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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정치='악당' 퍼주기? 바보들, 브란트-바에게 배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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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정치='악당' 퍼주기? 바보들, 브란트-바에게 배워라

[프레시안 books] 에곤 바 <독일 통일의 주역, 빌리 브란트를 기억하다>

통일 전 서독 사민당의 위대한 정치가 빌리 브란트와 평화 전략가 에곤 바의 우정은 독일 정치사에서 특별했다. 둘은 1960년대 중반부터 서독 동방정책의 '건축주'와 '설계자'로서 함께 동서독 간 화해 협력과 유럽 평화 정치를 일구어 나갔다. 1960년 당시 서베를린 시장이었던 브란트는 언론인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선보였던 바를 언론공보처장이자 대변인으로 발탁했다. 1966년에서 1969년 사이 대연정 시절에 바는 외무부의 기획국 국장으로 당시 외무부 장관이었던 브란트를 도왔다. 1969년 브란트가 집권한 뒤 초기엔 총리 관저에서 차관급 비서로서 동방정책 관련 각종 회담을 준비하고 수행했다. 바는 1972년부터 1974년까지 특임부 장관으로 계속 브란트를 보좌했다. 1974년 브란트의 실각 후에 바는 헬무트 슈미트 총리 하에서 2년 동안 경제협력부 장관을 역임했다. 바는 1972년부터 1990년까지 연방의회 의원이었고, 사민당에서 브란트 당수의 가장 충실한 지지자로 남았다.

둘은 애초 지도적 정치가와 조력자 간의 관계를 넘어 점차 협력과 상호 존중의 우애를 발전시켰다. 독일의 많은 정치 평론가들이 말하듯이, 독일의 정치 지도자들도 각기 참모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바처럼 지도자의 참모이면서 동시에 친구이자 동료로 발전하지 못했다. 1992년 병상에 누워 거친 숨을 몰아쉬던 브란트에게 아들 라르스가 '아버지에게 친구는 누구였냐'고 물었다. 브란트는 단 한 사람을 언급했다. '에곤!'

동방정책의 '설계자' 에곤 바가 본 '건축주' 빌리 브란트

ⓒ북로그컴퍼니
<독일 통일의 주역, 빌리 브란트를 기억하다>(북로그컴퍼니, 2014년 11월 펴냄)는 생애 막바지에 도달한 에곤 바가 브란트에게 보내는 마지막 송사(送辭)다. 전체 4부로 된 이 회고록에서 바는 참모로서 그리고 친구로서 브란트에 대한 충성과 신의를 끝까지 지켰다.

이 회고록에서 바는 브란트의 참모로서 그의 유산 두 가지를 착실히 챙겼다. 먼저, 20세기 후반 브란트가 발전시켰던 평화 정치의 핵심을 바는 '평화가 전부는 아니지만 평화 없이는 어떤 일도 가능하지 않다'는 말로 요약했다. 책의 제4부 말미에서 바는 브란트가 발전시킨 이 평화 정치의 준칙이 21세기 세계 정치의 근간이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세계적으로 평화는 민주주의, 인권, 자유보다도 더 높은 가치가 되어야 한다. 정치적으로 서구 민주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파트너들과도 이성적으로 분쟁을 해결하고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대화라는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 대화는 항상 평화 부재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고 실제적 성과를 지향하되 '거창한 구호'와는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바가 보기에 브란트가 내세운 대화는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만이 아니었다. 대화는 이미 그 자체가 목적이고 새로운 정치의 방식이자 덕목이었다. 브란트와 바에게 그것은 특정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가 아니었다. 냉전이 종결되었다고, 통일이 달성되었다고 대화와 협상 정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는 1970년대 브란트의 평화 정치를 계승해 폭력 사용의 전면 포기를 21세기 세계 정치의 규범으로 제시하고 있다. 바는 러시아와 협력 체제로 전환하는 것이나 중국을 비롯한 신흥 강대국과 조정하는 과제 그리고 디지털 과학기술에 의한 새로운 무기 체제의 등장과 환경문제로 인한 새로운 갈등과 폭력 위협 앞에서 브란트의 평화 정치가 지닌 역사적 무게를 올곧이 전달한다.

