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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인권외교', 카터 방한이 욕먹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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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인권외교', 카터 방한이 욕먹은 이유

[문학예술 속의 반미] 1970년대 문학예술 속의 추한 미국

IV. 1970년대 문학예술 속의 추한 미국

1. 1970년대 한국 정치와 한미 관계

1961년 5월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독재정치를 지속적으로 강화했다. 1969년 10월 대통령을 세 번 할 수 있도록 헌법을 고쳤다. 이른바 '3선 개헌안'이다. 1971년 4월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긴 했지만 투표와 개표에 엄청난 부정이 저질러졌으니 야당후보 김대중이 이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1971년 12월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킨다는 구실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1972년 10월엔 비상계엄령을 발동하고 국회를 해산했다. 대학도 폐쇄하고 언론을 탄압했다.

1972년 11월엔 헌법을 다시 고쳤다. 93% 투표율과 92% 찬성으로 통과된 소위 '유신헌법'이다.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까지 뽑을 수 있는 장치까지 마련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1972년 12월 박정희는 종신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가장 혹독하고 암울한 '유신독재' 또는 '한국적 민주주의'가 시작된 것이다.

1973년 8월엔 일본에 머무르던 김대중을 납치해 죽이려다 실패하고 집에 연금시켰다. 1974년 1월부터 1975년 5월까지 '긴급조치'가 9번이나 발동되었다. 유언비어를 퍼뜨리기만 해도 법관의 영장 없이 긴급하게 체포되었고, 헌법을 바꾸자고 주장하기만 해도 긴급하게 구속되었다. 막걸리 한 잔 마시면서 정부를 조금 비판해도 어디론가 끌려갔다. '막걸리 보안법'이란 말이 생겼던 배경이다. 각급 학교에 학생회가 폐지되고 학도호국단이 들어섰다. 민방위대도 만들어져 거의 모든 남성들이 50세까지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야말로 '병영국가'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운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독재정권의 가혹한 탄압으로 직접 항의시위를 벌이기 어렵게 되자 저항 세력은 지하에서 은밀하게 운동을 펼치거나 문화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형태의 저항운동이었다. 예를 들어 학생들은 저항의식을 고취시키는 탈춤 같은 전통문화나 민속예술을 부활시켰다. 전통 탈춤에서 억압자로 풍자되는 대상은 유신체제와 미국 등이었는데 특히 미국은 한국 민중에 대한 착취자로 간주되었다.

1974년 11월 시인 고은을 비롯한 진보적 작가들은 민족문학운동 단체인 <자유실천 문인협의회>를 만들어 인권을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 그들은 비판적 현실주의를 바탕으로 산업화의 모순과 자본주의의 역효과 등을 꼬집었다. 한반도 분단으로 초래된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는 민족문학을 주창하기도 했다. 또한 그들은 종속이론이나 해방신학 같은 급진적 사상에 영향을 받아 제3세계 문학을 소개하기 시작하고 민족해방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편, 한국 정부는 1970년대에 미국과 심각한 외교적 마찰을 겪었다. 닉슨 대통령이 1970년 주한미군 일부를 철수하기로 결정하자, 박정희 정권은 주한미군 유지 및 한국에 대한 우호적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미국 의회에 불법적으로 영향을 끼치려다 들통이 났다. 중앙정보부가 워싱턴에 로비스트로 등록되지 않은 재미 실업가 박동선을 통해 의원들에게 거액의 현금과 뇌물을 제공한 이른바 '코리아게이트' 또는 '박동선 사건'이 터진 것이다.

1976년 미국 의회에 이어 법무부가 한국 정부의 불법 로비 활동을 조사하고 미국 언론이 박정희 정권의 인권 탄압 등을 보도하면서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와 아울러 미국 중앙정보국이 청와대를 도청해 박정희 대통령의 뇌물 공작에 관한 준비과정 등을 녹음했다는 보도도 나오자, 양국 정부는 서로 비난과 경고를 주고받기도 했다.

