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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부채 주도 성장'인가?

[시민정치시평] 가계부채 키우면서 소득주도 성장 꺼내든 정부 '안습'

정부는 한 번도 낙수 효과를 폐기한다는 공식 선언을 한 적이 없다. 그것을 한 번도 정부의 공식 경제정책의 기조로 선언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낙수 효과는 오래되고 공공연한 정부의 정책 기조였으며, 이제 공공연히 폐기 수순을 밟고 있다.

첫 번째 계기는 최경환 경제부총리 취임 직후였다. 지난해 8월 기획재정부는 '가계소득 증대 3대 패키지'를 세법 개정안 형태로 발표하였다. 낙수 효과에서 가계소득은 기업들과 부자들의 소득이 차고 넘치면 그 결과로 증대되는 것이었다. 그랬던 정부가 가계소득 증대를 조세정책의 독립적인 목표로 제시한 것이다. 두 번째는 낙수 효과 이론의 포기 선언이라 부를 만하다. 최근 최 부총리는 임금 인상, 특히 최저임금 인상 필요성을 꺼내 들었다.

이유는 분명하다. 바야흐로 지구 경제 질서를 주도해왔던 세계은행(IBRD), 국제통화기금(IMF) 등의 국제기구가 연달아 임금 인상과 가계소득 증대가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내고, 이 질서의 종주국이었던 미국, 영국, 독일, 일본의 정책 당국이 임금 인상 정책을 내놓는 시대에 들어섰다. 최소성장만을 동반한 장기 침체가 가까운 일본을 점령한 지 오래되었고, 지금 유럽을 휩쓸고 있으며, 이제 우리에게도 현실이 되었다. 낙수 효과는 없었고 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국내외적으로 더 이상 감출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해진 것이다.

낙수 효과 이론의 사망 선고

홍장표 부경대 교수가 최근 발표한 '소득주도 성장전략의 정책과제'에 따르면, 가계소득과 기업소득은 2000년대 초반 이후 완연한 반비례 관계에 들어섰다. 생산의 세계화와 그룹 계열사 위주 원자재 조달로 인해 국내 산업 연관이 깨지면서 수출대기업의 생산유발 효과는 기대치 이하로 나타났다.

2014년 기준으로 기업이 분배하거나 재투자하지 않고 쌓아둔 잉여금이 이미 1000조 원을 넘어서 같은 해 이미 1089조 원을 돌파한 가계부채에 맞먹는 규모라는 분석이 있다. 모든 실증 데이터를 넘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고달픔과 미래에 대한 깊은 불안은 낙수효과라는 거짓 환상에 더 이상 속을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제 겨우 담론의 수준이지만 낙수 효과의 폐기와 소득 주도 성장론의 등장은 의미가 가볍지 않다. 전후 유럽의 복지국가는 완전고용-소득 증가-소비 증가-생산 증가라는 선순환 모델로 기획되었고, 이 '성장 기계'는 실제로 상당 기간 작동하였다. 여러 층위에서 노동조합의 힘을 제도화하는 것이 이 모델에서 필수였다. 따라서 소득주도 성장론은 바닥에 떨어진 노동의 교섭력을 높여야 한다는 해묵은 주장에 약간의 사회적 관심을 기울이게 만들 것이다.

재분배 영역에서도 보편 복지의 필요성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소득 주도 성장을 꺼내든 정부가 기왕의 사회적 합의였던 급식과 보육 복지를 파괴하려 한다면 OECD 최저 수준의 '복지 때문에 나라 망한다'는 주장보다 말발이 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정부가 소득 주도 성장으로 경제정책의 무게 중심을 옮겨갈지는 사실 비관적이다. 포장지에 쓰인 것과 달리 가계소득 증대 3대 패키지 안에는 가계소득을 증대시킬 실효적인 정책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오히려 조세 정의를 훼손하고 소수 부자들에게 이득이 되는 다수의 정책이 담겨 있었다. 계급과 계층의 이해를 조정하는 정치 과정에서 국회를 포함한 국가기구가 소수 부자들과 대기업을 편드는 행태는 거의 자기 완결적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이 구조를 민주화하는 일은 현재로썬 지난한 일이다. 장기 침체가 현실화되는 다급한 상황에서 정부 스스로 불을 붙인 최저임금 인상도 가계소득 증대 3대 패키지와 같은 빛 좋은 개살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제 말 꺼낸 임금 인상, 부채는 저 멀리

