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고 녹슨 모든 관계들은 오랫동안 신성시되어 온 관념들 및 견해들과 함께 해체되고, 새롭게 형성된 모든 것들은 정착되기 전에 낡은 것이 되어 버린다."
160여 년 전 새롭게 등장하고 있던 자본주의를 묘사하면서 마르크스가 한 이야기다. 자본주의로의 급격한 이행기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변화를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혹자는 보다 단순한 사회에서는 유지되었던 사회적 통합이 무너지고 도덕적 규범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했다. 이기주의가 만연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목적만을 추구하는 맹목적 합리성이 불러올 사회적 문제를 비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마르크스가 모든 인격적 가치마저도 '현금지급'과 '교환가치'로 용해될 것이라고 우려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 세기가 훨씬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세상은 몇 번의 굴곡을 겪으면서 여러 번 급격하게 변했다. 이제 지난 세기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졌던 사상가들이 읽어냈던 목적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인간들의 경쟁사회가 완벽하게 실현된 것 같다. '단단한 모든 것이 녹아 공기 중으로 사라져 버리는' 세상이 된 듯하다.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을 '포스트모던한 소비사회'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정체성(identity)과 다양성(diversity)이 현대사회를 규정짓는 핵심어가 된 지 오래다. 스마트폰으로 상징되는 정보사회는 마르크스가 읽어냈던 자본주의를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 때나 지금이나 자본의 논리 옆에는 변형된 신분제, 권위주의, 가부장제가 자리 잡고 있다. 부르주아혁명을 통해 일소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모습으로 유지 온존되어 온 것이다. 포스트모던한 정체성과 다양성은 끝없는 욕망을 창출하고 그로 인한 낭비적인 소비주의는 위계와 복종의 낡은 토양 위에 뿌리내리고 있다.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들도 있지만 인습과 폐단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새로운 에너지를 공급받는다.
스마트폰 들고서 낡은 권위주의 찾는 교육
며칠 전 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딸아이에게서 우연히 선도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순간 의아해졌다. 선도부? 아직도 선도부가 있어? 말 그대로 선도부는 올바르게 이끌어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선도부는 올바름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성적순으로 선발되었던 똑같이 철없는 아이들이었을 뿐이다. 차이가 있다면 선도부에 선발되었다는 것에서 오는 우쭐함을 어깨에 힘을 넣고 후배들을 대했다는 것 정도였다. 그리고 그 올바름이라는 것이 두발길이와 복장을 단속하는 '경찰업무'였을 뿐이었다. 나의 경험은 거의 30년 전의 것이니 그런 '경찰업무'가 선도라는 이름으로 가능했으리라. 다양성과 정체성의 시대에 일방적으로 정해 놓은 학교의 규율을 일부학생에게 권한을 주어 관리하게 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요즘 선도부는 어떨까? 조금은 달라졌을 것이라는 내 예상이 맞을까?
딸아이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30년 전과 전혀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후배는 선배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한다고 했다. '전통'이랍시고 선생님들의 묵인 하에 선배들은 교실에 들어와 책상 위에 올라서게 한 후 복장검사를 한다고도 했다. 스마트폰이 지배하는 세상에 군사독재 시절의 권위주의가 어린 학생들에 의해서 '수행'되고 그러면서 내면화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학교는 순응하는 육체와 정신을 만들어 내는 곳이고 그래서 병영을 닮았다고 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최소한 시대의 변화는 따라가야 하는 것은 아니겠는가. 세상의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청소년들이다. 그들에게 세상에게 가장 낡은 것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아직도 녹아 사라지기를 거부하는 케케묵은 군사주의적(일제식민지배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문화와 함께 모든 것을 현금계산과 교환가치로 용해시키는 노골적인 자본주의적 경쟁 논리도 학교를 병들게 하고 있다. 민주화와 인권의 신장은 체벌을 약화시켰지만 그것을 대체한 것이 시장의 논리인 것이다. 교사와 학생들 사이의 신뢰의 관계가 현금계산의 관계로 용해되면서 학생에 대한 지도는 벌점과 상점으로 '계산'된다. 벌점과 상점의 기준이 자의적이라는 것은 제쳐 놓자.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권위주의적 문화는 모든 행동을 점수로 환산해서 계산할 수 있다는 포스트모던한 소비주의 논리와 결합하면서 더욱 강력해 지고 있는 것이다. 감옥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감시의 시선과 사람, 사람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자연까지도 화폐로 환산해서 계산하는 시장문명이 서로에게 자양분을 되면서 거대해지고 있는 것이다. 거대해 지고 있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은 일상에서 어린 학생들의 그것을 내면화하면서 더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학교 밖에서 어린 학생들이 보는 것은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어른들의 모습이다. 사회의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은 권력을 사적으로 남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도덕적인 흠집이 큰 사람들이 버젓이 장관이 되고 국회의원이라는 사람들은 틈만 나면 무책임한 막말을 쏟아낸다. 합리적인 토론과 민주주의를 학습할 기회는 없다. 이유 없는 살인과 폭력이 일상화 된 세상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강자가 약자에게 군림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처음부터 '다른' 생각과 해석을 차단당한 정답을 주입하는 교육에서 타자에 대한 배려와 소통은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자기 의견을 말하는 학생들에게 학교가, 교사가, 부모가 하는 말이라곤 '아직은 너의 의견을 말 할 때가 아니야, 대학에 가서 해도 늦지 않아'라는 말도 안 되는 억지일 뿐이다. 소위 사회 지도층이라고 으스대는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선도부가 아닐까? 도덕적인 정당성이나 지적 지도력이 아니라 단지 좋은 학교를 나오고 돈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대다수 사람들을 경멸적으로 바라보면서 눈 마주추기를 거부하는 학교의 선배들은 아닐까?
