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현대차 마크 보이는 정비소 보이지? 저긴 현대차 말고는 정비 안 해줘. GM이나 쌍용차, 르노삼성차는 못 들어가요. 정비가 끝나면 현대차에서 청구서가 날아오더라구."
"야, 전국에서 몇 개 안 되는 현대차 직영 정비소를 찾았구먼. 현대차 정비 협력업체들도 마크만 현대차 것을 쓰지, 실제로는 다른 메이커 차량도 정비해주고 있지. 당연히 비용 청구도 협력업체가 직접 하구."
이게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A/S 센터에 대한 상식이다. 그런데 고용노동부가 작성한 그림 한 장이 '인사이드 경제'의 상식을 뒤집어 놓았다. 지난 9월 말, 노동부가 SK브로드밴드(SKB)와 LG유플러스의 협력업체 27개사에 대한 수시근로감독 결과를 발표한 자료에 삽입된 그림이었다.
원청은 도대체 뭐하는 조직?
우선 위 그림 맨 위에 'SK브로드밴드'가 한 차례 등장할 뿐, 이 자료는 '협력업체'에 대한 근로감독 결과 보고서이다. SK브로드밴드와 '업무위탁계약'을 체결한 87개의 행복센터 기사들, 즉 SK브로드밴드 마크가 달린 작업복을 입은 설치/수리 기사들은 원청 소속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얘기이다.
'협력업체' 소속 행복기사들이 IPTV 설치 또는 인터넷 가설을 하면 기사들이나 협력업체가 돈을 받는 게 아니라 SK브로드밴드에서 직접 비용 청구를 한다. 고장 났을 때 수리 비용 역시 매달 내는 사용료에 포함되어 있다.
노동부가 "SK브로드밴드의 원·하청 사업 운영 체계"라는 설명을 붙여놓은 위 그림에 따르면 행복센터만이 아니라 콜센터(2개사 4개 센터)와 HS센터(1개사 8개 조직)의 경우에도 SK브로드밴드 원청이 아니라 협력업체인 것으로 보인다.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도대체 원청은 뭐하는 집단일까?
위 그림의 오른쪽 상단 4개의 네모 상자들은 다른 상자들과 다르게 조금 어두운 음영 처리가 되어 있다. ('인사이드 경제'가 그 상자들만 붉은색으로 구분선을 그어놓았다.) 아마도 노동부는 이 부분이 원청의 사업이고 나머지가 하청업체 사업이라고 구분을 해놓은 것으로 보인다.
간단히 말해 원청은 행복기사들의 작업 완료 여부를 확인한 후, 고객에게 비용을 청구하고 받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고객들이 SK브로드밴드 원청을 직접 대면하는 건 유일하게 '청구서'를 통해서라는 얘기다. 이게 바로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 474만 명, 유선전화 가입자 453만 명(시내전화 274만, 인터넷전화 179만), 실시간 IPTV 가입자 260만 명을 자랑하는 SK브로드밴드 원청이 하는 일이란다.
전국 5개 사업장 1591명의 직원이 1000만 가입자 관리?
지난달 14일 전자공시시스템에 올라온 SK브로드밴드의 올해 3분기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이 회사의 사업장과 직원 현황이 아래와 같이 공개되어 있다. 1000만 명이 넘는 가입자들을 관리하는 SK브로드밴드는 전국에 달랑 5개의 사업장을 갖고 있을 뿐이다. 본사 하나에 전국을 수도권/중부/서부/동부 등 4개로 나눠 각 권역을 책임지는 마케팅/네트워크 본부가 전부이다.
올해 9월 30일 기준, SK브로드밴드가 직접 고용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정규직과 계약직을 합해 총 1591명이란다. 노동부가 제시한 그림에 등장하는 행복센터 87개소에서 근무하는 기사들 3200명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인원이다.
