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천만관객 영화가 보여준 갑오년의 계시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천만관객 영화가 보여준 갑오년의 계시

[시민정치시평] "흥남 부두에서 구한 것을 국제 시장에서 잃지 말라!"

어떤 의미를 서로 공감할 수 있게 표출하는 모든 것이 문화라고 하면, 음악을 비롯한 모든 문화적인 것들은 우선 즐김의 공유이다. 그런데 그 안에 공감된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이런 문화적인 것들은 자주 정치화되기 직전 상태에 놓인 대중의 원초적 의지를 표출하기도 한다. 현대에서 이렇게 문화정치적 텍스트의 역할을 하는 대표적 문화 장르는 영화나 방송 드라마 같은 영상물이다. 현대 대중문화에서 이런 영상물들은 보통 대중에게 즐거움을 공급하는 연예 오락 매체의 구실을 한다. 그런 것들의 경향은 세대, 사회 계층, 정치성향, 대중 개개인의 다양한 취향에 따라 수시로 유행의 물결을 탄다.

그런데 이런 세대, 계층, 성향, 취향의 구별을 훨씬 넘어서는 광폭의 추세를 보이는 문화물이 지속적으로 나타날 경우 그것은 단지 유행이 아니라 어떤 시대정신의 전조로 간주된다. 한국의 경우 이런 흐름을 실시간으로 가장 잘 알려주는 것은 천만 관객급 영화들이다.

한 편의 영화가 천만 관객을 동원하려면 평소 다른 영화라면 보지 않았을 세대나 서로 대립하는 계층, 적대적 정치 성향을 가진 이들까지 모두 흡인할 수 있는 포괄적 공감성이 있어야 한다. 2014년 갑오년에는 역대 천만 관객급 영화 순위에서도 1, 2위를 새로 점거한 <명량>과 <국제시장>이라는 초특급 흥행작이 나왔다는 점에서 그 어느 해보다 주목을 끈다. 이 두 작품에다 8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연초의 <수상한 그녀>와 8월 달의 <해적: 바다로 간 산적>, 그리고 관객수가 400만에 그쳤지만 <군도: 민란의 시대>를 이어 붙이면 갑오년의 영화들에서는 가히 시대정신이라고 해도 좋을 의미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유난히 초대박 국산 영화가 많았던 갑오년 영상물들의 공통적 특징은 폭력의 절정인 전쟁 내지 투쟁 상황을 배경으로 하면서, 그 상황에서 승자가 아닌 극단적 피해자인 무력한 민중이 벌이는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이 서사적 계기로서 빠짐없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도의 공통점으로 국민적 공감을 자아냈다고 하면 아무래도 과장일 것이다. 이들 영화들이 국민적 차원의 공감을 창출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한 가장 중요한 감동 코드는 이런 극한 상황에서 벌이는 생존의 몸부림이 모두 성공했으면서도, 성공한 당사자들이 타자를 위해 자기실현이나 자기만족을 희생시키면서 그런 감동적 성공을 성취했다는 것이다.

갑오년 영화 주인공들의 성공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철저한 자기부정이다. 아들과 손자를 위해 자기 젊음과 은인과 연인을 희생한 오말순(나문희 분), 자기를 짓밟은 왕조이지만 백성을 위해 열두 척의 배를 끌고 최전선에 다시 나선 이순신(최민식 분), 그리고 자식과 여동생을 위해 남의 나라 광산이나 전장에 뛰어든 윤덕수(황정민 분) 등은 철저한 자기희생, 더 나아가 자기부정의 화신들이다. 그런데 참으로 난감한 것은 각 영화에서 이런 자기부정이 누구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자기만 짊어져야 할 것으로 여기는 일종의 자폐적 자기부정이라는 점이다.

이런 자폐적 자기부정으로 이루어낸 성취의 가장 큰 비극은 현실적으로 자기를 부정하였다고 해서 되고 싶었던 자기의 환상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오말순에게는 오두리(심은경)가 나오고, 이순신에게는 임종을 지키지 못한 어머니가 있었으며, 윤덕수는 자기를 알아줄 아버지가 항상 곁에서 어른거린다. 하지만 이렇게 진정 되고 싶고, 같이 있고 싶은 이들은 영화에서 단지 지나간 꿈이든가, 위패에 모셔진 고인이든가, 아니면 산 것처럼 환생한 유령이라는 비현실적 모습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자폐적 자기부정은 자폐적 자기위안과 짝이 되어 나타난다.