이것보다 더 근본적인 우려는 정부가 임금 인상 필요성을 꺼내 들었으면서도 기존의 '부채 주도 성장' 정책을 재검토할 의사가 전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정부가 가계소득 증대 3대 패키지를 내놓은 2014년 8월 바로 그때부터 LTV(담보인정비율)-DTI(총부채상환비율) 규제 완화가 시행됐다. 2014년 국내 은행의 주택담보 대출 중 8월부터 12월까지 4개월 동안의 증가액이 2014년 전체 증가액의 66%(24.8조 원)를 차지했다. 4개월의 증가분이 2012년과 2013년의 주택담보 증가분 합계액 23조 원보다 크다. 정부는 이것도 모자라 얼마 전에는 대출자의 소득 제한 규정을 아예 없앤 '1%대 초저금리 수익공유형 모기지' 상품을 내놓았다.

한국은행통계청․금융감독원의 '2014년 가계 금융·복지 조사' 자료에 따르면 주택담보 대출 등으로 2014년 가계의 원리금 상환 부담액은 전년 대비 16.1% 증가했다. 종료가 선언된 미국의 양적 완화가 언제 어느 수준으로 한국의 금리 인상으로 돌아올지는 아직 분명치 않지만, 낙수 효과와 달리 금리 인상은 확실히 찾아올 것이고 그 효과도 분명할 것이다. 정부가 부동산 경기 활성화를 이유로 지금처럼 가계 부채의 증가를 방치한다면, 임금 인상이 결코 소득 주도 성장이 의도하는 가계가처분 소득의 증가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란 의미다.

파견 업종을 확대하고 기간제 사용 기간을 현행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하는 내용의 비정규직 종합대책 역시 소득 주도 성장과는 완전히 반대 방향의 정책이라는 것을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노동의 교섭력은 계속 억누르면서 임금은 올려보겠다는 것으로 보이는데, 정부가 손을 댈 수 있는 수단은 최저임금뿐이며, 이런저런 정치적-산업적 이해관계의 사슬과 그 연관 효과의 기술적 복잡성을 고려하면 최저임금의 인상 폭은 현재로썬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소득이 주도하든 부채가 주도하든, 성장론 자체는 경제 과정을 '성장 기계'로 설계하고 이 기계가 멈추면 모든 경제 주체들이 파국을 맞는 체제의 산물이다. 그 모순과 한계를 거론하는 것이 이 글의 주제는 아니다. 다만 성장론 자체에 내재된 논리는 성장을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수단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경제문제의 해결책으로 선험적으로 가정한다는 것, 그래서 성장에 대한 맹목적 집착이 정책 조합의 심각한 모순을 만든다는 점은 지적될 필요가 있다. 일례로, "규제를 단두대에 보내자"는 대통령의 서슬에 따라 대규모의 규제 완화가 추진되고 있는데 규제완화는 경제 활성화, 즉 성장률을 높이자는 상위 목표에 따라 추진되고 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최저임금제도는 노동시장의 대표적인 규제 정책이다!

복지와 안정적 노동 소득의 해체를 겪은 각국에서 소비 수준의 유지 확대 수단으로 가계 부채가 지속적으로 증가했으며, 그 결과는 저소득 계층에서 자산가 계층으로의 소득의 이전이었다. 정부가 마지못해 꺼내 든 임금 인상이 현재의 가계 부채 정책, 노동시장 정책과 병행한다면 소득 주도 성장론이 애써 그리는 가까운 미래는 "조금 오른 임금을 빚 갚는 데 쓰는", 지금만큼 고달픈 사람들의 모습이다. 가처분소득을 늘리는 것이 소득 주도 성장의 실체인데 현재 정부의 접근은 가계에 임금의 인상 폭을 뛰어넘는 빚을 지우는 것이다.

※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기획·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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