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문제가 등장하다
박근혜 외교의 민낯이 드러났다. 떨어진 지지율도 좀체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취임 초부터 국정 혼란이 가속될 때마다 외유를 통해 위기를 모면하던 방법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진짜' 문제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사드다.
필자는 이미 작년부터 사드 문제가 박근혜 정부의 유일한 치적으로 알려진 '외교'의 발목을 잡으리라는 것을 누누이 지적해 왔다. (☞지난 기사 바로 보기)
그런데 청와대는 그 동안 이 문제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해왔다. 심지어 국회와 언론이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경고할 때도 내 알바 아니라는 식으로 대처해 왔다. 그리고 결국엔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일대일로(一帶一路)와 사드 사이에서 한국의 선택은?
지난주 중국에서는 양회가 열렸다. 양회는 중국의 공식적인 두 최고 정치기구인 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로써 시진핑 집권 3년차의 국정 계획이 베일을 벗었다. 가장 눈에 띠는 것은 일대일로(一帶一路)다. 일대란 이른바 '신 실크로드 경제벨트'로서 중국의 서북부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을 잇는 육상 무역루트이고, 일로는 중국 동부에서 동남아시아, 인도양과 아프리카까지 연결되는 해상 무역루트다.
일대일로는 급작스럽게 만들어낸 정책이 아니다. 10년 전 중앙아시아 5개국을 포함한 상하이협력기구(SCO)가 창설될 때부터 구상된 것이고, 지금은 관련국이 14개국으로 늘었다. 시진핑 시대에 들어서는 2013년부터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순방에서 지속적으로 그 가능성을 타진하고 올해 본격적으로 국가의 근간 정책으로 천명된 것이다.
특히 이 정책은 지난 18기 3중전회에서 천명된 시진핑 시대의 핵심 전략인 서부대개발을 통한 도·농, 동·서, 계급간 불균등 해소와 일맥상통한다. 3중전회에서 시진핑 지도부는 개혁 개방 이후 심각해진 경제적 불평등, 지역적 불평등이 중국의 지속성장에 중대한 장애요소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이를 본격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국가적 규모에서 대규모 투자를 이끌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올해 양회에서 천명된 일대일로는 지속성장과 불균형 해소라는 국내적 과제를 성공으로 이끌기 위한 국제적 확장판인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당연히 이 대규모 프로젝트에 한국이 얼마나 참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한국은 세계경제에서 사실상 거의 유일하게 고도성장을 계속하고 있는 대규모 경제시장인 중국을 바로 곁에 두고 있으면서, 수교 이후 지난 30년간 정치적 부침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협력이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내용적으로도 한국은 중국과 수교이래 한번도 무역수지에서 적자를 기록한 적이 없고, 최근 들어서는 중국과의 무역수지 흑자가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서 적자를 모두 메우는 상황이다. 중국 입장에서 보면 한국의 전략적 가치 때문에 경제적 손해를 일부 감수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보면, 최근 내수 부진에 시달리고 있는 한국 입장에서 일대일로 프로젝트 참여는 실로 절실하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바로 이 시점에서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미국이 한국에게 대중국 군사견제에 동참하라는 노골적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측된 위기, 준비 안 된 정부
일반인들은 많이 잊어버렸겠지만, 중국의 방공식별구역 선포로 미·중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어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전개된 것이 불과 1년 여 전이다. 중국과 일본 간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 열도 분쟁도 과거에 비해 치열해졌다. 특히 대 중국 견제를 위해 일본의 우경화를 미국이 적극적으로 부추기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따라서 청와대에서 현재의 상황이 사드배치 문제와 관련한 일회성 사건으로 파악하고 있다면 큰 오산이다. 최근 몇 년간 동북아시아를 둘러싼 상황은 긴장과 타협의 연속이었다. 현 상황의 구조적 조건은 중국의 부상과 더불어 이미 오래 전부터 예견되어 온 것이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을 앞세운 미국의 견제가 작년에는 중국의 반격, 방공식별구역 선포로 나타났다면, 올해는 미국의 반격이 한반도 사드배치로 시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마치, 이런 일이 예상 밖의 상황이고 처음 겪는 것처럼 문제의식도 대책도 없이 표류하고 있다.
