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엄마가 아닌 이모라고 불렀습니다. 상호는 재혼 가정의 첫째 아들이었습니다.
"애기 때부터 엄마랑 떨어져 지내서, 엄마에 대한 정 같은 건 없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처음엔 저를 많이 경계했어요."
이모에서 엄마가 된 지 고작 8년. 이제야 서로에게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던 차에, 때 이른 이별이 찾아왔습니다.
"엄마 정 모르고 자란 아이였어요"
상호에게 새 가족이 생긴 건 열 살 때의 일입니다. 엄마, 두 살 터울의 여동생과 다섯 살 터울의 남동생이 새로 생겼습니다. '새엄마'다 보니 엄마는 아무래도 상호에게 마음이 더 갔습니다. '새엄마가 키워서 옷 깨끗하게 못 입고 다닌다'는 얘기를 들을까 봐 항상 전전긍긍했습니다.
서로 가족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상호에게 사춘기가 찾아왔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상호에게 좀 더 관심 가지려고 하는데, 상호는 자기를 그냥 내버려뒀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워낙 저한테 곁을 안 내줘서 엄마로서 답답했죠. 한 달 정도는 말도 안 한 때도 있었어요. 사랑을 못 받고 자라다 보니 표현할 줄 몰랐던 것 같아요."
다행히 상호의 방황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잠깐 한두 달 위기를 겪고 난 이후 엄마와 상호는 돈독한 사이를 자랑하는 모자가 되었습니다.
"듬직하고 자상한 아들이었어요. 오히려 아빠보다도 얘기가 더 잘 통했어요."
상호는 손이 많이 안 가는 아들이었습니다. 매일 새벽 6시면 혼자 일어나 시리얼을 먹고 등교를 했습니다.
"애가 애다워야 하는데, 상호는 너무 어른스러웠어요. 저나 아빠가 없으면 동생들 밥도 다 차려줬지요. 어렸을 때부터 동생들을 챙겨야 해서 그런지 어리광부리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조잘조잘 말은 많지 않았지만, 조용히 든든하게 챙겨주는 편이었습니다. 기념일이면 잊지 않고 엄마에게 선물을 해줬습니다. 사탕을 안 좋아하는 엄마의 취향을 고려해 화이트데이면 초콜릿을 사다 줬고, 생일엔 케이크와 선크림을, 재작년 크리스마스엔 목도리를 사줬습니다.
상호 얘기에 빨간 코가 돼 눈물을 뚝뚝 흘리던 엄마는 '남자애인데도 여자 호르몬이 좀 있는 거 같았다'며 푸스스 웃습니다. 상호는 집안에서 제일 가는 꼼꼼쟁이기도 했습니다. 설거지 하나를 시켜도 깔끔하게 물기 하나 없이, 하수구에 음식물 찌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뒤처리를 깔끔하게 해 엄마가 할 일을 덜어줬습니다.
엄마가 음식을 하면, 마지막에 간을 보는 것도 상호 몫이었습니다. 음식을 할 때면, 간을 봐주던 상호 모습이 떠올라 엄마는 집에서 밥을 잘 안 해먹는다고 합니다. 남은 동생들한테는 미안하지만, 아직은 요리하기가 힘듭니다.
"'단원고 간다'는 여동생한테 '빨래 네가 하라'고 했어요"
상호 별명은 오이였습니다. 빼빼 말랐다며 두 동생이 지어준 별명입니다. 상호는 둘째 해연이는 달걀, 막둥이 승우는 감자라고 불렀다고 하네요. '요새 애들답지 않게' 순수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 갑작스레 생긴 동생들이 벅찰 만도 하건만, 상호는 두 동생에게 든든한 오빠, 맏형이 되어주었습니다. 상호 생전엔 남매간에 사이가 좋아 다행이라고 여겼는데, 그 우애가 지금은 엄마를 괴롭게 합니다.
"딸랑구(딸)가 단원고를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더니 결국 들어갔어요. 엄마는 그 교복을 다시 볼 자신이 없는데…. 그래서 '단원고 갈 거면 네가 빨아서 네 방에 널어라' 했어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죽네사네 해도 빨래는 해줘야지요."
학교를 마치고, 단원고 교복을 입고 들어 온 해연이를 엄마는 한 번 힘껏 흘겨봅니다.
상호를 많이 따르던 막둥이는 언제부턴가 상호 침대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던 부모님은 상호가 쓰던 침대를 버렸습니다. 그렇게 상호 물건을 정리하고 나니, 남은 물건이 몇 개 없었습니다.
