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앙정보국(CIA)가 비밀감옥을 만들고 테러에 가담한 혐의가 있는 사람들을 수감해 잔혹한 고문을 자행했다는 보고서가 공개된 이후 전 세계에서 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자이드 라드 알 후세인 유엔 인권 최고대표는 10일(이하 현지시각) "고문을 명령하거나 저질렀다면 이는 심각한 국제범죄로 정치적 편의에 따라 면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며 고문에 관여한 미국 정부 고위 관계자와 CIA 요원을 기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무차별적인 개인정보 수집실태를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은 CIA가 저지른 고문에 대해 "용납할 수 없는 범죄"라며 "미국의 도덕적 권위에 오점을 남겼으며 고문 관련자를 기소하지 않는다면 하나의 사회로서 나아갈 수 없다"고 밝혔다.
비교적 미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던 국가들도 CIA의 고문에 대한 비판적인 반응을 내놓고 있다.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외무장관은 "고문은 자유민주 가치의 중대한 위반으로서 재발돼선 절대 안 될 일"이라고 밝혔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역시 "9·11 이후 잘못된 일들이 저질러졌다"면서 "우리가 도덕 권위를 잃으면 더 안전한 세상을 만들고 9·11과 같은 극단적 사건을 패퇴시키려는 목적을 이룰 수 없다"고 지적했다.
친미 성향의 아슈라프 가니 아프가니스탄 신임 대통령도 특별 기자회견을 통해 강한 유감을 표명하며 "오늘날 이 같은 행동과 고문은 정당화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자국의 인권문제로 미국의 비난을 받아온 중국과 이란 등은 CIA의 고문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했다.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는 자신의 트위터 계정을 통해 "미국 정부는 인권에 반하는 압제의 상징"이라며 "인권을 제창해오면서 한편으로는 수감자들의 인권의 기본을 짓밟아 왔다"고 꼬집었다.
훙레이(洪磊) 중국 외교부 대변인도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우리는 한결같이 고문에 반대한다. 미국은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동안 미국이 중국의 인권실태를 비난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우리는 인권문제를 정치화하고 이중기준을 들이대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CIA 고문 프로그램의 주요 피해지역인 중동 국가들은 다소 차분한 반응을 보였다. 이미 2003년 이라크 전쟁이 일어났을 때부터 미군의 고문이 자행됐었기 때문에 CIA의 이번 보고서의 내용에 대해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는 해석이다. 일각에서는 중동 정부들이 미국에 협조해 용의자 인도와 심문에 관여했기 때문에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관측도 제기됐다.
전직 CIA 간부들, "정치적 의도에 따라 왜곡됐다"
한편 전직 CIA 국장 3명과 부국장 3명은 11일 미국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에 고문 프로그램이 숱한 테러를 막았고 미국인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미국 상원 정보위원장인 다이앤 파인스타인 민주당 의원이 공개한 보고서에는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파인스타인 위원장의 보고서에 대해 "근본적으로 부실할 뿐만 아니라 9·11 이후 다수 미국민을 보호해온 CIA에 대한 당파적 공격"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CIA의 고문은 9·11 테러 이후 혼란과 전시라는 특수성 때문이었으며, 부적절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상원이 승인한 CIA 감사관이나 법무부에 보고했다고 항변했다.
고문 프로그램이 효과적이지 못했다는 보고서의 지적에 대해 이들은 오사마 빈 라덴의 최측근인 아부 주베이다와 9·11 테러를 주도한 칼리드 셰이크 무함마드를 예로 들면서 "알카에다 고위 조직원을 체포하고 여러 테러계획을 무산시켜 인명을 구하는 데에 심문 프로그램이 귀중한 역할을 했다"고 반박했다.
또 빈 라덴 체포와 관련한 첩보가 CIA 고문 프로그램과 무관하다는 보고서 내용에 대해서도 "심문을 통해 입수한 첩보가 없었다면 빈 라덴의 개인 연락책을 집중적으로 추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문제의 보고서는 지난 9일 공개됐다. 보고서에는 9·11테러 이후 2008년까지 아프가니스탄, 폴란드, 루마니아 등에 비밀 시설을 마련해놓고 알카에다에 가담한 혐의가 있는 사람들을 수감했다는 내용이 적시돼있다. CIA는 이들을 상대로 잔혹한 고문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CIA는 수감자를 움직이지 못하게 눕힌 다음 얼굴에 물을 붓는 이른바 '워터 보딩' 기법으로 고문을 실시했으며, 심지어 1명에게 최소 183번의 워터 보딩 고문을 가하기도 했다. 또 수감자를 콘크리트 바닥에 눕힌 뒤 옷을 벗긴 채로 방치해 고문 둘째 날 저체온증으로 숨지게 한 사례도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180시간 동안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 모든 체모를 깎아낸 뒤 흰 방에 집어넣고 밝은 조명 아래 아주 큰 소리의 음악을 계속 듣도록 강요하는 고문 등 정신적인 고문도 가해졌다. 그런데 고문을 받았던 수감자 119명 중 최소 26명은 테러와 전혀 관계가 없는 인물인데도 고문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졌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러한 고문이 테러 방지에 별다른 효과가 없었음에도 CIA는 자신들의 프로그램이 정보를 수집하고 테러를 방지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설명했다는 것이다. 또 고문을 받은 사람들 중 상당수가 고문을 피하기 위해 거짓으로 자백을 했음에도 CIA가 이 자백을 바탕으로 정보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한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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