도'라는 것을.
아니나 다를까, 객실 밖에 나가 보니 저 멀리 '세월'이라고 적힌 노란 부표가 눈에 들어왔다. 발 아래서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에 속도, 마음도 모두 일렁였다. 바다를 응시하던 유 씨가 끝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품에 안고 있던 꽃다발을 바닷속으로 힘껏 던졌다.
"여보, 빨리 나와. 우리 남편 좀 보게 제발 인양 좀 해주세요. 저 밑에 남편이 있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져요. 얼마나 추울까. 아직도 여기 아래 있으면…."
배 곳곳에서 오열하는 소리가 울렸다. 다른 유가족들도 국화 한 송이씩 바닷물에 던졌다.
"재강아, 엄마가 미안해", "아들아 미안하다", "혜민아 보고 싶어. 엄마한테 좀 와줘, 사랑한다 혜민아"
희생자 가족들은 배 아래서 돌아오는 소리가 없어도, 소리치고 또 소리쳤다. 차마 객실 밖을 나가지도 못한 채 흐느끼는 가족도 있었다. 희생자 가족들은 빨간 눈으로 서로를 다독거렸다.
20여 분 정도 사고 해역 주변에 멈춰있던 배는 다시 뱃머리를 돌려 팽목항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배 안에서, 희생자 가족들의 감정은 슬픔에서 다시 분노로 옮아갔다. 유가족들은 정부가 세월호 인양이 가능하다는 점을 인지했음에도 발표를 하지 않은 데 대해 크게 분노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정부에 대한 실망감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설마 선박 전문가들도 그걸 몰랐을까? 다 알았겠지. 그런데 정부가 무서우니까 못했겠지."
오후 7시 15분경 희생자 가족들은 배가 항구에 안전하게 들어서자, 차례차례 줄 지어 나가며 "특별법 폐지", "정부는 살인마" 등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 내일, 4.16을 맞이하러 다시 안산행 버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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