하지만 이런 자폐적 자기부정의 가장 큰 문제는 흥남 철수, 베트남 전쟁, 독일 광산에서 살아나 돈을 모아 가족을 재결합시키는 데 성공한 윤덕수가 "그 험한 일들을 우리 자식들이 아니고, 우리가 겪어서 다행이다"라고 말하는 데서 드러나듯이, 자신들의 고생으로 자식들은 더 이상 고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버리는 근시안적 순진성과 예지력 결핍증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살아나온 전장에서의 논리가 자식들에게까지 지속가능하리라고 믿는다.

21세기 첫 십 년기를 지난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에 이룩한 생존의 추억이 아버지와 자식의 두 세대를 관통하는 공감을 창출한다. 왜 그럴까? 이 영화들에서 우리는 바로 지금 우리의 삶에 어버이 세대의 고난과 분투가 실핏줄처럼 샅샅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와 우리 사이에 생물학적 혈연성을 넘는 역사적 공존성이 있다는 것을 체감한다. 아버지의 희생에 대한 고마움이 일단은 이 세대초월적인 공감의 한 측면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영화들이 보여준 예전의 생존 방식은, 참으로 안타깝게도, 현재의 생존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아버지가 살아남으면서 깔아놓은 시장에서 이익경쟁의 논리가 판치면서 자식들은 새로이 죽어가고 있다. 그러면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나와 내 아버지의 역사적 공존이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도 알게 모르게 공감한다. 전장의 생존 논리는 시장의 이익 원칙을 보장하지 않는다. 즉 아버지가 악착같이 전장에서 살아남았다고 하여 지금 이 순간 시장에서 벌이는 경쟁에서 자식인 내가 살아남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4세기에서 반세기 전에 살아서 나왔던 전장(戰場) 뒤에는 자기들이 살아나는 과정에서 닦아놓은 시장(市場)이 자식들을 기다리고 있다. 바로 아버지들이 열어놓은 시장에서 그 자식들은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삼포(三抛) 세대에서 취업과 내집 마련도 포기하는 오포(五抛) 세대로 거꾸로 진화하고 있다. 자식들은 내심 묻는 중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이렇게 되라고 나를 이 나라에 낳아 놓았나요? 그러다가 <수상한 그녀>를 보며 얄궂게 웃다가 <국제시장>에서 눈물을 쏟았다.

그렇다면 이 영화들은 단지 과거로의 퇴행일 뿐인가? 아버지들이 엄청 고생했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만 더 고생하면 아버지들보다 더 잘 살 수 있다는 일종의 자기확인인가? 갑오년의 계시는 그것이 아니다.

갑오년의 계시는 전장에서 남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남는 데 '악착같이 성공'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자기부정의 성공이라도 감수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보다 근본적인 동기는 '다 같이 살아남는다는 것' 자체였다. 즉 인간은 성공하기 이전에 살아야 하는 것이다.

전장에서 우리가 진정 구한 것은 성공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였다. 이념적 논란의 쟁점이 무엇이든 간에 영화 <국제시장>이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근본적 메시지는 흥남 부두에서 구한 생명을 국제 시장에서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익의 논리에 왜곡되기 이전의 생명의 원칙 ― 이것이야말로 "아버지 내 약속 잘 지켰지예, 이만하면 내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예"라는 윤덕수의 독백에서 우리가 너와 나의 구별 없이 확인해야 하는 핵심이다.

이제 시장에서 이익과 경쟁의 논리를 거두고 그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을 다시 발견해야 한다. 이제야말로 돈 벌이에 매몰된 돈벌레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살림을 꾸려내야 한다. 갑오년의 천만관객급 영화들을 통해 21세기 대한민국을 살려갈 생명 최우선의 원칙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물줄기를 잡아가고 있다.

※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기획·연재합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