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새누리당의 전신인 민자당의 탄생, 즉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이 뭉친 1990년 '3당 합당'은 보수 세력이 정치적 우위를 점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습니다. 1992년 집권을 위해 군사 정권과 전격적으로 손을 잡은 김영삼의 정치적 승부수였죠. 그 결과, 개혁 세력은 지리적으로 호남에 유폐됐습니다. 호남을 대표한 정치지도자 김대중도 92년 대선에서 실패합니다. 대통령이 되지 못한 김대중이 정계은퇴를 선언한 날, 호남은 그야말로 눈물바다였다고 합니다.
1995년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은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반전 프로젝트를 가동합니다. 정치적 지지를 넘어 인격적 동일시에 가까운 호남 민심을 기반으로 충청권의 김종필과 'DJP 연합'을 구축한 겁니다. 이는 지역 맹주들 사이의 밀실 타협이라는 비판 속에도 97년 대선에서 김대중이 승리하는 데 원동력이 됩니다.
보스들 간의 거래가 곧 집권플랜이던 '3김 정치'가 막을 내린 후, 지역정치는 다소 복잡한 메커니즘으로 전개됩니다. 특히 호남과 충청권에는 '전략적 선택'이라는 독특한 정치 과정이 자리를 잡습니다. 영남에 비해 인구가 적은 호남과 충청권 유권자들의 능동적인 진화입니다. 예컨대, 호남은 부산 출신 노무현을 대통령 후보로 만들었고, 노무현은 행정수도 건설 공약으로 충청권을 파고들어 대통령이 됩니다. '전략적 선택'이란 곧 정치적 가능성에 대한 투자와 보상의 기대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호남의 정치적 투자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왔습니다. 노무현 정부의 집권 초 대북송금 특검 수용은 당시 거대 야당의 공세라는 정치적 환경을 이유로 무마될 수 없는 심리적 충격을 호남에 안겼습니다. 그건 곧 김대중에 대한 부정이었으니까요.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대의명분으로 추진한 열린우리당 창당 역시 호남을 설득하지 못한 한계를 보였습니다. '탈(脫)호남 전국정당화는 진보·개혁 진영의 전국적 복원을 위해 영남과 수도권에 대한 공격적 투자를 아끼지 않았으나, 상대적으로 호남이 방치되는 결과를 초래했던 겁니다. 노무현 정부 이래 호남에 형성된 상대적 소외감은 그만큼 뿌리가 깊습니다.
호남 정치의 굴곡을 다소 장황하게 늘어놓은 까닭은 불안정한 야권 질서의 중심에 바로 호남이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따져보겠습니다. 지금 야권 대선후보 지지율 조사에서 상위에 랭크된 문재인 당 대표, 박원순 서울시장, 안철수 의원은 모두 부산·경남 출신입니다. 충청권엔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다크호스로 주목받습니다. 대구 공략에 정치 인생을 건 김부겸 전 의원도 차세대 리더로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야권의 전통적 지지기반인 호남을 대표할 만한 정치인은 눈에서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지난해 '친노'가 장악한 야당에 대한 비판적 정서로 호남이 '전략적 선택'을 했던 '안철수 신당'이 물거품이 된 데다, 안 의원 역시 야당 대표 시절 매끄럽지 않은 공천으로 잡음을 일으키며 스스로 몰락했습니다. 마땅한 투자처를 잃은 호남 민심은 작은 불씨에도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지난해 7.30 재보선에서 새누리당 이정현 의원이 호남에 깃발을 꽂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야권 내 비주류로 밀려난 호남의 정서가 작용했습니다. 전북의 맹주 정동영 전 의원이 참여하고, 광주에서 정치적 재기를 모색하는 천정배 전 의원이 합류를 저울질하는 '국민모임'이 한때 18.7퍼센트(%)의 지지율을 얻기도 했죠(1월 1일 발표된 휴먼리서치 조사 결과).