국익도, 전략도 없는 한국 외교
부상하는 중국과 아시아 회귀를 선언한 미국 사이에서 한국의 주체적이고 주도적인 외교정책이 없다면, 국가의 미래는 말 그대로 풍전등화다. 강대국 사이에 끼어서 이리 저리 치이다가 결국 그들 간의 밀약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고, 국토가 분단되고, 결국은 동족상잔의 전쟁에까지 이른 우리의 역사가 이를 잘 보여준다.
한마디로 패션쇼 외교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무디고 더딘 박근혜 정부의 외교실패는 기실 외교·안보·정보라인이 군출신들에게 독점되고, 청와대 실세는 문고리 측근과 검찰출신들로 채워지면서 이미 어느 정도 예상되었던 바다.
외교는 국익의 목표가 분명하고, 그것을 성취하고자 하는 전략이 뒷받침 될 때 성공할 수 있는 것이지, 대통령이 그 나라 책을 읽고 감동했다든지, 평소에 늘 고맙게 생각했다든지 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국가 간의 관계는 서로 추구하는 국익이 일치할 때 구원(舊怨)을 쉽게 잊고 협력하며, 서로 상충할 때는 어제까지의 친구도 적이 되기 십상이다. 하물며 이러한 국제관계의 냉혹함을 안보 일변도의 경직된 사고나, 몇 마디 말로 돌파할 수 있을리 만무하다.
영국과 중국의 최근 관계가 이를 잘 보여준다. 2012년 데이비드 카메론 영국 수상이 달라이라마를 만났다. 중국은 카메론 수상의 중국 방문 계획을 즉시 취소했다. 이례적이었다. 하지만 불과 1년 뒤, 카메론은 150명의 경제인을 대동하고 중국을 방문했다. 대신 중국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전, 일대일로 사업의 금융자원이 될 아시아인프라은행(AIIB)에 영국이 참여를 선언했다. G7중 처음이다. 미국은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이것이 외교다. 엊그제는 얼굴도 보지 않을 것처럼 하더니, 오늘은 서로 좋은 친구가 된다. 그 사이에서 주체적 노선 없이 눈치만 살피다가는 바보가 된다.
패션쇼는 그만,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외교를 모색해야
중국은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원한다. 한국에게는 기회다. 미국은 그런 중국을 견제하고 싶어한다. 사드 배치는 무엇보다 효과적인 군사적 대안인데다가, 2조 원에 육박하는 설치비용도 한국에 전가할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을 수 없다. 카드로 만지작거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양보해도 그만이다.
한국이 사드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가, 느닷없이 오바마가 중국 방문의 대가로 사드 배치 포기를 선언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미국과 중국이 극단적인 대립을 피하고자 하는 한, 동북아의 정세는 반복되는 국면적 위기와 그 해결을 통한 상호협력 강화로 나타날 것이다.
한국의 역할 없이 문제가 반복적으로 해결되면, 동북아에서 한국의 설자리를 잃게 됨은 물론 향후 한반도 문제 해결에서도 영향력을 상실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우연찮게 통일의 기회를 맞아서도, 우리가 원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강대국들의 입김에 좌우된 기형적인 통일을 하게 되기 십상이다. 그렇게 되면, 이 정부는 민족의 죄인이 된다. 그래서는 안 된다.
당장 사드 문제에 있어 주체적인 입장이 필요하고, 이를 토대로 중국과 미국의 입장을 중재하려는 적극적인 외교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현재의 난국을 제대로 헤쳐나가지 못한다면, '패션쇼 외교'의 폐해는 이명박 정부의 '자원외교'라는 사기극에 결코 못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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