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추정의 원칙과 헌법정신
법으로 죄가 확정되기 위해서는 증거로 입증되어야 한다. 처벌은 그에 따른 국가권력의 집행이다. 심증과 자백이 처벌의 근거가 될 수 없는 까닭은 법이 근거 없는 판결과 처벌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입증되지 않은 혐의는 아직 무죄로 받아들여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며, 따라서 이 원칙에 반하는 판결은 그 어떤 경우라도 법적 정당성과 효력을 가질 수 없다.
만일 무죄추정 원칙을 인정하지 않게 된다면, 우리는 근거 없는 단정 내지 확정으로 유죄판결을 내리는 법정을 정당하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 법정이 재심 없는 최고판결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되면, 근거 없이 유죄판결을 받게 된 당사자는 법적 구제의 가능성이 봉쇄된 채 법관의 자의적 판단에 따른 희생자가 된다. 그리고 그 법정이 국가권력의 지배 아래 있을 경우, 그것은 법관의 자의적 판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의 명령을 수행하는 도구가 되고 만다.
이러한 사태를 막지 못하면, 독점적인 법집행을 통해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국가 앞에서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극대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민주주의는 중대한 위기에 처하게 된다. 죄형법정주의를 비롯해서 증거주의를 채택한 근대 법체계와 정신의 뼈대는 프랑스 혁명의 산물이자, 우리 헌법 제27조 4항에도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는 바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원칙을 토대로 판결을 내리지 않는 법정은 위헌행위를 하는 것이며 그 판결은 불법적이고 위헌적인 것이 된다.
결론적으로 그러한 판결은 법적 정당성과 효력을 갖지 못하며, 그러한 판결을 내린 법정 자신에게 이러한 위헌행위의 책임이 귀속된다.
헌재가 밝힌 민주적 기본질서의 개념
통합진보당 해산에 대한 헌재의 결정은 통합진보당이 “정당”으로서 “민주적 기본질서를 위배했는가의 여부”를 판단하는 문제이다. 정당해산 심판 사유에는 “정당의 목적이나 활동 중 어느 하나라도”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민주적 기본질서가 무엇인가라는 논의와 통합진보당의 목적, 활동에 대한 실체적 검증이 요구된다.
헌재는 정당에 대한 헌법 제8조 4항에 나와 있는 “민주적 기본질서”를 다음과 같이 해석해놓고 있다.
“개인의 자율적 이성을 신뢰하고 모든 정치적 견해들이 상대적 진리성과 합리성을 지닌다고 전제하는 다원적 세계관에 입각한 것으로서, 모든 폭력적, 자의적 지배를 배제하고, 다수를 존중하면서도 소수를 배려하는 민주적 의사결정과 자유와 평등을 기본원리로 하여 구성되고 운영되는 정치적 질서를 말한다.”
이와 같은 “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개념 규정은 “개인의 자율적 이성에 대한 신뢰”를 근거로 “모든 정치적 견해”라는 포괄적 범주를 설정해놓았고, 소수까지도 담아내는 “자유와 평등”을 기본원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여기서 배제되는 것은 “폭력적, 자의적 지배”가 된다.
이러한 개념 규정에는 존 로크 이후 민주주의의 기본질서에 해당하는 “부당한 권력질서에 대해 시민들에게 저항권이 부여되어 있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빠져 있다. 또한 “국가권력과 자본권력의 독점적 지배를 배제한다.”는 오늘날의 논의 등이 부재 한다는 점에서 충분치 않다.
그러나 그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민주적 기본질서의 개방성, 포괄성, 사상과 표현의 자유와 소수를 포함하는 평등의 문제까지 거론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한 폭력적, 자의적 지배를 배제한다는 점에서도 정당을 포함한 정치권력의 폭력적, 자의적 지배를 비판적으로 정의하고 있다는 것 역시 평가할 수 있다.
민주적 기본질서를 위배하는 구체적 위험성이란?
이제 문제는 이러한 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해 “실질적 해악을 끼칠 수 있는 구체적 위험”이 무엇인가를 밝혀내는데 있다. 그 위험의 성격은 “모든 정치적 견해”를 개방적으로 수용하면서 포괄적 논의의 민주적 제도를 유지하고 자유와 평등을 지켜내려는 사회적 의지를 폭력적, 자의적으로 지배하려는 것인가의 여부로 규정될 것이다.