한편, 실용주의 평화 정치와 평화적 갈등 조정 원칙에 더해 바가 옹호하는 브란트의 또 다른 유산은 민주주의 확대였다. '더 많은 민주주의를 감행하라'는 브란트가 1969년 총리로 집권하며 내세운 강령 구호였다. 당시 브란트는 급진 청년 세대들의 요구에 직면해 민주사회주의의 본령인 사회적 평등과 정의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 갱신을 내세웠다. 아울러 1980년대 사민당 당수로서 브란트는 새로운 세대와 사회 세력들에게 계속 문호를 개방하며 당의 민주주의적 활력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브란트는 총리로서나 당수로서나 모두 이 '더 많은 민주주의로의 감행'에 항상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바는 브란트의 이 민주주의 갱신 원칙이 21세기 독일과 세계의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바는 브란트의 민주주의 확대 원칙을 현 독일 총리 메르켈의 '더 많은 자유로의 감행'에 대비해 부각했고, 시장이나 금융 경제가 항상 민주주의적 국가의 통제 하에 놓여 있어야 함을 강조했다.

이렇게 바는 '시장의 논리보다 민주주의가 상위'라며 21세기에도 브란트의 정치 유산이 녹녹치 않음을 밝혔다. 바는 브란트가 생애 말년에 점점 더 '좌파'가 되었다고 말했다. 브란트가 사민당 당수로서 1980년대 사민당 내 좌파와 우파를 모두 아우르는 통합적 인물을 자임했던 것을 기억하면, 그와 같은 브란트의 좌익 경도 평가엔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상당수 노회한 '현실 정치가'들과 달리 브란트는 말년에도 항상 '사회주의 없는 민주주의는 없다'는 신념을 유지했다.

물론, 이때 브란트의 사회주의는 항상 자유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브란트가 말한 자유는 극우적 자폐증 환자들이 말하는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식 자유나 시장과 기업의 절대적 자유 따위가 아니었다. 브란트가 보기에 자유란 인간 개성의 자유로운 발현이었다. 그러나 자유를 위해서는 사회적 평등이 필수 불가결했다. 이 책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1976년 한 연설에서 브란트는 자유와 평등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며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드러냈다. "민주사회주의의 기본 이념은 개별 인격의 자유로운 발현이다. 사회적 구속과 책임에도 불구하고 집단이 아니라 개인이 사회의 중심이다. 평등의 실현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각자 자신을 자유롭게 발전시킬 수 있도록 사회적 조건을 만드는 일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같은 출발 지점을 정해놓았지만 결국 다시 팔꿈치로 다른 사람을 밀어제치고 나아가도록 만드는 의미의 기회 균등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평등을 통한 개인의 자기실현을 민주사회주의의 근간으로 간주한 브란트는 21세기 초반 신자유주의 광풍과 자본의 무차별 공세 현실에서 아마 더 왼쪽으로 기울어 갔을 것이다.

이렇게 바는 브란트의 유산을 통해 21세기 평화 정치와 사회민주주의의 전망을 새롭게 제시하고자 했다. 바의 브란트 유산 관리는 성공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치가들의 회고록을 그대로 믿으면 곤란하다. 정치가들은 회고록을 통해 정당화와 사후 복수를 일삼는다. 바는 유산 관리를 넘어 '정치적 인간'으로서 브란트를 적극 옹호하고 구조하는 작업에 뛰어들었다.


독일 민족의 대변자인가, 탈민족 지향적 유럽 평화 정치가인가

사실 이 책이 발간되기 전에 브란트에 대한 연구는 이미 변곡점에 도달했다. 사민당 산하 '총리 빌리 브란트 재단'의 의뢰로 역사가 헬가 그레빙과 그레고어 쇨겐, 하인리히 아우구스트 빙클러의 책임 편집 하에 10권의 빌리 브란트 선집이 2002년부터 2009년까지 완간되었다. 1928년부터 1992년까지 브란트가 쓰거나 말한 대부분의 기록들이 잘 정리되었다. 게다가 최근 10년 내에 발간된 브란트 관련 전기만 해도 10권이 넘는다.

