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미국 정부 고위 관료들의 한일 관계에 관한 발언이 부쩍 세졌다. 몇몇 공개적인 발언만 놓고 보더라도 그렇다. 2월 말 웬디 셔먼 국무부 장관은 "어느 정치 지도자도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받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지율을 의식해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뉘앙스였다. 논란이 커질 즈음 마크 리퍼트 대사 피습 사건이 발생하면서 미국에 대한 '성토'는 한미동맹 '찬양'으로 돌변했다.
뒤이어 대니얼 러셀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인신매매의 희생자"로 표현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발언을 "긍정적 메시지"라고 평가했다. 이 역시 미국이 한국보다는 일본의 손을 들어준 측면이 강하다. 위안부 문제의 핵심은 일본 정부가 국가의 책임성을 인정하느냐의 여부에 있다. 그런데 아베의 발언에선 이 부분이 빠져 있다. 가해자로서의 일본 정부의 책임을 도외시한 것이다.
최근에는 일본과 한국을 순방한 애슈턴 카터 국방장관의 발언이 도마 위에 올랐다. 그는 4월 초순 <요미우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일 간) 협력에 의한 잠재적 이익이 과거의 긴장이나 지금의 정치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미국은 한일 관계에 존재하는 역사적 민감성을 충분히 이해한다"면서도 "우리 세 나라는 미래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발언들이 담고 있는 핵심적인 메시지는 '과거를 잊고 미래로 가자'는 것이다. 미국이 강조하는 미래는 카터의 발언에 잘 담겨 있다. "3국이 안보협력을 강화하는 것은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재균형' 정책의 핵심요소"라는 것인데, 이는 곧 한미일 삼각동맹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그런데 군사동맹은 기본적으로 '공동의 적'을 상정한 것이다. 한미일 삼각동맹이 겨냥하는 '공동의 적'이란 명시적으로는 북한을, 본질적으로는 중국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20세기 불행한 역사, 21세기에도 되풀이?
한일관계와 한미일 3자 관계에 대한 미국 관료들의 발언은 몰역사적일 뿐만 아니라 과거로의 퇴행적이라는 데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한국을 구원해줬다"는 일방적 시혜 의식을 갖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미국이 20세기 전반 중대한 역사적 길목에서 한국인들에게 불행의 씨앗을 뿌렸다는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미국이 1905년 필리핀의 지배를 인정받는 대신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인정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일본의 패망이 임박했을 때, 미국 정부는 전범국인 일본이 아니라 피해자인 한반도를 분단시키고 말았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명시하지 않아 한일 갈등에 일조했다는 지적도 있다.
역사적 사정이 이렇다면, 미국은 일본의 과거사 청산과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 그리고 일본의 독도 도발을 억제하는 데 노력을 경주해야 하는 게 도리에 맞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잊고 미래로 가자고 주문한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미국이 말하는 미래상이다. 미국 스스로가 '평화헌법 국가' 일본을 설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가 되라고 요구한다. 또한 일본 군국주의의 최대 피해자인 한국에게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용인하고 군사협력을 강화하라고 압박한다. 그리고 그 종착점으로 한미일 삼각동맹을 설계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미국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한미일 삼각동맹이 한국인을 포함한 동아시아인들에게 어떻게 미래의 이익이 될 수 있느냐고 말이다. 동아시아 미래 이익은 '한미일 대 북중러'와 같은 냉전 시대 초기 대결 구도가 재현되는 것을 막고 공동의 번영과 평화를 만들어가는 데에 있다. 특히 분단국이자 강대국으로 둘러싸여 있는 한국에게는 사활적인 이익이 걸려 있다.
미국은 냉전 시대에 한국을 아시아 대(對)소련 봉쇄의 전초기지로 삼았던 것처럼 21세기에도 한국을 대중 봉쇄의 전초기지로 삼으려는 '도구적 관점'을 버려야 한다. 오늘날 많은 한국인들은 한미관계와 한중관계의 균형을 원한다.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평화적으로 교류하고 협력할 수 있는 가교가 되길 희망한다. 그러나 미국이 말하는 미래는 이러한 한국의 비전과 양립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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