민주주의와 소통은 오랜 기간의 훈련을 통해서 얻어지는 고도의 능력이다. 본인의 주장을 명확히 할 수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잘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논리적으로 주장을 개진할 수 있어야 하지만 나의 논리가 비약일 수 있고 현실과 동떨어져 있을 수 있다는 오류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어른 들이 어린 학생들에게서 민주주의와 소통을 훈련할 기회를 빼앗은 결과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정치적 현실이다. 억지와 강변과 궤변을 난무하지만 논리적인 의견개진을 찾기 힘들다. 토론 프로그램은 넘쳐 나지만 서로가 의견을 나누고 합의에 이르는 것은 볼 수 없다. 권위주의적 교육의 피해자였던 어린 학생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면 가해자가 되는 악순환은 이렇게 비뚤어진 교육을 유지하는 실천에 그들을 동참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우리나라의 교육은 목표를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시대를 따라가지도 못하고 사회가 유지될 수 있는 최소한의 신뢰, 연대, 협력, 소통의 자질을 길러주기는커녕 파괴하고 있다. 현실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비판적으로 해석하며 창의적인 비전을 만들어 낼 가능성을 발전시켜주지는 못할망정 짓밟고 있다. 학교폭력이라는 노골적인 폭력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른들을 그대로 따라하는 '모방범죄'다. 강자와 약자, 선배와 후배, 기능인이 되어 가는 교사와 학생, 제왕처럼 군림하는 교장과 평교사 사이에는 은폐된 폭력이 논리가 작동한다. 학교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겨야만 산다는, 2등은 없고 1등만이 있다는 경쟁 논리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학생들은 좋은 대학에 가야하고 교사들은 학생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야 한다. 그리고 서로를 수단적 가치로 바라본다. 교사에게 학생은 월급을 받게 해주는 수단이고 학생에게 교사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다. 학생들은 교사를 스승으로 대해지 않고 '월급쟁이'로 바라보지만 층층이 서열화 된 권력을 공유하고 향유할 때는 공모한다. 그래서 너무 낡아서 스마트폰의 사회와는 어울리지 않는 권위주의를 유지하는데 동의한다.
권력은 아래로, 아래로 향한다. 더 약한 집단을 찾아서. 자기가 받고 있는 경쟁의 압박과 스트레스, 성적과 부를 기준으로 서열화 된 사회에서 느끼는 소외감을 해소할 어떤 연대와 소통의 근거도 없다. 그래서 그것을 해소할 거의 유일한 길은 자기가 받은 지배와 소외를 누군가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동물의 왕국을 견뎌내는 대다수 학생들은 '그들'이 바라는 것처럼 순응하고 복종하는 '훌륭한' 대한민국의 시민이 된다.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이것을 견디지 못하는 학생들이 세상을 버리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선도부'들은 그 학생들의 나약함을 비난하겠지만. 그래서 우리는 인간적이어서는 안 된다. 동료 인간에게 유대를 꿈꾸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다.
정말 우리 아이를 생각한다면, 침묵은 죄악이다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정치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궁금해진다. 그들은 교육이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정말 순응하는 정신과 육체를 훈육하는 것을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 않다면 학교와 교육의 붕괴를 인지하지 못할 수는 없다. 이건 단순히 학교교육의 붕괴가 아니다. 사회의 붕괴다. 소위 사회를 이끄는 엘리트집단은 자기들만의 리그를 만들고 권력과 부를 공유하면서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게 될 것이다. 군림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을 초등학교부터 체화시켰기 때문이다. 앞 세대의 어른들도 다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권력 앞에 나약해진 대다수 시민들은 불만을 갖더라도 표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순응하는데 익숙해 졌기 때문이고 자기 생각을 동료 시민들과 공유하고 집합적으로 행동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서 사이버공간에서의 '배설'과 '약자에 대한 공격'에서 억압된 욕망을 표출하게 될 것이다.
우리 아이들의 책임이 아니다. 권위주의적인 학교, 교사, 부모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 아이들은 아직 완전한 인격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을 완전한 인격체를 가진 시민으로 길러 내기 위해서는 '선도부'가 아닌 자유로운 의견개진과 토론이 필요하다. 정답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해석과 비판을 가르치고 실천하게 해야 한다. 지금 우리의 교육은 지도가 필요한 곳에서는 방임과 자율로 일관하고 자유와 자율을 주어야 할 곳에서는 낡은 규율과 권위를 고집하고 있다.
참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전통이 가진 아름다운 연대의 정신은 버리고 연줄과 권위의 악습만이 남아 있다. 근대적인 최소한의 합리주의는 버리고 성장과 파괴의 논리만이 여전히 강력하다. 포스트모던사회가 가져다 준 차이와 다양성의 인정은 온데간데없고 사는 집과 타는 차와 입는 옷에 따른 차별과 그 차별을 파하기 위한 낭비적인 소비주의가 팽배해 있다. 우리 아이들은 이런 현실에 비판적인 자세로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있다. 낡은 전통과 맹목적인 근대화의 논리와 무지막지한 경쟁적 소비주의로부터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는 집단이 그것을 조장하고 있고 대부분의 교사와 부모들의 부화뇌동하고 있다. 그들 또한 권위주의적 학교 교육을 통해 길러진 순응하는 육체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경쟁적인 소비주의 문화를 완벽하게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용기를 내야 한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정말 우리의 아이들을 생각한다면, 정말 우리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침묵하는 것은 죄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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