정치가 브란트에 대한 평가 중 서로 엇갈리는 것 하나는 민족과 통일관에 대한 것이었다. 브란트를 시종 독일 민족의 대변자이자 독일 통일의 옹호자로 그렸던 전기 작가는 브란트의 마지막 부인인 역사가 브리기테 제바허-브란트였다. 그는 브란트를 사실상 독일의 민족 정치가로 그렸기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바도 브란트를 민족 정치가로 묘사하는 것에는 거리를 두었다. 브란트는 전통적 의미의 민족 지향적 정치가가 전혀 아니었고 협소한 의미의 국민국가로의 '재통일'을 바랐던 것도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브란트는 사민당 내에서 누구보다 분명히 '재통일'이란 용어를 거부했고 단지 '유럽 통합의 전망 속에서 독일 문제를 해결'(그것은 꼭 '통일'이 아닐 수도 있음)하려 했던 대표적 정치가였다. 브란트는 1980년대에 몇 차례나 독일 통일을 '삶을 위한 거짓말'일 뿐이라고 말했다. 헬가 그레빙 같은 역사가는 브란트의 국제주의적 면모를 부각했으며 브란트를 철저히 유럽적 맥락의 자유와 평화 속에서 독일 문제 해결을 지향했던 인물로 그렸다. 그렇지만 동시에 브란트는 이미 1988년부터 국가연합 통일안에 관심을 갖더니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후에는 사민당 내 누구보다도 더 분명히 국민국가로의 즉각 통일을 옹호했다. 그렇기에 브란트 연구에서 쟁점은 한편으로 탈민족 지향적인 유럽 평화 정치가의 면모와 1989/1990년 독일 통일의 적극 옹호자의 그 양면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다. 브란트의 민족관과 통일 구상의 연속성 또는 단절과 변화의 문제가 심각하게 토론되었던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책에서 바는 그것에 어떤 실마리도 제공하지 않는다. 이 책의 역자들이야 손쉽게 브란트를 '독일 통일의 주역'이라고 소개하며 인습적인 동방정책 이해, 즉 '동방정책으로 통일이 이루어졌다'는 식의 이해를 따르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브란트가 개척한 평화 정치의 지평과 의미를 축소할 위험이 있다. 그렇기에 역자들의 오해나 의도와는 달리, 저자 바는 브란트를 독일 분단 극복의 기수로 규정짓지 않았다.

동방정책이 궁극적으로 독일 통일의 길이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브란트가 그것을 처음부터 통일의 길로 간주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평화야말로 모든 것의 출발점이자 사실상 전부라고 여겼던 브란트의 평화관을 쉽게 평화를 통일의 발판쯤으로 간주하는 방식으로 자기화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평화와 통일의 복합적 연관 관계에 대해 더 다양한 토론이 열리기 위해서라도 '동방정치가'들의 평화와 통일의 관계에 대한 여러 숙고와 입장 변화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통일 논의의 전면 유보와 사실상의 통일 강령 폐기에 기초해서 발전했다. 그와 같은 사실 확인으로 한반도도 독일처럼 통일보다는 평화를 내세우면 만사가 형통하리라는 단선적 결론을 끌어올 수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평화 정치와 통일 노력 양자의 고유한 동력과 활력에 대한 정치적 상상력을 개방하고 촉진하기 위한 것이다.

▲ 에곤 바(1988년 8월 31일). ⓒ위키미디어커먼스


에곤 바가 침묵한 빌리 브란트의 인간적 약점들과 견해 차이

이와 관련해서 바가 실제 업무를 수행하면서 브란트와 "아무런 노선 갈등이 없었다"고 말한 대목은 심상치 않다. 참모이자 친구로서 충성과 신의 고백과는 달리, 1부의 마지막 장 '결코 출판되지 못한 책'은 양자의 입장 차이를 이미 간접적으로 드러낸 곳이었다. <이제 무엇을 할까>(이 책에선 '그렇다면'이라고 번역)라는 그 미발간 텍스트는 단계적 통일 모델 구상을 담은 바의 회심작이었다. 바는 브란트의 만류로 텍스트의 출간을 포기했다. 바는 그 출간 포기가 브란트의 현실 정치적 신중함을 자신이 잘 이해한 결과로 묘사했다. "중요한 텍스트를 책상 서랍에 묻어 둔 덕분에 브란트는 화를 면했다. 브란트는 나의 우정 어린 충성심을 믿게 되었고 보좌관인 나는 결국 브란트의 친구가 되었다." 바는 오히려 그것이 우정의 계기가 되었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 텍스트를 읽어 본 사람이면 바가 당시 브란트에 비해 상당히 적극적이고 전진적으로 독일 통일을 구상했다는 사실, 그리고 브란트와 달리 바는 사실상 중립주의 독일 구상에까지 근접했음을 알 수 있다. 바와 브란트의 입장 차이는 그 뒤에도 간헐적으로 나타났다. 이를테면,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시 브란트와 달리 바는 국민국가로의 독일 재통일에 여전히 유보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는 이 책에서 그와 같은 브란트와의 입장 차이를 아예 언급하지 않았고 인정하지도 않았다. 브란트와 쌓은 우정을 지키려고 역사적 진실을 비켜가고 있는 셈이다.

