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세(增稅)'란 무엇인가?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말 그대로 '세금을 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정부가 말하는 증세와 국민들이 생각하는 증세는 서로 다른 뜻인가 보다. 국민들은 세금이 올라갔다고 야단인데, 정부는 당분간 "증세 없는 복지" 기조를 유지하겠다고 한다. 우리 국민들이 체감하는 세금은 많아졌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증세를 "국민을 배신하는 행위로서 여태까지도 증세는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통계로 살펴본 "증세 없는 복지"의 허구성
1) 사실상 증세
지난달 기획재정부에서 발표한 '2014 회계연도 세입·세출 마감 결과'를 보면, 지난 한 해 걷힌 근로소득세는 25.4조 원으로 2013년 대비 3.4조 원 증가했다. 이에 대해 정부는 2013년도 세법개정 효과로 인한 1조 원을 제외하면 나머지 증가분은 임금 상승과 취업자 증가로 인해 자연스럽게 늘어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2013년도 자료와 비교하여 살펴보자.
기재부의 최근경제동향을 보면, 2013년 대비 2014년도 상용근로자(고용기간이 1년 이상인 안정적인 근로자) 수는 44.3만 명 증가한데 비해 2012년 대비 2013년도에는 61.5만 명 증가했다. 상용근로자의 월평균임금을 보더라도 2013년 대비 2014년도에는 2.3%가 상승한 데 비해, 2012년 대비 2013년도에는 3.8% 상승했다. 반면에, 2012년 대비 2013년도 근로소득세의 증가분은 2.3조 원에 그친다.
요컨대, 2014년에 비해 2013년에 더 많은 사람들이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았고 임금인상률도 더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근로소득세 증가분은 더 낮다. 결과적으로 2014년도 근로소득세가 3.4조 원이나 증가한 것은 대부분이 세제개편으로 인한 증세효과인 것이다. 여기에 담뱃세 및 주민세의 인상까지 포함하면 증세효과는 더 커진다.
2) 변함없이 미약한 복지
그러나 이에 비해 복지지출은 미약하기 짝이 없다. 2015년 정부예산 376조 원 중에서 복지지출의 규모는 115.5조 원으로서 처음으로 30%를 넘어섰고, 그 증가율 역시 지난 5년(2010-2014) 연평균 증가율인 7%보다 높은 8.5%에 이른다. 얼핏 보기에 복지지출 역시 늘어난 것 같다. 그러나 이 대부분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우리 사회의 고령화로부터 기인한 자연증가분이다. 연금 수급자이자 의료서비스를 가장 많이 이용하는 노인 인구가 증가하면서 공적연금 지출과 국민건강보험에 대한 정부 몫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내년도 복지 분야 정부지출 증가분인 9조1000억 원 중에서 공적연금이 3조 2,548억 원, 국민건강보험 국고지원이 7754억 원을 차지하고 있다. 즉, 복지지출 증가분의 약 절반이 자연증가분이다. 나머지 증가분 중 2조3823억 원은 법에 따른 기초연금 예산의 증가분(장애인연금 포함)이다. 기초연금이 작년에는 7월부터 지급되었으나 올해는 12개월분 전체가 지급되기 때문에 복지지출 증가율을 끌어올렸다. 기초연금이 대선공약 이행 과정에서 대폭 후퇴하면서 애초의 취지인 노인 빈곤 해소를 달성하기 어려울 정도로 축소되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처럼 국민연금과 국민건강보험의 증가분을 제외하면 복지지출의 증가분은 약 2조 원에 불과하다. 심지어 보육·가족·여성 예산은 약 3788억 원이나 줄어들었고, 지난 대선공약이었던 고교 무상교육은 아예 예산 배정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이미 작년부터 시행되었던 기초연금의 예산 증가분을 제외하면 올해 복지지출 증가율은 6%로서 지난 5년보다 낮은 수준이다. 결과적으로 세금은 늘어나는 데 비해 우리 사회의 복지 수준은 여전히 미약하다.
