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경제 대통령' 전략을 점차 가시화하고 있다. '소득 주도 성장론'을 핵심 의제로 밀고 있다. 문재인 대표는 왜 이와 같은 신(新)전략을 추구하는 것일까? 문재인 대표에게 다음 대선 전략의 핵심은 '친노의 굴레'를 벗어나는 데 있다. 대한민국 선거제도상의 5년 단임제 대통령은 임기 말에 가까울수록 필연적으로 인기가 떨어진다. 대통령을 욕하는 목소리는 고스란히 집권·여당의 부담이 되고, 결국 대선은 항상 집권당에 불리한 구조로 치러진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대통령 선거는 야당이 무조건 유리하다.
문재인의 새로운 전략
그런데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는 왜 '질 수 없는 선거'를 졌을까? '친노'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야당이 "이명박 심판"을 외치자 여당이 "노무현 심판"을 같이 외치는 전략으로 대응했다. 이 때문에 선거구도는 '여당과 야당의 싸움'에서 '지금 여당과 옛날 여당의 싸움'으로 전환되고 말았다. 청와대 문턱까지 갔다가 되돌아온 문재인 대표로서는 무조건 친노의 굴레를 최대한 벗어나는 것이 핵심 전략이 된다. 여기서 친노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핵심 전략으로 '경제 대통령'이 제시된 것으로 보인다.
친노 세력과 386세력에 대한 반감의 핵심은 그들이 모든 문제를 민주화 투쟁 시절의 관점으로 재해석해서 정치 투쟁으로 둔갑시키는 기술에만 익숙할 뿐, 경제적 대안에는 무능하다는 점이었다. 노무현 시절이나 이명박 시절, 우리 사회의 경제 논쟁은 별로 진화하지 못했다. 나는 그 책임이 이른바 '친노'에 있다고 생각한다. 문재인 대표의 '경제 대통령'은 바로 이런 한계를 정면 돌파하기 위한 유력한 전략이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적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경제와 담쌓고 있던 문재인 대표가 경제 이슈의 한복판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임금 상승에 여당과 야당이 모두 동의하는 이유
'소득 주도 성장론'은 최근 긍정적인 의미를 인정받는 분위기다. 명시적 반대 입장도 별로 없고, 저항적 논조도 크지 않다. 이런 분위기가 조성된 이유는 우리나라가 구조적인 저성장 시대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저성장이 저임금을 낳고 저임금이 소비 위축을 가져오며, 소비위축 때문에 디플레와 장기 저성장이 우려된다는 상황인식을 정치권-언론계-정부가 상당 부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 느껴진다.
이 때문에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기업의 사내유보금에 과세하는 세제를 출범시켰고, 한국은행은 다양한 사회적 압박 속에서 금리 인하를 단행했다. 심지어 보수언론들의 논조도 비정규직의 '처우 개선-소득 증대'를 주문하고 있다. 집권·여당은 전례 없이 최저임금 인상을 외치고 있다. 실제로 우리가 처한 경제적 조건은 완전히 달라졌다. 과거에는 개인이 은행에 저축하고, 기업은 은행에서 돈을 빌려서 사업을 늘려나갔다. 그러나 지금은 기업이 넘치는 현금을 쌓아놓고, 개인은 대출받아 집을 사고 있다. 돈의 흐름이 과거와는 반대 방향으로 돌기 시작한 것이다. 한마디로 '디플레 우려에 노출되어 있는 저금리 시대'이다.
국민소득=소비+투자+정부 지출
내가 보기에 '소득 주도 성장론'의 본질은 소비 중심 성장론이다. 대학교 1학년 거시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케인즈의 공식을 보자. Y=I+C+G. 국민소득 Y는 C(소비)+I(투자)+G(정부 지출)로 구성된다는 의미다(이 글에서는 논의의 압축을 위해 순수출은 빼고 생각한다). 이 논리 틀에 입각해서 보면 경제성장은 결국 C(소비)나 I(투자) 혹은 G(정부 지출)가 늘어나야 한다. 이에 따라 경제 성장도 소비 주도 성장, 투자 주도 성장, 정부 지출 주도 성장, 수출 주도 성장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소득 주도 성장론'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소비 주도 성장 전략'의 한 형태로 해석된다. 소득이 늘어나면 '소비'가 늘고, 결국 성장이 일어난다는 주장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소득 주도 성장론'이 비현실적일 수 있는 이유
그런데 문제는 '소득 주도 성장론'이 몇 가지 측면에서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점이다.