한편, 브란트의 정치 지도력 논란에 대해서만큼은 바도 공세적이었다. 브란트 연구자들이 한결같이 지적하는 그의 정치 지도력의 문제점에 맞서 바는 브란트를 적극적으로 방어했다. 브란트를 가까이서 경험한 동시대 정치가들과 언론인들에게 브란트는 '탁월한 전망을 갖고 카리스마 넘치며 결단력을 발휘하는 위대한 정치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사민당 내 권력 경쟁자들뿐 아니라 브란트의 지지자들도 항상 그의 결단력 부족과 추진력 결여 및 강력한 리더십의 부재를 탓하거나 아쉬워했다. 브란트의 심복 중 한 명이었던 호르스트 엠케 전 총리 관저 장관은 브란트를 '햄릿'에 비유했다. 페터 글로츠 같은 브란트의 오랜 동료이자 참모는 브란트를 "커브길만 나타나면 차를 조심스럽게 모는 노인" 같은 인물로 묘사했다.

이 모든 부정적 평가에 대항해 바는 브란트의 독특한 카리스마와 단호한 권력의지를 여전히 옹호했다. 브란트는 다만 새로운 종류의 정치적 리더십, 즉 소통과 조정과 통합을 통한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보여주기 위해 항상 타인의 말을 경청하며 신중한 숙고와 결정 과정을 거쳤을 뿐이라는 것이다. 바는 외면상으로 보이는 우유부단함보다는 내면의 진중함과 의지를 내세워 브란트의 위대함을 지켜내고자 애를 썼다. 그러나 '절친'만이 볼 수 있는 것, 또는 보았다고 믿는 것을 독자들에게 설득하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인간의 얼굴을 한 정치가' 브란트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는 별 도움이 안 된다. 바는 브란트의 모순, 즉 주요 국면에서 영웅적인 용기와 탁월한 결단력을 보인 브란트가 대부분의 정치 활동에서는 너무도 우유부단하고 유약하며 무책임하기까지 했던 사실과 그 배경을 더 해명해 줄 필요가 있었다.

결국, 이 책은 1996년에 발간된 <나의 시대에 대해>라는 바의 자서전에서 특별히 더 나아가지 못했다. 더구나 바는 브란트의 심각한 인간적 약점들, 즉 술 중독과 여성 편력에 대해서 모두 언급을 피했다. 익히 알려진 그런 사실들을 감춘다고 해서 참모로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친구로서 바는 이제 브란트의 여러 모순과 양면성을 제대로 해명해 줄 때가 되지 않았을까? 바가 아니라면 누가 과연 그것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까?

일부 아쉬움과 고루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서독 동방정책의 발전과 관련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많이 담고 있다. 아직도 평화 정치를 '악당'에게 '퍼주기'만 하는 한심한 작태쯤으로 간주하는 멍텅구리들이 한반도 곳곳에서 똬리를 틀고 있다. 이런 비루한 현실에서 동방정책의 두 주인공인 브란트와 바의 글과 말들은 더 많이 소개될 필요가 있다. 더구나 아직 살아 있는 한 주인공이 다른 한 주인공에게 바치는 송사라면, 그것을 통해 20세기 독일의 평화 정치가 과연 얼마나 찬연한 인류의 발명품인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국어 번역서는 그 위용을 전달하는 데 실패했다. 오역이 넘치기 때문이다. 사실 왜곡과 의미 곡해가 너부러져 있다. 번역자들의 화려한 이력을 보고 나면, 이 책은 더욱 수수께끼가 된다. 책을 낸 출판사에 묻는다. 어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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