즉, 다원적 세계관을 부정하고 독단적 정치견해의 지배와 이를 이루기 위한 폭력적, 자의적 지배행위를 시도하거나 하고 있는 경우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러한 목적과 활동을 한 예로는 히틀러의 파시스트 정당, 스탈린의 전체주의가 대표적이며 우리의 경우, 한민당을 기반으로 이승만의 독재, 공화당과 유신체제를 통한 박정희의 독재체제, 민정당을 기반으로 했던 전두환 독재체제 그리고 북한의 노동당 유일체제가 이에 속할 것이다. 그러한 체제 아래에서는 헌재라는 제도 자체가 아예 성립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의 법체계를 적용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이와 같은 종류의 움직임이 우리 사회 안에서 일어난다면, 그것은 민주적 기본질서를 좌절시키는 행위로 판단하고 방어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마땅하다. 박정희와 같은 파시스트 권력을 재구축하려든다거나 또는 유일체제라는 방식으로 북한식 권력을 성립시키기 위해 정당 활동 내지 정치활동을 하려 든다면, 그것은 중대한 위험으로 인식하고 경계경보를 발동해야 한다. 우리가 지켜내려는 민주주의를 폭력적 내란이나 쿠데타 등으로 해체하려 든다면, 그래서 그런 위험성이 보인다면 당연히 그대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경계경보를 발동시키는 경우에도, 그것이 정치적 공간 안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인지 아니면 법적으로 해당조직을 해산시키도록 할 것인지는 또 다른 논의를 필요로 한다. 정당 해산이라는 방식은 자유로운 정당 활동을 보장하는 민주주의의 원칙과 배치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권력이 어떤 정당을 민주적 기본질서와 위배되는 행위를 했다고 규정하고 해산을 통해 정적을 제거하거나 그로써 민주적 기본질서 자체를 와해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당해산은 매우 엄격하고 제한적으로 법적 판단을 내리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헌재가 결정문에서 밝힌 대로 “구체적 위험성”이라는 방식으로 통합진보당 문제를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실질적 해악을 끼칠 수 있는 구체적 위험성은 그 말 그대로 구체적인 입증을 요구한다. 입증하지 못하면, 풍문이나 설 내지는 권력에 대한 단순한 비판 발언과 움직임 정도를 가지고 위험성을 규정함으로써 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해악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해악을 제거하려는 행위로 볼 수밖에 없게 된다.
헌재는 통합진보당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끼칠 실질적 해악에 해당하는 구체적 위험성에 대해 그 목적은 통합 진보당의 강령에 나온 “진보적 민주주의”를, 활동은 “이석기 사건”을 근거로 파악해 들어갔다.
우선 헌재가 밝힌, 진보적 민주주의가 민주적 기본질서에 끼칠 실질적 해악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숨은 목적”에 대한 증거 있는가?
헌재는 “진보적 민주주의”가 자주파에 의해 도입되었다면서, 이들 자주파의 주도세력은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거나 연계되어 있든지 아니면 북한의 주체사상을 추종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런 논리에서는 이제 진보적 민주주의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어도 북한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라는 결론이 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헌재 결정문은 통합진보당이 “북한식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숨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세계적으로 1920년대에서 1930년대에 식민지 해방투쟁을 했던 지역에 공통된 사상적 경향이었다. 서구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내세웠으나 제국주의지배를 그로써 정당화한 것에 대한 반발이자, 대안 논쟁의 산물이었다.
이를 하나의 정치운동으로 펼쳐나가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미국의 허버트 크롤리(Herbert Croly)였다. 그는 <진보적 민주주의(Progressive Democracy)>라는 저서를 통해, 산업사회에서 계급적 지배에 좌우되는 대의민주주의가 아니라 직접 민주주의적 토대를 갖춘 새로운 민주주의 구성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1930년대 대공황을 겪으면서 뉴딜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 미국 민주당의 진보세력에게도 중요한 사상적 자양분을 공급했다. 헌재는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기본적으로 부재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통합진보당의 경우, 민주노동당 시절 택한 강령에 “사회주의” 항목을 삭제하고 이를 대체할 단어에 대한 논쟁을 거치면서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항목을 넣게 되었다. 이 시기 통합진보당의 전신인 민주노동당은 새로운 진보세력 구성과 관련해서 보다 대중적 정당을 지향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회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라는 단어가 냉전정치구도에서 반발을 살 것을 우려한 결과였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통합진보당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사실 그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논쟁의 과정이 치밀하게 전개되지 못한 채, 수세적이고도 통합적인 각도에서 강령에 담긴 것이 되었다. 그러니 이를 자주파가 도입했다는 것은 사실관계에서도 틀리고, 자주파의 주도세력이 주사파라는 식의 규정 역시 오류다. 외세에 자주적인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은 어떤 특정계파인 자주파의 주장도 아니고, 그 어떤 주권국가의 국민이라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주장이다.