첫째 문제는 소득의 증대가 반드시 소비의 확대로 이어진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소득 주도 성장이란 소득이 늘어나면 소비가 덩달아 늘어난다는 점을 전제로 하는데, 현실은 꼭 그렇지 않다.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에서 보는 것처럼, 사람들이 늘어난 소득을 모두 은행에 '저축'해버리면 소비가 일어나지 않고, 성장 효과는 사라진다. 이는 사회적 불안과 관련이 깊다. 소득이 늘어나도 미래가 불안하면 사람들은 소비하지 않고 저축을 한다. 즉 복지제도와 사회보장이 전제되어야 소득증가분이 안심하고 소비로 이어질 수 있는데, '소득 주도 성장론'은 이 부분을 간과하고 있다.
둘째 문제는 기업들이 임금을 절대 함부로 인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소득 주도 성장론'이 말하는 소득은 '노동 소득' 즉 임금이다. 그런데 임금은 하방경직성이 있다. '금리'는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지만, '임금'은 한번 올리면 그 뒤로 다시 내리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금리는 경기 조절의 수단이 될 수 있지만, 임금을 경기 대응(=조절)의 수단으로 삼기는 어렵다.
국가가 기업에 '돈을 풀라'고 압박하기 위한 제도로 박근혜 정부는 '기업소득 환류세제'를 도입한 바 있다. 기업의 현금 보유를 압박해야 한다는 생각은 전부터 있어 왔다. 나는 수년 전에 기업들이 사내유보금으로 얻는 이자 소득에 대해 고세율로 분리 과세하자는 제안을 한 바 있었는데(2010.10.5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칼럼),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놀랍게도 이보다 '더 과격하고' '더 좌파적인' 세제를 창설했던 것이다. 즉, 그는 기업의 사내유보금에서 나오는 이자 소득이 아니라 아예 사내유보금 자체에 과세했다. (☞ 관련 기사 : "누진적 이자 소득세를 도입하자")
그런데 이 세제도 임금 인상 효과는 별로 없을 것 같다. 사내유보금에 대한 과세를 회피하는 가장 손쉬운 방안은 '배당'을 늘리는 것이지 임금을 올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업이 늘어난 수익을 안심하고 임금 인상에 뿌리려면 임금을 자유롭게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재의 조건상 이것이 불가능하다.
셋째, 소득은 결국 성장의 '수단'보다는 성장의 '결과물'인 측면이 강하다. 즉, 최저임금을 약간 올리는 것 외에는 국가가 기업을 상대로 임금 인상을 압박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 기업이 장사가 잘 돼서 스스로 임금을 높여주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임금 인상 경로이다. 현재 제출된 '소득 주도 성장론'은 이상의 문제제기를 돌파할 능력이 없어 보인다. '소득 주도 성장론'에 대해 언론에 보도된 문재인 대표 측의 입장은 이렇다.
"소득 주도 성장 전략의 핵심은 월급쟁이들의 유리지갑을 채워주는 것으로, 말 그대로 지갑을 채워주는 성장이다. 이를 위해 ▲생활소득을 높여서 국민 기본소득 보장 ▲비정규직, 자영업자 등 1000만 워킹푸어에 대한 차별 해소 ▲대-중소기업 간의 상생협력 제도화로 발전 ▲부자 감세 철회로 복지 재원 조달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라는 공감대 확산으로 노동시간을 단축해 일자리를 나누어…"
얼핏 들어도 그동안 별 실효성 없이 떠돌던 공허한 말들을 나열해 놓은 느낌이 든다. 정치적으로 좋은 말들만 수집해 놓은 것에 불과할 뿐, 구체적인 경제 정책이라고 볼 만한 내용이 별로 없다.