'서민증세, 그리고 없는 복지'의 공포
이처럼 현 정부의 "증세 없는 복지"는 중산층과 서민의 세금은 늘어나되 복지는 여전히 부실한 '서민증세, 그리고 없는 복지'라고 볼 수 있겠다. 문제는 그 후속 효과이다. 이번 연말정산 논란에서 '왜 월급쟁이들의 주머니를 털어 가냐?'는 반발이 일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중산층과 서민증세, 그리고 없는 복지'는 세금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을 야기한다. 세금은 복지를 위한 공동재원이라는 점에서 이런 불신은 향후 한국이 보편적 복지를 확충하고 역동적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데 장애물이 된다. 세금에 대한 불신은 다음의 두 가지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다.
1) '월급쟁이들의 주머니' - 세금의 형평성 문제
'월급쟁이들의 주머니'를 털어간다는 것은 소위 '유리지갑'으로 불릴 만큼 소득이 다 공개되는 근로자들에게만 세금 부담을 가중시킨다는 비판이다.
위의 표는 우리나라 국세수입을 주요 세목을 중심으로 편집한 것이다. 이를 살펴보면, 근로소득세가 가장 큰 폭으로 증가했고, 법인세와 이자소득세는 감소했다. 그리고 증권거래세와 종합부동산세는 현상을 유지하거나 약간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기재부에 따르면, 이들 세목의 세수 감소의 원인은 기업의 영업이익 하락과 저금리, 그리고 주식시장의 부진이다. 다시 말해 경기불황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결과로부터 '회사가 내는 세금은 줄었는데, 회사원이 내는 세금은 늘었다'는 비판이 나오듯이 국세의 감소분을 근로소득세로 메꾸려는 게 아니냐는 반발이 일고 있다. 특히 예전부터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 일감몰아주기 과세의 약화, 혜택이 지나친 가업상속공제제도, 일정 수준 이상의 금융소득에 대해서만 종합소득세 과세 등의 기업 및 자산가들을 위해 시행된 기존 정책들과 맞물려 현 조세제도가 '정의롭지 못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소득이 제대로 공개되지 않는 고소득 자영업자들의 탈세 문제 또한 근로소득자들과의 형평성 문제를 일으킨다.
2) '털어간다' - 세금과 복지의 괴리
이와 같은 세금의 형평성에 대한 불신은 국가가 월급쟁이들의 주머니를 '털어간다'라는 불만으로 이어진다. 즉, "국가가 우리 월급쟁이들의 주머니로부터 돈을 빼앗아만 갈 뿐 혜택으로 돌아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복지지출은 사상 처음으로 정부의 총지출에서 30%를 돌파했는데, 왜 국민들은 체감하지 못할까? 그 이유는 바로 현재의 조세구조로는 복지제도를 정비하기에 턱 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국민부담률(조세부담률+사회보장기여율)은 약 25%로 OECD 평균 34%에 비해 현저히 낮다. 평균임금을 받는 1인 가구 노동자의 실효세율은 5.1%에 그쳐 OECD 평균 15.5%에 비해 크게 낮은 수준이다. 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공제제도로 인해 근로소득세 대상이 되는 인원은 급여를 받는 총 인원의 67.6%이다. 즉, 근로소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득세를 납부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전체 근로소득자의 약 1/3 이나 된다.
법인세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의 법인세 명목세율은 24.2%인데 비해 실효세율은 16.8%에 불과하고, 특히 10대 대기업들의 실효세율은 10.7%에 그친다. 특히 우리나라 기업들이 부담하는 사회보장기여금의 비중은 GDP 대비 2.6%로 OECD 평균의 절반에 불과하다. 이처럼 작은 세입 규모로 인해 'GDP 대비 정부의 총지출'은 30.2%로, 42.7%인 OECD 평균과는 큰 차이가 난다. 요컨대, 애초에 내는 세금 자체가 작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조세제도로는 정부가 쓸 수 있는 재정 규모 자체가 너무 작고, 그래서 복지 혜택은 미미하다.