"배보다 배꼽이 크다"는 말이 어울리는 대목이다. 고객들은 'SK브로드밴드' 하면 콜센터 상담원 또는 행복센터 기사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들은 SK브로드밴드가 직접 고용한 노동자들이 아니다. 어쩌면 고객들은 SK브로드밴드가 직접 고용한 노동자들을 평생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 정도의 조직으로 1000만 가입자를 관리하고 시장 점유율을 높일 수 있는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올까? SK브로드밴드 사업보고서는 아래와 같이 '서비스의 판매 조직과 판매 경로'라는 제목의 조직도 비슷한 그림을 하나 제공하고 있다.
그림 위쪽의 '판매 조직'을 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조직도의 위쪽 부분이 바로 원청의 다양한 사업부를 표시하고 있다. 수도권/동부/서부/중부 마케팅본부 등 4개 권역의 본부와 함께 10여 개의 사업부가 마케팅 부문과 기업 사업 부문을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그 아래 조그맣게 그려진 상자 안에서 'Home 고객센터'와 '콜센터'를 발견할 수 있다. 이게 바로 이 글 맨 앞에서 노동부가 표현한 그림에 나오는 행복센터와 콜센터/HS센터를 의미한다.
노동부가 그린 그림과는 정반대임을 알 수 있다. 노동부는 행복센터와 콜센터가 SK브로드밴드 업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표현했으나, SK브로드밴드가 그린 조직도에서는 원청의 업무가 훨씬 크고 다양한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원청의 10여 개 사업부에는 1500여 명의 노동자가 있을 뿐이며, 6000~7000명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는 Home 고객센터와 콜센터, 대리점 부문에서 실질적인 업무 대부분이 이뤄진다고 볼 수 있다.
그림 아래쪽의 '판매 경로'를 보면 이해하기가 더 쉬워진다. SK브로드밴드의 고객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가정'을 상대로 서비스의 '가입 신청 접수 및 유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게 바로 '콜센터'와 '각 지역 Home 고객센터'임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왜 'SK브로드밴드' 하면 행복센터 기사들과 콜센터 상담원을 떠올리게 되는지, 그리고 원청 소속 노동자들을 대면할 일이 거의 없는지, 이 그림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지 않은가.
'진짜 사장'이 돈 버는 방법
SK브로드밴드만이 아니라 LG유플러스의 사정도 똑같다. 노동부의 근로감독 결과 보고서에는 "LG유플러스의 원·하청 사업 운영 체계"를 나타낸 그림도 나와 있는데, 놀라울 정도로 SK브로드밴드의 운영 체계와 동일하다.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SK브로드밴드에서 신규 개통 업무 관련 스케줄러 역할을 담당하는 'HS센터'가 없고 콜센터로 단일화되어 있다는 것뿐이다. LG유플러스의 경우 전국적으로 69개의 '고객센터'와 업무 위탁 계약을 체결해, 총 2070명의 기사들이 고객 모집 및 개통과 A/S 업무를 하고 있다.
사실 노동부가 표현한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자동차 산업 컨베이어벨트처럼 업무 전체가 '하나의 흐름'처럼 물 흐르듯 진행된다. 어떤 고객이 SK브로드밴드 서비스를 신청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국번 없이 106번을 눌러 콜센터 상담원과 통화를 한다. 그러면 곧이어 그 고객의 인근에 있는 행복기사를 연결시켜준다. 서비스 설치가 완료되면 본사에서 비용 청구서를 보낸다(…).
이렇게 흘러가는 업무에 굳이 100개 가까운 업체들과 위탁 계약을 일일이 체결해 서비스를 대행하는 게 자연스러울까? 전혀 그렇지 않다. 노동부 스스로 저 그림을 그릴 때부터 알아챘을 것이다. "아, 이건 아닌데 …", "저 노동자들에 대한 사용자는 누가 봐도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
위 표는 SK브로드밴드 '사업보고서'에 공개되어 있는 연구개발비용 내역이다. 자기자본 1조1236억 원, 연 매출액만 2조5000억 원을 기록하고 있는 거대 기업 SK브로드밴드의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비의 비율은 0.01~0.12퍼센트 수준에서 밑바닥을 기어간다.
