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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쿠데타 이후, 미국은 어떤 역할을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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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전두환 쿠데타 이후, 미국은 어떤 역할을 했나

[문학예술 속의 반미] 미국, 광주 시민들과 전두환 군부 중재 거부한 까닭은?

V. 광주항쟁의 영향과 미국, 1980-1992

1. 1980년대 한국 정치와 미국 (1)

1978년 12월 박정희가 종신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유신체제 2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고무도장 같은 선거인단 투표에서 99.9%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국회의원 선거에서 의원 숫자는 여당이 많이 차지했지만, 야당인 신민당이 박정희의 민주공화당보다 더 많은 지지를 받았다. 야당이 승리한 데 이어 김대중이 곧 풀려남으로써 민주화운동이 큰 힘을 얻게 되었다.

물론 민주화운동은 야당에 대한 박정희의 더 혹독한 탄압을 불러오기도 했다. 앞에서 잠깐 얘기했듯이, 1979년 8월 약 200명의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들이 회사 폐업에 반대하며 신민당사에서 연좌농성을 벌일 때 1000여 명의 경찰이 난입했다. <뉴욕타임스> 1979년 8월 11~12일자에 따르면, 이에 20여 명의 야당 정치인, 당원, 기자들이 다치고 1명의 노동자가 죽었다.

1979년 10월엔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국회에서 쫓겨났다. <뉴욕타임스> 9월 16일 자로 보도된 인터뷰에서 박정희 정권을 "소수의 독재정권" (minority dictatorial regime)이라고 비난함으로써 긴급조치를 위반했다는 이유였다. 김영삼 의원의 제명은 국내외에서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다. 미국은 탄압에 대응해 주한미국대사를 소환했다. 김영삼의 정치적 고향이자 부산에서는 항의 시위가 대규모로 격렬하게 일어났다. 시위는 4월 혁명의 발상지이자 부산의 이웃 도시인 마산으로 번졌다.

'부마사태'로도 불리는 부산과 마산에서의 시위가 고조되는 가운데 박정희가 심복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었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한국 정부 수립 이후 최악으로 치닫는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미국이 자신의 배후에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되었다는 의혹을 불러일으켰지만 물증은 없었다. 미국이 개입했든 하지 않았든, 박정희의 18년 통치는 끝났고 7년 된 유신체제는 무너졌다.

1979년 12월 최규하 국무총리 겸 대통령 권한대행이 선거인단에 의해 대통령으로 뽑혔다.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가 해제되었다. 김대중이 가택연금에서 풀려나고 많은 야당 정치인들이 권리를 회복했다. 새로운 헌법 체제에 대한 토론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한국의 민주주의와 정치발전에 대한 커다란 희망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낙관적 기대는 서서히 사라져 갔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체포하는 군부 내 반란 또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1980년 봄까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신 군부'가 정권을 장악했다. 1980년 4월 전두환은 헌법을 어기고 보안사령관직을 유지한 채 중앙정보부장 서리까지 맡았다.

이에 대학생들은 계엄령 종식과 전두환 사퇴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전두환은 1980년 5월 17일 오히려 계엄령 확대를 선포했다. '5.17 쿠데타'였다. 국회가 폐쇄되고 모든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대학도 문을 닫고 공수부대원들이 캠퍼스를 점령했다. 김대중을 비롯한 수백 명의 정치인들과 학생들 그리고 민주화 운동가들이 체포되었다.

5월 17일 계엄령 확대 선포 이후 10일 동안 광주에서 심각한 대결이 일어났다. '광주 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학생들의 시위가 전개되자 계엄군은 공수부대원들과 함께 시위대와 구경꾼들을 닥치는 대로 때리고 찔렀다. 이에 충격을 받고 분노한 시민들이 학생 시위에 가담하고 경찰서에서 무기를 탈취해 광주시를 점령했다.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에 협상이 있었지만 결실은 없었다. 수천 명의 계엄군과 공수부대원들이 광주를 다시 침략해 항쟁을 잔인하게 진압했다. '광주 학살'이었다.

1980년 5월 '신 군부'는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상태에서 국가보위 비상대책 위원회 (국보위)를 설치했다. 8월 최규하가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전두환이 군복을 벗은 지 5일 만에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이렇듯 1979년 12월 전두환이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뒤 1980년 8월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미국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 한국인들은 의혹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첫째, 전두환은 1879년 12월 쿠데타를 위해 미군 사령관이 지휘하는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를 받는 9사단 병력 일부를 차출했다. 1980년 1월 일단의 장교들이 전두환 세력을 타도하기 위한 계획을 갖고 미군 사령관에게 접근했지만 그는 그들을 쫓아냈다.

둘째, 광주항쟁 당시 시민위원회가 미국대사에게 그들과 군부 사이의 휴전 협상을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미국 공보처에 따르면, 미국대사는 그러한 역할을 하는 게 부적절하고 한국 정부가 받아들이지도 않을 것이라며 중재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미국 관리들은 전두환이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에서 풀려난 20사단 병력 일부를 광주항쟁을 진압하는 데 동원하겠다는 제안은 받아들였다. 게다가 미국은 남한에 대한 지지를 북한에 시위하기 위해 두 대의 공중경보통제기 (AWACS)와 전투기 편대를 보냈다. 미국의 정보망은 북한의 이상한 움직임을 전혀 찾지 못했지만, 남한 군부의 요청에 따라 파견한 것이었다. 한편, 황석영의 보고에 따르면, 광주시민들은 미국이 전두환의 신 군부가 저지르는 학살에 반대해 그들을 도우러 올 것이라고 믿을 만큼 순진했다.

셋째, 1980년 6월엔 카터 행정부가 남한의 불안한 상황을 북한이 악용할까봐 미국 해군을 한반도 해역으로 파견했다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1980년 8월엔 위컴 (Wickham) 주한미군사령관이 미국은 남한의 군사정권을 지지할 것이며 한국인들은 누가 지도자가 되든 그를 따르는 '들쥐' (lemmings) 같다고 말했다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보도가 이어졌다.

이렇듯, 많은 한국인들은 미국이 전두환의 쿠데타와 학살을 통한 집권 과정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고 믿었다. 전두환이 한미연합사의 통제 아래 있는 병력을 이용하는 데 미국이 승인하거나 최소한 묵인했으며 그의 집권을 미국 관리들이 지지하거나 격려했다는 인식이 남한 사회에 널리 퍼졌던 것이다. 이에 미국 정부는 9년이 흐른 1989년에야 전두환의 쿠데타나 광주항쟁의 야만적 진압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사실이 무엇이든 미국의 개입에 대한 한국인들의 의혹을 씻기엔 미국의 해명이 너무 늦었다. 그 무렵 작성된 비밀 외교문서들이 완전히 해제되고 공개되어야만 전두환의 군사 쿠데타와 광주 학살에 미국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1960년 4월 혁명 직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미국이 이승만 정권의 붕괴에 어떠한 종류의 개입도 '전혀' 하지 않았다고 기자회견을 통해 강조했지만 그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수십 년 뒤 비밀 해제되어 공개된 미국 외교문서들을 보면 미국은 이승만 정권의 붕괴에 '흔히 그리고 과도하게' 압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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