얼마 전 한국일보와 한국재정학회가 공동으로 실시한 '세금·복지 관련 대국민 인식조사'의 결과를 보면, 세금을 추가로 낼 의향이 없는 이유로 가장 높은 응답이 나온 것은 '세금이 적재적소에 쓰이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38.4%). 그 다음의 이유로는 '결과적으로 부자감세, 서민증세로 느껴져서'였다(27.6%). 결과적으로 형평하지 않은 조세제도와 세금과 복지에 대한 괴리로 인해 발생한 국민의 불신이 조세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근본적인 원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금이란 복지국가의 공공재를 함께 구매하기 위한 공동재원이다. 공동으로 부담하면 '규모의 경제' 원리에 의해 공공재를 보다 저렴한 값에 효율적으로 구매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비용을 공동으로 부담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연대'의 원리는 공동체를 더욱 더 결속력 있고 강인하게 만든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모든 국가들에서는 '세금'이라는 제도를 통해 국민들에게 비용 부담을 강제하는 동시에 공공재를 공급해왔던 것이다. 북유럽의 복지국가들이 높은 조세제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높은 세금을 거두는 만큼 양질의 복지 혜택을 온 국민에게 제공하면서 튼튼한 정치공동체를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금에 대한 불신이 크게 존재하는 한, 복지국가로 가는 길은 요원해진다. 즉, 박근혜 정부의 "증세 없는 복지" 기조가 그대로 유지되면 중산층과 서민의 세금 부담은 늘어나지만, 이에 비해 복지제도의 정비는 어려워질 것이다. 극심한 소득양극화, 50%에 육박하는 노인빈곤율, OECD 국가들 중 자살률 1위의 불안전하고 비틀대는 사회가 지속되는 것이다.
세금에 대한 신뢰 회복하기: 복지국가 증세의 공론화
따라서 우리는 세금에 대한 불신을 치유해야 한다.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공동으로 책임을 부담하는 '연대'의 원리가 작동하는 방식으로 조세제도를 바꾸어야 한다. 역동적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복지국가 증세의 길이 바로 그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조세제도를 개편할 필요가 있다.
첫째, 조세의 형평성을 개선해야 한다. 소득이 공개되는 근로소득자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도록 소득 종류 간의 형평성, 소득세와 법인세 간의 형평성을 달성해야 한다. 현재 금융소득의 경우에는 연소득 2000만 원을 초과하지 않으면 14%의 원천징수만이 이루어질 뿐이다. 이 같은 금융소득과 연간 44조 원에 이르는 주택 임대소득은 불로소득인 만큼, 이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고 고소득 자영업자들의 소득탈루 행위도 적절히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현재 38%인 소득세 최고세율에 비해 22%에 불과한 법인세 최고세율 또한 인상하여 최고세율 간에 나타나는 격차를 다소 완화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OECD 국가들 평균에 비해 지나치게 낮은 기업의 사회보장기여금 수준도 높여야 한다. 이처럼 기업들의 부담을 증가시키고자 하는 경우에는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하는데, 국내의 여러 연구에 따르면 법인세가 기업의 투자에 미치는 영향이 그다지 크지 않다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증세 조치들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별로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둘째, 이처럼 조세의 형평성이 개선되고 나면 누진적인 보편 증세로 이어져야 한다. 그래야 보편적 복지와 복지국가를 위한 필요 재원을 제대로 확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일부 부유층에게만 세 부담을 강화한다면 재원 확충의 측면에서 충분하지 않을 뿐더러 계층 간의 갈등을 유발할 가능성도 높고, 결국 지속가능성이 떨어진다.
소득세 및 법인세의 불필요한 비과세 및 감면 제도를 축소하여 실효세율을 높이고, 장기적으로는 소득 관련 세제의 명목세율을 조정하여 모두가 누진적으로 조금씩 더 내는 보편적 증세 구조로 나아가야 한다. 이와 동시에 투명한 지출구조를 확립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들이 '내가 내는 세금이 어디에 사용되고 있는지' 알 수가 있어 세금에 대한 신뢰가 확보될 수 있다.
정부의 '증세 없는 복지'의 허상을 본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중부담-중복지"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제1야당도 더 이상 "세금폭탄론"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 세계적으로 최저 수준의 극단적으로 낮은 출산율과 가장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고령화의 추세 속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의 유지와 건강한 발전을 위해 증세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어떻게 증세를 추진할 것인지, 어떻게 해야 증세의 효과가 국민들 모두에게 돌아갈 수 있는지, 이 두 가지를 실천적으로 고민하는 것이다. 밑 빠진 독에 계속 찔끔찔끔 물을 부어 낭비할 것인가? 아니면 능력에 따라 누진적으로 모두가 다 함께 부담을 늘려 새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울 것인가? 결국, 역동적 복지국가의 길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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