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입성부터 말바꾸기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조차도 '덜 보수적이어서 문제'라며 '좌파정권을 내 손으로 종식시키겠다'고 보수우익을 대변해 세 번째 출사표를 던질 예정이지만 한 때 이 전 총재도 '개혁의 상징'으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1960년 약관 25세의 나이로 서울지법 판사로 임관한 그는 서울고법 판사, 서울지법 부장판사, 서울고법 부장판사 등 엘리트 코스를 거쳐 1981년 불과 46세의 나이로 대법관에 임용됐다.
이후 그는 13년 동안 대법관을 지내는 동안 국가보안법 사건에 대한 소수 판결 등 수많은 전향적 판례들을 남기기도 했다. 법조계에서는 "최근 몇년 사이에 지명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이회창 전 대법관이 사법 역사상 가장 진보적이었던 대법관이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오갈 정도다.
그 뒤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겸임하는 동안에는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에게도 엄정한 잣대를 적용해 대중적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그를 감사원장으로 발탁했다.
감사원장 시절부터 '대쪽'으로 회자되기 시작한 그는 총리시절에도 대통령과 맞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꼬장꼬장한 면모 탓에 김 전 대통령이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는 말도 나돌았지만 결국 김 전 대통령은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그를 신한국당 선대위원장으로 불러냈고 그 역시 정치인으로 변모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대쪽' 이미지와 다른 첫번째 '말 바꾸기'를 감행했다. YS의 선대위원장 요청을 수락하기 불과 열흘 전까지 그는 "입당이나 정치참여 문제에 대해 생각한 바가 없다"고 손사래를 쳤기 때문. 아무튼 정치권의 문턱을 '말 바꾸기'로 넘은 그는 '9룡의 경쟁'이던 신한국당 경선에서 대중적 인기, 민정계, 민주계의 지원 등에 힘입어 어렵지 않게 후보 자리를 따냈다.
하지만 그는 신한국당 후보로 당선된 뒤 한 선거유세장에서 '03 마스코트' 화형식을 가졌다. IMF 외환위기 정국에 YS의 인기가 급전직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권 입문의 후광이었던 YS를 철저하게 짓밟은 이 '퍼포먼스'는 가장 비정한 '현직 대통령과의 차별화'로 기록됐다. 최근 YS계 인사들이 이 전 총재의 출마를 누구보다 강하게 비판하는 데에는 그 때부터 싹트기 시작한 앙금이 크게 작용했다.
말 바꾸기와 정치적 배신 행위에도 불구하고 이 전 총재는 끝내 청와대 입성에 실패했다. 아들 병역비리 파문, 이인제 후보의 단독 출마, '11월의 추억'이라는 신조어가 나오게 된 DJP단일화 등이 겹친 결과다. 불과 39만여 표 차의 석패였지만 정권 재창출 실패의 책임에서 이 후보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어쩌다 보니 맨 오른쪽에?
하지만 신한국당에서 한나라당으로 바뀌는 와중에 당을 완전히 장악한 이 전 총재는 한나라당 1, 2, 3대 총재를 역임하고 2000년 16대 총선에서도 대승을 거두며 원내 제1당 총재로 경쟁자 없는 독주를 계속하며 다시 대선을 준비했다.
민국당 창당 등 잡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중적 지명도와 조직력을 한 손에 거머쥔 그의 독주 구도는 거침없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며 대세론을 확산시키는 사이 그와 한나라당은 우향우 행보를 이어갔다. 대세론에 안주하는 모습도 보였다.
반면 민주당은 순회경선 흥행에 힘입어 노무현 바람몰이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영원한 아킬레스 건인 아들 병역 문제가 다시 불거져 나왔고 역동적인 인터넷 문화에 대응하기도 한나라당과 이 전 총재는 굼떴다. 불과 5년 전만해도 '개혁의 화신'으로 보이던 사람이 2002년 대선에서는 '보수, 기득권의 상징'으로 표상됐다.
이승만 정부 시절 서울지검장을 지내면서 장관을 구속시킬 정도로 곧은 면모를 보여 법조계의 존경을 받았던 그의 부친까지도 친일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결국 이같은 잔매에 후보 단일화, 효순이 미선이 사건 등이 겹쳐 이 후보는 또 패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57만 표 차이로 97년에 비해 더 벌어졌다.
두 번째 낙선 이후에는 뒷 끝도 좋지 않았다. '차떼기'로 상징되는 대선 불법 자금 모금 내역이 낱낱이 까발려지면서 그의 최측근들은 줄줄이 감옥으로 들어갔다. 그도 눈물을 흘리며 정계은퇴를 선언하며 검찰에 출두해 구속을 자청했을 정도였다.
불법 대선자금 문제가 어느 정도 정리된 이후 스탠퍼드 대학에서 객원 연구원 생활을 하기도 했던 그는 지난해부터 '보수의 원류'를 자임하며 정치적 발언을 재개하기 시작했다. 한나라당 경선 과정에서도 '혹시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오긴 했었지만 대선출마설이 나온 지 불과 한 달만에 대권 3수 선언을 코앞에 두고 있다.
그의 출마는 선거법에 당내 경선불복을 금지한 소위 '이인제법'의 뒤통수를 친 탓에 어쩔 수 없이 '제2의 이인제'라는 꼬리표를 달게 됐고, 극우보수 노선으로 이명박 후보의 '뒷문'을 치고 들어온 탓에 정치 전반을 우경화시킬 가능성도 매우 높다.
무엇보다 그의 대선3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계은퇴 번복을 '대통령병'이라고 맹비난했던 자신에 대한 배신이자 정당정치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노욕'으로 비쳐지는 게 현실이다.
KS의 악몽 정가의 오랜 가십인 'KS(경기고-서울대) 악몽'의 첫 테이프를 끊은 사람이 바로 이회창 전 총재다. 이 전 총재야 말로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원조 KS지만 대선에서 두 번이나 낙마했기 때문. 그를 패배시킨 상대방이 목포상고 출신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부산상고 출신인 노무현 대통령이기 때문에 대조는 더 극명했다. 이 전 총재 이후 고건 전 총리,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김근태 대통합민주신당 상임고문, 손학규 전 경기도 지사 등 대권을 꿈꿨던 그의 'KS 후배들'도 예외없이 중도에 낙마해 '역시 범생이들은 정치판에선 안 먹힌다'는 속설을 증명했다. 징크스의 원조인 이 전 총재가 스스로 그 징크스를 깨뜨릴 수 있을까? 현재 이 전 총재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는 고려대를 졸업했지만 김대중, 노무현 등 이전 경쟁자와 마찬가지로 상고(포항 동지상고) 출신인 점도 흥미롭다. 한편 1935년 생인 그가 만약 대선에 당선되면 우리나이 74세로 대통령 직을 수행하게 된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과 같은 나이이고 김대중 전 대통령보다도 1년이 늦은 '고령 대통령'이 되는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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