요약해보자. 자본주의 시대의 경제성장이란 본질적으로 돈의 회전속도를 의미한다. 돈을 돌려야 하는데, 기업이 저축만 하고 투자를 안 한다. 그래서 여당이고 야당이고 죄다 중산층의 구매력을 높여줘야 할 것 같은 위기감이 들고 있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인가? 방법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기업을 상대로 투자를 늘리고 임금을 높이라고 강요하고 압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방법은 아무리 봐도 실효성이 없다. '기업소득 환류세제'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듯이 이 방법은 실패를 예약하고 있다.
우리는 더 현실적인 두 번째 방법을 알고 있다. 그것은 국가가 기업인들을 만나서 투자와 임금을 늘리라고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기업에게 세금을 걷어서 이를 복지국가 시스템을 통해 구조적으로 재분배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소비'가 확장될 수밖에 없다. 기업이 직접 임금을 높이도록 강요하는 것이 직접적인 소득 분배 정책이라면, 국가가 세금을 걷어서 복지 형태의 사회임금으로 나눠주는 방식을 간접적인 소득 분배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후자가 현실적이고 효과적이며, 검증된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소득 주도 성장론'은 '정부 지출 주도 성장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Y(국민소득)=I(투자)+C(소비)+G(정부 지출)에서 G(정부 지출)를 키우는 전략이니까.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라고?
우리는 종종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라는 말을 듣는다. 내 기억으로는 노무현 대통령이 처음 한 것 같고, 문재인 대표는 요즘 이런 말을 종종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말은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 우리는 '복지'와 '복지국가'를 구분해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개인적으로 좋은 일자리를 얻어서 각자의 복지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복지국가'라는 경제사회적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있다.
복지국가 시스템은 소득세 체제를 전제조건으로 하는 경제사회 체제이다. 그런데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소득세 시스템은 그 의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소득이 줄면 국가의 조세수입이 줄고 덩달아 복지도 축소 압박을 받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복지국가란 '소득세 시스템'과 '현물 복지를 통한 소득재분배', 그리고 '사람에 대한 사회투자 등을 통한 지속적 경제성장'이라는 3요소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경제사회 체제를 의미한다.
복지국가의 성공에 있어서 경제성장이 매우 관건적인 요소임은 스웨덴 모델에서 확인된다. 스웨덴 모델의 성공은 경제성장이 지속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스웨덴 사민주의 국가 체계의 핵심적 특징은 '복지' 그 자체라기보다는 복지를 바탕으로 한 '성장 시스템'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성장을 계속 유지해야 하는 이유는 성장이 아니고서는 임금을 끌어올릴 별다른 수단이 없고, 임금 상승이 안 되면 소득세 시스템의 실효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역동적 복지국가", 다시 말해 '성장 친화적 복지국가'만이 지속가능한 복지체제를 수립할 수 있다.
'복지 중심 성장론'이 정공법이다
저성장 시대에 돌입한 지금, 기업의 투자를 유도하거나 압박하기 힘든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대안을 세울 수 있을까?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정공법을 택해야 한다. 재벌 대기업에 대한 법인세 인상과 고소득자에 대한 소득세 인상을 통해 복지 재원을 확보하고, 이를 기반으로 보육, 교육, 의료, 노후에 관한 국민 불안감을 제거해 주면, 자동으로 잠재적 구매력을 늘릴 수 있고 소득의 증가분이 소비로 이어질 확률이 높아진다. 이것이 저성장 시대의 새로운 성장 전략이 된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의견그룹들은 이런 자명한 결론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증세 없는 복지'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가이드라인 때문에 최경환 부총리의 경제노선은 원천적인 장애물에 막혀 있다. '법인세 인상-복지 확대'라는 간단한 전략으로 깔끔하게 돌파할 수 있는 문제를 기업의 사내유보금 자체에 과세하는 식의 이상한 전략을 쓰면서 헤매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야당은 '소득 주도 성장론'이라는 복지국가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기인한 '현실성 떨어지는' 주장을 펼치며 시간을 까먹고 있다. 복잡한 전략은 반드시 실패한다. '법인세 및 소득세의 누진적 인상'과 '복지 중심 성장론'이라는 역동적 복지국가의 논리와 전략으로 정면 돌파하는 것이 저성장 시대의 실질적 대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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