게다가 헌재가 “숨은 목적”이라고 했을 때는 이를 입증해야 한다. “숨은 목적”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으나 실체적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를 실체적으로 입증해야 그 주장의 정당성이 확증된다. 그러나 헌재의 이와 관련한 모든 주장은 사실관계의 오류에 더하여 자주파의 주도세력인 주사파의 주장이 담긴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식의 추정일 뿐, 그 어느 곳에도 구체적인 입증을 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있다.
내란 모의? 무죄를 근거로 유죄를?
헌재의 결정문은 바로 그 숨은 목적을 가지고 내란을 논의하는 회합을 했다고 규정했다. 이에 대해서는 더 자세하게 말할 필요도 없을 지경이다.
이와 관련된 이석기 사건은 아직 대법원에 최종 판결을 기다리고 있을 뿐 아니라, 내란음모도 무죄이고, 이를 조직적으로 이끌었다는 RO의 조직적 실체도 인정되지 못했다. 따라서 이는 통합진보당이 조직적으로 숨은 목적인 북한식 사회주의를 성취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내란음모를 한 정당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석기를 중심으로 한 경기동부연합의 행태는 이미 사회적 비판의 과정에서 명확하게 정리된 바 있다. 이들의 사고와 발언, 행위를 우리사회에서는 실질적으로 위험하다고 받아들이기보다는, 어이없다고 결론낸지 이미 오래다. 그와 함께 통합진보당 내부의 패권주의도 정치공간에서 척결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만 당원을 가진 정당이고, 지금은 3만에 이르는 진성당원 조직원을 가진 정당이 이들을 조직적으로 움직여 내란을 획책하고 북한식 사회주의를 이루려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폭력에 의해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려고 했다는 주장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그래서 헌재의 결정문은 이를 의식했는지, “실질적 해악을 끼칠 구체적 위험성이 발현된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다. “보인다”라는 현상과 실제로 존재하는 본질의 차이는 매우 큰 경우가 허다하다. 법은 그걸 가려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헌재는 “진보적 민주주의는 북한의 대남 혁명 전략과 거의 모든 점에서 전체적으로 같거나 매우 유사하다”고 말하고 있다. 법정은 “유사” 또는 “거의 같다”와, “동일” 내지 “일치”의 차이를 명확히 가려내는 책임을 진 곳이다. 만일 이 차이가 소멸된 채 법적 판결이 난다면, 비슷한 것과 같은 것은 동일하다는 논리가 통용될 것이며 비슷한 것이 유죄의 근거가 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법정은 법적 판단의 능력 자체를 상실한 공간이 될 뿐이다.
단 한사람의 이견자인 김이수 재판관의 반론은 나의 반론과 동일한 판단기준에 놓여 있다. 입증되지 못한 죄를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헌재는 바로 이 입증의 근거를 하나도 제시하지 못한 채 해산이라는 유죄처벌을 내렸다.
무죄로 결정 난 사항을 근거로 유죄판결을 내린 법정은 이미 법정이 아니다. 이것이야 말로 민주적 기본질서를 위배한 자의적 지배의 본보기이자 헌법정신의 파괴다.
이제 다시 민주주의를 위해
진보세력이 어떤 미래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인지를 논의하는 것과는 별개로, 우리는 죄를 입증하지 못한 상태에서 유죄판결을 내리고 정당의 해산이라는 처벌을 내린 행위에 대해 치열하게 따져 들어가야 한다.
새정치민주연합 역시도 헌재의 결정을 무겁게 받아들이겠다, 존중한다, 하면서 다른 토를 다는 모습은 보이지 않기를 바란다. 통합진보당의 정치에 대해 동의는 하지 않지만, 이라는 전제도 더는 달지 않기를 바란다. 피해나갈 구멍을 미리 준비하는 것 같아 보기 좋지 않다. 중요한 것은 새정치민주연합을 포함한 정당정치의 소멸이라는 위기다. 그런데 지금 그대들은 뭘 하고 있는가?
이미 국가보안법의 포괄적 적용이라는 위험한 상태가 벌어지고 있다. 이야말로 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실질적 해악의 구체적 사례다. 법을 통한 국가폭력의 지배체제가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추정이다. 추정이 확증의 근거가 되었으니 위법이 아니다. 아닌가? 헌재가 보장해준 자유와 권리이지 않은가? 아니라면 헌재의 판결부터 뒤집어라. 그러면 나의 추정도 즉각 거두어들이겠다.
수사과정에서는 유죄를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법정에서는 유죄를 추정하고 판결하는 순간, 법의 근본이 무너진다. 민주주의는 그런 법의 붕괴를 막는 것에서부터 실질적인 효력을 발생한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법이 폭력이 되는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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