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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미 운동가는 왜 시인이 돼야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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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미 운동가는 왜 시인이 돼야 했나

[문학예술 속의 반미] 1970년대 문학예술 속의 추한 미국

IV. 1970년대 문학예술 속의 추한 미국

4. 유신체제에서의 반미 시

유신체제 아래서 많은 민주화운동 활동가들은 시인이 되었다.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민족주의나 반미주의를 고취하는 시를 썼다. 시는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에 대한 투쟁의 유용한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김지하는 1974년 감옥에 있으면서 담시 <분씨물어>(糞氏物語) 를 발표했다. 그해 7월 긴급조치 및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곧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옥살이를 할 때였다. 나중에 <똥바다>로 제목이 바뀐 이 장편의 담시 또는 창작판소리는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풍자하고 조롱하는 내용이다. 그러면서 한인들이 ‘양키들’에게도 짓밟힌 역사에 분노하는 등 외세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대목이 적지 않다.

고은은 한반도의 통일을 염원하며 많은 시를 발표했다. 특히 <성욕>에서는 아래와 같이 다소 외설적인 어휘들을 구사하며 분단과 전쟁에 따른 한국인들의 희생과 고통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우리 성욕은 / 팔일오 과부들을 밤나무 밑에서 쓰러뜨렸어
그래서 그 해 밤송이들이 / 하지 중장 앞에서 쩍쩍 벌어졌지
할로오케 까뗌 시비시비 / .....
우리 성욕은 / 육이오 갈보들을 마구잡이 쓰러뜨렸어
그것 없이는 소위 자유세계가 아니었어
친구들 다 몰려가서 총알받이로 죽어버렸어
에레나! 네 이름은 순자였어 / 팔군 털보 / 또는 내가 낳은 검둥이

양성우의 <노예 수첩>은 1970년대 발표된 가장 격렬한 반미 시 가운데 하나다. 그는 이 작품을 발표하기 전 1975년 2월 광주에서 열린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석방 환영대회'에서 <겨울 공화국>이란 시를 낭독해 다음 달 3월 그가 몸담고 있던 여고에서 파면되었다. 유신체제 하의 남한을 '얼어붙은 땅 (동토)' 또는 '겨울 공화국'으로 비유했기 때문이다. 그다음 달 4월 정보기관의 강요에 따라 광주를 떠나야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그해 12월 500행이 넘는 장시 <노예 수첩>을 발표했다. 박정희 유신정권에서의 삶은 노예생활과 다름없다는 내용의 작품 가운데 13장을 아래에 소개한다.

가라 / 양키들아 쪽발이들아 / 금강산도 한라산도 / 우리 것이다
가라 / 벌레들아 이방인들아 / 봄 가을 불어오는 황토바람도
산비탈에 졸고 있는 돌멩이들도 / 우리 것이다 이방인들아
어떤 자가 이 땅에 잘못 태어나서 / 흉악한 병정들을 불러들이고
그들의 군복 속에 웅크려 살며 / 강과 산을 바닥까지 / 넘겨 주었느냐
가라 바다 건너 너희들의 땅 / 너희들의 소굴로 / 흩어져 가라

이 시로 그는 감옥에 갇혔다. 국가 모독 및 긴급조치 위반이란 죄목으로. 그리고 1980년대엔 전두환의 군사독재에 저항하다 1988년 4월 서울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김명식은 1976년 은밀하게 배포한 <10장의 역사 연구>에서 미국을 한반도를 "동강내는 마귀"로 부르며 미국인들을 "코 크고 노랑내 나는 놈들"로 묘사했다. 당연히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고 긴급조치 위반으로 옥살이를 했다. 그리고 훗날 다음과 같이 썼다.

"1961년 5월 16일 군부는 쿠데타에 의하여 이 민족의 새날을 열기 위한 민중의 의지를 꺾고, 제국 아메리카는 민족분단 정책을 집행할 하수인으로 박정희를 선택한다.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군부는 .....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영역에 성조기를 펼쳐, 일본에 이 땅을 통째로 바쳐 드려야 했던 그 습성 그대로 이번에는 이 땅을 제국 아메리카에 바쳐 드렸고, 제국 아메리카의 동북아시아 지배전략 수행을 위해서 38선 이남 전역을 군사 전초기지로 만들어놓고 말았다..... 나는 제국 일본의 침략사와 제국 아메리카의 점령사는 이 땅 구석구석에까지, 감옥 안 0.7평 독방에까지 스며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백기완은 1979년 <진술 거부>를 발표했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잔혹한 고문을 당하며 '몸서리치는' 고통을 고백한 내용이다. 이 작품은 그가 "모진 고문 속에서도 끝내 민족적 원칙, 해방통일의 원칙을 확인해낸 무수한 투사들에게" 바치는 비나리다. 4, 5연만 옮긴다.

내 손톱까지 빼더니 / 두 무릎을 뒤 꺾고 / 제껴진 고개에
미제의 썩은 물을 / 한 없이 쏟아붓던 / 이 망종들아
양놈들은 / 조국을 가르더니 / 네 놈들은 마침내 / 내 허리를 뿐질러

한무학은 <조국은 아직 먹구름 모양 여기 묵묵하다만>에서 한미 관계를 마르크스 관점에서 인식했다. 그는 풍자적으로 물었다. 한국은 원조를 받기만 하는데도 왜 더 못 살게 되고, 미국은 원조를 주기만 하는데도 왜 더 잘 살게 되느냐고. 미국이 '원조'라는 구실 아래 한국을 착취한다는 사실을 암시한 것이다.

김명인은 1979년 첫 시집 <동두천>을 펴냈는데, 여기에 실린 <베트남>과 <동두천>이라는 제목의 연작시를 통해 미국을 은근히 비판했다. <베트남>에서 그는 미국인들이 베트남에서 했던 대로 한국 민중을 반복해서 모욕하고 있다고 분노를 드러냈다. <동두천>에서는 한국인들에게 혼혈아들을 갖게 하는 미군들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다. 문학평론가 박철희의 표현대로 한반도의 고통스러운 분단과 한국전쟁의 영향에 따른 깊은 정신적 상처를 묘사한 것이다.

실제로, 이미 앞에서 지적했듯, 혼혈아들은 주한미군의 '부정적 부산물'이었다. 1970년대까지 그들의 수는 약 3만에 이르렀다. 서울신문사에서 1979년 펴낸 <주한미군 30년 : 1945-1978>에 따르면, 이들 대부분은 미국에 입양되었고 약 10퍼센트만 한국에 남았다. 그들은 단일민족을 강조하며 자민족 중심주의가 매우 강한 한국사회에서 따돌림을 받았고, 궁극적으로 사회문제가 되었다.

예를 들어, 1946년 부산에서 태어난 한국 역사상 최초의 혼혈아는 동료들의 조롱 때문에 중학교 1학년 때 중퇴하고 미군부대 근처 범죄조직에 들어갔다. 그러나 한국인들에 대한 미군들의 범죄는 그가 성장하면서 반한적이 되기보다는 반미적이 되도록 이끌었다. 이에 따라 그 범죄조직의 두목이 된 이후 그는 특히 양색시를 비롯한 한국인들을 상대로 비행이나 폭력을 저지르는 미군들에게 린치를 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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