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서울 은평구 마을 공동체의 한 활동가가 소셜 미디어에 올린 글을 보게 되었다. 4월 6일에 있었던 시립서북병원의 타운홀 미팅에 참여했던 소감을 적은 것이었다. 주민들이 병원 경영진에게 이런저런 제안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처음으로 환자가 아닌 '손님' 자격으로 동네 공공 병원을 돌아보았다고 했다. 괜찮은 공공 병원을 가진 동네 주민으로서의 자부심과 뿌듯함이 느껴져서 글을 읽는 이도 덩달아 뿌듯해졌다. (☞관련 기사 : 시립서북병원과 주민들이 처음으로 얼굴을 맞댄 타운홀 미팅!)
그 글에는 "병원과 마을이 만나는 것이 생소"하다, 주민들도 "처음에는 병원에 와서 어떤 얘기를 해야 할까 망설"였다는 이야기가 솔직하게 적혀 있었다. 사실 보건의료만큼이나 전문가의 힘이 강력한 분야도 많지 않다. 보건의료 문제라고 하면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도 않고 '전문가'에게 미루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어지간한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물론, 다른 분야의 전문 연구자들조차도 그렇다. 이러한 현상의 역사적 연원은 차치하고, 일단 사정이 이러하니 보건의료 문제를 '일반' 시민들이 감시하고 심지어 '기획'에 참여한다는 것은 좀처럼 가능해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사회적 소수자나 '못 배우고 가난한' 이들이라면 더욱 그럴 듯싶다.
하지만, 이들의 참여야말로 보건의료 서비스의 불평등을 개선하는데 중요하다. 작년 말 국제 학술 잡지 <사회과학과 의료>에 실린 호주(오스트레일리아) 멜번 대학교 켈라허 박사 연구 팀의 논문은 이를 잘 보여준다.
한국에서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관광지로 알려져 있지만, 호주는 선주민에 대한 폭력과 차별이라는 어두운 과거를 간직한 곳이다. 그 유산으로, 선주민 집단과 주류 유럽계 주민들 사이의 건강 격차는 아직도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2008년, 호주 정부는 역사상 처음으로 과거에 국가적으로 자행된 선주민에 대한 수탈과 어린이 강제 입양 정책을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어린이 강제 입양 정책은 학대받거나 방임된 혼혈 아동, 혹은 미개한 환경에서 절멸할지도 모르는 선주민 아동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어린이들을 부모로부터 강제로 격리하여 '문명화된' 시설에서 양육하도록 했던 호주의 정책이다. 19세기 말에 시작되어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는데, 심지어 1970년대까지도 일부 지역에 남아있었다고 한다. (☞관련 자료))
그러고는 선주민들의 불리한 처지를 개선하여 건강 불평등을 감소시키겠다는 목표 하에, 전국과 지방 모든 수준에서 선주민과의 협력을 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전국 수준의 '선주민 건강 파트너십 협약'을 이끌어냈는데, 지역 보건의료 개혁 과정에 선주민들의 참여를 보장하고, 주류 의료계가 선주민들의 필요에 부응하도록 하는 것을 강조했다. (☞관련 자료 : 호주의 선주민 건강 불평등 개선 계획을 담은 보고서)
연방 정부와 7개 지방/지역 정부들이 이 협약에 참여했으며, 연구는 그 중에서 빅토리아 주와 서호주 주를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협약에 기초하여 선주민 단체들, 주 정부 보건국, 의료 공급자들로 이루어진 지역 포럼이 구성되었고, 선주민 공동체 대표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연구진은 이러한 지역 협치 구조에 참여한 188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와 심층 면담을 시행하고, 2008년부터 2012년 사이에 시행한 선주민 건강 검진에 얼마나 많은 주민들이 참여했는지를 파악하여 관련 요인들을 분석했다. 건강 검진이 곧바로 건강 개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그동안 제한되었던 선주민들의 의료 서비스 접근성 개선을 보여주는 지표라 할 수 있었다.
분석 결과, 선주민 공동체 대표나 단체들이 참여하는 협치 구조는 권력을 중앙 정부로부터 지역 포럼으로 이전시키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선주민들이 포럼에서 수적으로 다수는 아니었지만, 이러한 힘의 이동은 이들이 좀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선주민 단체와 주류 단체들 사이의 네트워크 연계나 선주민 공동체의 대의(代議) 수준이 높을수록 선주민들의 건강 검진 시행률이 더 높았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도 문제는 있었다. 원래 계획보다 시행이 지연되면서 일정이 촉박해졌고, 그러다보니 일부 지역, 특히 열악한 지역일수록 포럼 내의 힘 있는 구성원들이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경향이 있었다. 또 사업 기금을 둘러싸고 선주민 단체들 사이에 경쟁이 심화되거나, 공동체 전체보다 자기 단체들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선주민들이 직접 협치 과정에 직접 참여하고 실질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지역 보건 계획에 분명한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는 장기적으로 건강 불평등을 개선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었다.
사실 건강 불평등 개선에 도움이 되든 안 되든, 자유와 평등이라는 측면에서 시민들, 특히 취약한 처지에 있는 소수자들의 참여는 바람직하다. 게다가 이러한 민주주의는 실제로 건강 불평등 문제를 개선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어쩌면 보건의료의 전문성과는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들이지만, 이러한 당사자들이 지역 보건의료 기획의 협치 구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목소리를 내는 것은 당위성만이 아니라 실용적으로도 중요하다는 것을 이 연구는 실제로 보여주었다.
호주에서 했던 것을 한국 사회에서 못할 이유가 없다. 그들이라고 과정이 마냥 순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시립서북병원 사례는 우리 사회에서 작지만 중요한 첫걸음이라 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하지만, 피만큼이나 인내심과 시간을 먹고 자라는 것 같다. 보건의료를 비롯한 '전문가'의 영역에서 이런 참여 민주주의의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여 나가길 기대해본다.
참고 자료
Kelaher M, Sabanovic H, La Brooy C, Lock M, Lusher D, Brown L. Does more equitable governance lead to more equitable health care? A case study based on the implementation of health reform in Aboriginal health Australia. Soc Sci Med 2014;123:278-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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