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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반미' 카드 꺼내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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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반미' 카드 꺼내든 이유?

[문학예술 속의 반미] 1970년대 문학예술 속의 추한 미국

IV. 1970년대 문학예술 속의 추한 미국

2. 1970년대 평론 속의 미국

1976년 한국과 미국 정부 간의 긴장이 고조되자 여당 정치인들과 친정부 지식인들은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정부 차원에서 반미주의를 대미 외교를 위한 도구로 삼는 '도구적 반미주의' (instrumental anti-Americanism)의 표출이었다. 신상초와 봉두완이 월간 <세대> 1976년 5월호에 기고한 글이 대표적이다.

언론인 출신으로 박정희에 의해 뽑힌 유정회 국회의원 신상초는 베트남의 공산화를 '세계 제국'으로서의 미국이 퇴각하는 극적인 상징으로 간주했다. 그는 공산주의의 위협이 생사와 관련된 문제이기에 한국에서 자유와 인권을 제한하는 것은 국가의 존속 자체를 위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종주국'인 미국이 인권문제와 군사원조를 연계하여 '미국의 속국'인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것은 신식민주의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는 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므로 한국에서 '양키 고 홈 운동'이 전개되더라도 미군은 한국에 지속적으로 주둔하기를 원한다고 주장했다.

언론인 봉두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방대한 양의 미국 원조를 받아온 동맹국들 대부분이 반미적이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한국도 반미적이 될 수 있다고 미국에 경고했다. 그는 프레이저 미국 하원의원이 1974년 주도한 한국의 인권 문제에 관한 의회청문회를 비난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의 안정과 안보에 가장 큰 위협이라고 주장한 <워싱턴 포스트> 1976년 3월 19일자 사설이 유치한 감정이나 편협한 견해의 분별없는 비평과 공산주의자들이 하는 비방 중상으로 가득 차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미국에서의 인종차별을 들먹이며 한국의 인권 문제에 대한 미국의 비판을 조롱하기도 하고, 북한의 위협 때문에 남한에서는 국가안보와 생존이 절박하고 치명적이라며 '한국적 민주주의' 즉 유신체제를 지지했다. 나아가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 원조가 누구를 위한 것이냐고 물으면서,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는 것은 두 나라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신체제 아래서 평론을 통해 미국에 대한 비판이나 반외세 민족주의를 표방한 다른 주제는 주로 미국의 문화적 침투에 관한 것이었다. 흔히 1970년대 중반 <세대>나 <뿌리 깊은 나무> 등의 월간지에 실렸다.

진덕규는 한국인들이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기 어려울 만큼 너무 미국식으로 변해왔다고 한탄했다. 조세형은 '미국식 평등'을 비꼬며 '백인 영국계 개신교도 (와습)'들이 지배하는 미국사회의 인종 차별을 비판했다. 참고로, 미국은 흑백 차별뿐만 아니라 백인 중에서도 차별이 심한 나라다. 피부색으로는 백인, 인종으로는 영국계인 앵글로색슨, 종교로는 개신교도를 가리키는 '와습'(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이 지배하는 사회인 것이다.

예를 들어, 그가 이 글을 발표한 1976년엔 미국에서 38대 대통령까지 나왔는데 이 가운데 와습이 아닌 사람은 케네디가 유일했다. 그는 백인이긴 했지만 아일랜드계 구교도 또는 가톨릭 교도로서 소수계였던 셈이다. 이 글을 쓰는 2015년엔 44대 대통령까지 나오는 가운데 예외가 한 사람 더 생겼으니 현재의 오바마 대통령이다.

조세형은 한국과 미국 정부 간의 외교적 갈등이 심화하는 것을 지켜보며, 다른 글에서, 두 나라 사이엔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다양한 갈등이 존재해왔지만 그러한 잠재적 갈등이 한반도 해방 이후 '특별한 상황' 때문에 표출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인들이 미국에 대한 환상적인 생각을 떨쳐버려야 한다고 충고하기도 했다. 미국이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은 자신의 국익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1905년 일본과 비밀협상을 통해 조선을 일본에 넘긴 '태프트-카쓰라 밀약'이나 미국의 인종차별 및 배타주의 등을 잘 알아야 한다고도 했다.

한앵보는 19세기 선교사들과 20세기 군인들을 비롯한 미국인들이 한국에서 보여준 오만방자한 특성을 비꼬았다. 김용권과 오도광은 각각 주한미군을 통해 미국의 저속한 대중문화가 침투하는 것에 분개하면서 왜 한국은 "양키 고 홈"이 거의 외쳐지지 않는 '유일한' 나라로 남아있는지 의문을 던졌다. 이규행 역시 미국의 원조가 끼치는 부정적 영향을 설명하면서 왜 한국은 미국의 원조를 받는 거의 모든 다른 국가들과 달리 "양키 고 홈"을 외치지 않는지 물었다. 김실동은 두 편의 글을 통해 한국에서 미군과 결혼해 미국에 건너가 인종차별에 고통당하는 한인 여성의 비참한 생활을 꼬집었다.

실제로 나는 김실동이 이 글들을 발표한 1979년부터 15년이 더 흐른 뒤에도 미국과 한국에서 이러한 여성들을 적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1994년까지 의정부와 동두천 등의 기지촌에서 만나본 양색시들은 대부분 미군과의 결혼을 가장 큰 인생 목표 가운데 하나로 삼고 있었다. '운좋게' 미군과의 결혼에 성공해 미국으로 건너가면 남편 가족들로부터 멸시당하기 쉽다. 심지어 자식들로부터도 언어소통이 활발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외면당하거나 차별당하기도 한다. 결국 이혼까지 당하고 대개 한인들이 불법적으로 운영하는 유흥업소에 몸을 맡겨 사회문제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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