이번 새정치민주연합의 2.8 전당대회에 관한 숱한 분석 역시 호남을 빼면 겉핥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문재인 대표가 과반을 얻지 못한 까닭, '저질 토론'이라는 비판에도 박지원 후보가 3.5%포인트 차이로 선전한 까닭은 모두 호남에서 연원합니다. 전당대회 당일 박지원 후보가 다시 한 번 노무현 정부의 대북송금 특검을 거론하며 "김대중 전 대통령은 투석을 시작했고 저는 감옥에 갔다. 13번 전신 마취 수술을 받았고 그때 제 눈도 이렇게 됐다"고 호소한 건, 바로 호남의 비노 정서를 자극한 것이었죠. 결국 새정치민주연합의 2.8 전당대회는 문재인 대표가 호남에서 '전략적 선택'을 받지 못했다는 한마디로 요약됩니다. 관망하는 호남이 언제든 새정치민주연합을 버릴 준비가 돼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호남은 문재인 대표 체제의 성패를 좌우할 관건입니다. 지역주의의 회귀로 폄하하고 말 게 아닙니다. 호남과 개혁은 야권을 떠받치는 수레의 두 축이기에 하는 말입니다. '노무현의 배신'이라는 호남의 트라우마를 '노무현의 후계자'가 극복해야 하는 난이도 높은 정치력이 필요합니다. 전당대회 와중에 문 대표가 언급한 '호남총리론'처럼 떡고물 떼어주는 듯한 레토릭은 다시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문 대표는 '친노' 해체를 당 혁신의 선결 과제로 제시했습니다. 공감합니다. 그러나 계파 청산이 단지 측근 인사들의 당직 배제나 비주류 인사들 몇몇을 발탁하는 보여주기 식 탕평책으로 완성될 리 없습니다. 10년 넘게 이어오며 기득권화된 소위 '열린우리당 체제'의 잔영을 뿌리부터 걷어내는 역동적인 움직임을 조직해야 합니다.
침체된 호남 정치의 복원을 위한 일머리도 잡아야 합니다. 호남이 비록 당장은 '비노'로 결집해 있을지라도 '비노'가 호남을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세력은 아닙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혁신을 가로막는 호남의 기득권도 부숴야 할 대상이라는 얘깁니다. '친노'의 당도, '비노'와의 적대적 공생체도 아닌, 새로운 야당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바꿔야 합니다. 그게 혁신입니다. 노회한 정치인들의 전유물이 된 호남 정치를 대체할 '가능성'을 보여주는 일, 그것이 바로 호남의 '전략적 선택'을 얻는 지름길입니다.
호남 정치의 복원을 거듭 강조하는 이유는 호남의 '전략적 선택'이 단지 내 고장 사람 키워주자는 협소한 관점에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략적 선택'이란 거대한 보수 동맹에 맞서 '이길 수 있는' 세력과 사람을 고르는 진보·개혁 유권자들의 까다로운 눈을 대표하는 용어입니다. 당연히 까다로운 유권자들의 입맛에 맞는 상품을 내놓아야 합니다. 인적 쇄신과 함께 새정치민주연합의 존재 의미를 되살리는 과제가 문 대표에게 남아 있습니다. 보수 새누리당과의 차별성입니다.
호남 정치의 복원이라는 지역적 전략이 진보·개혁을 매개로 한 계층 전략과 결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문재인 대표는 새정치민주연합과 자신이 대변하고자 하는 계층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고 설득력 있는 정책 대안으로 이들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과의 전면전'을 선언한다고 될 일은 아닙니다. 박근혜 정부가 궁지에 몰린 복지 후퇴와 '꼼수 증세'를 비난한다고 새정치민주연합의 존재감이 부각되지는 않습니다. 좀처럼 당청 갈등의 범주를 넘어서지 않는 '증세 없는 복지'의 대안이 될 만한 '문재인 표' 세금-복지 플랜으로 서민들의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전당대회 후 새정치민주연합과 문재인 대표의 지지율이 오르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박근혜 정부의 실정에 따른 일부 반사 효과와 임시 체제를 끝낸 야당에 대한 기대효과가 반영된 결과로 보입니다. 그러나 불안정한 질서와 맞물려 야권에 대한 기대와 실망의 주기는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당장 4월 재보선이 문 대표의 리더십을 가름할 시험대가 될 겁니다. 호남의 중심인 광주가 재보선 지역에 포함돼 있습니다. 광주 선거를 그르치면 새정치민주연합과 문재인 대표는 호남에서 가시밭길을 피할 수 없습니다. 지역 토호들의 도전이 거셀 겁니다. 이들은 기득권 연장의 수단이 된다면 '호남 자민련'도 마다치 않을 겁니다. 총선과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호남 민심의 이반이 심각해질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야권 질서 재편의 핵으로 떠오른 호남에서 문 대표가 이 같은 난관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스스로 '구시대의 막내'라고 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뜬 지 벌써 6년입니다. 그동안 야당은 노 전 대통령이 물려준 유산마저 탕진했습니다. 노무현의 그늘을 벗어난 문재인이 되지 않고선 호남 정치의 개혁적 복원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등 떠밀려 대선후보가 된 지난 대선과 달리 스스로 의지를 보여 오른 당 대표인 만큼 그의 달라진 정치력을 이번엔 기대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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