이에 앞서 1974년 도널드 프레이저 (Donald Fraser) 미국 하원의원이 한국의 인권 상황에 관한 의회청문회를 열었다. 그는 한국을 경찰국가로 규정하면서 박정희의 탄압 조치에 대한 압력으로 미국이 한국에 대한 군사지원을 줄이거나 삭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국 정부는 프레이저 위원회의 청문회에 유감을 표명하며 미국의회가 인권 문제와 군사 지원을 연계하려는 것에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미국 의회는 한국 정부에 대한 9300만 달러의 군사 및 경제 원조를 거부하는 수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1974년 11월 포드 대통령의 한국 방문은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고 그의 극단적 탄압을 눈감아주는 것으로 비추어졌다. 이를 예상하고 진보적 개신교 지도자들과 신도들은 기도회를 갖고 포드 대통령에게 그의 한국 방문이 유신 체제를 강화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며 방문을 취소하라고 촉구했었다.

1976년 미국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의 카터 후보는 포드 대통령의 한국 인권 정책이 실패했다고 주장하며 박정희의 인권 탄압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대통령에 당선된 카터는 1977년 3월 주한미군을 4~5년 내에 철수시키겠다는 선거공약을 지키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1979년 6월 한국을 국빈 방문하면서 외교 의례를 무시하고 야당 지도자들을 만나려 했다. 박정희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그의 한국 방문이 유신 체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그의 방문을 반대하는 연좌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카터는 미국에 돌아가 다음 달 주한미군 철수를 자신의 임기가 끝나는 1981년까지 보류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두 개의 천주교 신부 단체가 그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인권과 도덕 외교를 주창해온 그가 방한함으로써 오히려 한국의 인권 상황이 더 나빠지는 결과를 불러온 게 역설적이라고 주장하면서, 그가 내세운 '국가 안보'의 목표가 한국의 독재와 탄압 그리고 착취를 지키기 위한 것이냐고 물었다.

한편, 양국 사이의 외교적 갈등과 관련해 일부 여당 정치인들과 관변 지식인들은 미국의 내정 간섭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 1977년 5월 보수적 개신교 지도자들은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하는 기도회를 열었다. 1978년 4월 다양한 사회단체와 남녀 고교생을 포함한 학생들은 1년 반 전 미국 언론에 보도되었던 미국 중앙정보국의 청와대 도청을 비난하는 집회에 동원되기도 했다.

이와는 반대로 야당 정치인들이나 정부 비판 세력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미국의 비판이나 반대를 환영했다. 예를 들어 1974년 11월 정치범 가족들은 미국 국민과 의회 그리고 백악관에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중단시킬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호소했다. 1979년 9월 야당 지도자 김영삼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카터 행정부가 한국의 소수 독재정권에 대한 지원을 끝내도록 촉구했다. 이 인터뷰에서 김영삼은 한국 정부를 비난함으로써 '긴급조치'를 위반했다는 죄로 국회에서 쫓겨났다.

1970년대 말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대운동이 더 진전되면서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표출되었다. 미국에 대한 정치 외교적 굴종, 매판자본과 경제적 종속, 외국 문화의 지배 등에 대한 비판이나 분노가 다양한 선언이나 성명서를 통해 제기되었다. 나아가 유신체제에서의 극심한 탄압은 혁명적인 반독재 및 반제국주의 지하운동까지 싹트도록 이끌었다.

1976년 일단의 혁명가들은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 패배하고 베트남이 사회주의로 통일된 것을 미국의 제국주의가 아시아에서 약화하고 제3세계에서 민족해방운동이 일어나는 조짐으로 간주하면서 이른바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남민전)>을 결성했다. 그들의 목표 가운데는 미국과 일본의 제국주의에 대항해 한국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성취하는 것도 들어 있었다. 그들은 한국을 미국과 일본의 신식민지로 간주하고 제국주의 세력들과 그들의 허수아비 박정희 군사정권에 맞서 민족해방투쟁에 나서자고 호소했다. 1979년 80여명의 조직원들이 체포될 때까지 그들은 유인물을 배포하면서 선전운동을 펼쳐나갔다. 참고로 이들 가운데는 당시 사형당한 사람까지 있었지만, 대부분 2006년 3월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인들과 예술인들은 대체로 '자기 검열'을 실시했다. 1970년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그리고 긴급조치가 어우러진 유신체제, 즉 박정희 군사독재나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 아래서는 문학예술 작품을 통해서도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표출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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