상호 물건을 빨리 정리한 건 마음이 아팠던 탓도 있었지만, 엄마가 불교신자였던 영향도 있었습니다. 물건을 버려야 아이가 환생해서 좋은 곳에 간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지금 가족들에게 남겨진 상호 물건은 숙제로 남겨둔 노트 하나, 사진 몇 개뿐입니다. 엄마는 다 제 탓이라며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너무 성급했던 거죠. 그게 좋을 줄 알았는데 지금 와서야 후회돼요. 아빠는 저를 달랜다고 본인도 내 말을 듣고 너무 성급하게 정했다고 하는데, 어쨌든 제가 말 꺼낸 거잖아요…."
"수학여행 가던 날, 그렇게 활짝 웃는 걸 처음 봤어요"
상호는 조용한 아이였습니다. 시끄러운 걸 워낙 싫어해 사람 많은 곳은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선지 별로 수학여행 가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친구들이랑 마지막으로 가는 여행이니 꼭 가야 한다며 억지로 아들 등을 떠밀었습니다. 수학여행 가기 전날 아침, 마지막 배웅하던 상호의 얼굴을 엄마는 잊을 수 없습니다.
"상호가 아침에는 피곤해서 원래 잘 안 웃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그날따라 상호가 '다녀올게요' 하면서 활짝 웃는 거예요. 그렇게 웃는 걸 처음 봤어요. 상호가 아닌 느낌이었어요. 그래도 그 모습 저는 봤으니까…."
엄마의 배웅을 받고 떠난 상호는 20일이 지난 5월 5일, 524번째로 나왔습니다. 뒤통수 모양, 'O'자 다리가 영락없이 상호였습니다.
엄마가 상호를 다시 본 건 49재를 지낸 뒤 꿈에서입니다.
"학교에서 끝난 모습 그대로 교복 입은 모습이었어요. 제가 '상호야 너 맞아? 너 여기 없잖아'라고 했더니 '나 여기 있잖아요' 하면서 활짝 웃더라고요. 울면서 꿈에서 깨어났어요. 아빠는, 상호가 그래도 절 많이 생각하는 것 같다고 부러워하더라고요. 아빠는 아직 꿈에서 상호를 못 봤거든요."
형 유독 잘 따르던 막내, 형 사고를 받아들이기까지…
상호네 아버지는 가족대책위 사무국장 일을 하고 있습니다. 대책위 살림을 도맡다 보니 매일 새벽녘에야 집에 들어옵니다. 두 아이 얼굴 볼 시간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아빠는 요새 아이들을 챙길 시간이 없습니다. 지난 2월 두 아이 모두 졸업했습니다. 하지만 둘째 혜연이 졸업식은 아빠 도보 행진 일정이 겹쳐 엄마 혼자 가고, 승우 초등학교 졸업식 때는 당직이라 챙기질 못했습니다.
두 동생이 새 학교에 입학하기 전, 상호네 가족들은 아빠의 제안으로 다 같이 진도에 다녀왔습니다. 동생들은 진도에 간 게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진짜 가고 싶지가 않았어요. 예전 기억이 너무 크다 보니까 진도대교만 건너도 목이 졸리는 것 같은 답답함이 느껴지더라고요. 절대 익숙해질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두 번, 세 번 가니 괜찮아지더라고요. 지난번엔 펑펑 울었는데 애들 있으니까 몰래 혼자 울고 왔어요."
상호와 한 방을 썼던 막내 승우는 바다 근처를 맴돌았습니다. 처음 가보는 거라 무서워할 줄 알았지만, 다행히도 의젓하게 사고 지점까지 배를 타고 함께 들어갔습니다.
"이제 받아들이는 것 같더라고요. '형이 여기서 사고를 당했구나.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런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사실 엄마는 어린 승우가 걱정됩니다. 사고 이후 엄마는 승우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과 여러 차례 면담했습니다. 국회에 머물던, 한창 바쁘던 때였습니다. 승우에게도 관심을 가져달라며, 차라리 승우를 데리고 다니라는 선생님 권유에 따라, 엄마는 승우 손을 잡고 청운동이며 광화문이며 험한 집회 일정을 참 많이도 다녔습니다.
"동생들한텐 미안하죠. 그런데 제가 섭섭하지 않느냐 물으니 둘 다 괜찮다고 이해를 해주더라고요. 얘네도 신경 써야하지만 저흰 상호를 위해 일해야 해요. 그래야 나중에 상호 볼 때 덜 미안할 것 같아요. 언젠가 만나게 되면, 엄마가 널 위해서 이렇게 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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