즉, SK브로드밴드가 돈을 버는 방식은 연구개발에 비용을 투자해 새로운 서비스를 개발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거다. 이들이 이윤을 뽑아낼 수 있는 비밀은, 자신들이 해야 할 영업 부문의 대부분을 도급 형식으로 외주화한 데에 있다.
SK브로드밴드가 직접 고용한 노동자들이 하는 대부분의 업무는, 이들 협력업체로 외주화한 도급 업무 전반을 관리하는 일이다. 만일 이들 업무를 외주화하지 않고 모두 직접 고용한 노동자들을 사용했다면, 이들 대부분은 관리자의 지위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오히려 큰 거짓말을 더 잘 믿는 착시 현상
노동부조차 저런 그림을 그릴 줄 아는데, 협력업체 노동자들의 진짜 사장이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라는 사실은 명명백백하다. 그런데 이 문제가 충분히 토론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 이유가 뭘까? 답은 여기에 있다. "대중은 작은 거짓말보다 큰 거짓말을 더 잘 믿는다."
만일 설치·수리 업무의 일부는 정규직으로 운영하고, 나머지 일부는 협력업체로 도급을 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직영 센터와 도급 센터의 운영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이 확연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본사에서 모든 서비스 내역을 관리·통제한다는 것이 공통점일 테고, 직영 센터에 비해 도급 센터 소속 노동자들의 고용이 불안하고 임금도 적다는 것이 차이점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렇다면 도급 센터 노동자들은 자연스럽게 차별에 저항하고 일어서기 마련이다. "왜 똑같은 일을 하는데 누구는 직영이고 누구는 도급이란 말인가?" "누구는 정년이 보장되고 누구는 1년마다 재계약을 해야 한단 말인가?" "똑같은 일을 하는데 왜 이렇게 차별이 심한가?"
그래서 거대 재벌 SK와 LG는 아예 업무 전체를 통째로 외주화해 버리는 가공할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직영 센터를 아예 하나도 만들지 않고, 모조리 도급 센터들만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차별을 느낄 일도 없어지니까 말이다. 오히려 거짓말을 하려면 이렇게 큰 거짓말을 해버려야 사람들이 처음부터 기대감을 버리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법이다. "아, 이런 업무는 애초부터 도급인가 보다."
여기에서도 주의할 점이 필요하다. 만일 업체 하나에 이 모든 일을 맡겨버리면 안 된다. 그러면 거의 3000~4000명의 노동자를 거느린 회사가 탄생하게 되는데, 그 정도 규모라면 노동조합이 들어서는 게 너무 쉽지 않겠는가. 그래서 각 지역별로 70∼80개에 달하는 업체를 선정해 노동자들을 30∼50명 단위로 잘게 쪼개놓아야 노조 설립을 막을 수 있다.
이게 바로 자동차 산업에서 벌어진 일과 유사하다.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자동차 산업에서 정규직과 사내 하청을 같은 조립라인에서 사용하다보니 "왼쪽 바퀴는 정규직이, 오른쪽 바퀴는 비정규직이" 조립하는 일이 생겨났다. 자연스럽게 사내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차별에 분노해 민주 노조를 결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누구는 자동차 만들고, 누구는 리어카 만드나?"
그래서 자동차 산업 자본가들은 한 가지 꾀를 생각해낸다. "그럼 아예 생산라인 전체를 비정규직으로 바꾸면 어떨까? 왼쪽 바퀴도 비정규직이, 오른쪽 바퀴도 비정규직이 조립하면 되잖아!"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동희오토와 현대모비스 등 100퍼센트 비정규직으로 구성된 공장이다. 정규직들은 오로지 관리 업무만 수행하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수십 개의 하청업체로 잘게 쪼개져 생산라인에 투입된다.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에서 벌어진 일과 너무나 똑같지 않은가!
"이익을 얻는 자가 책임도 져야 한다"
이 과정을 되돌려 바로잡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하나 있다. 업무를 통째로 외주화한 '진짜 사장', 즉 원청인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가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이다. 무슨 책임?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사용자 책임부터!
"이익을 얻는 자가 책임도 져야 한다." 이 명제가 바로 근대 노동법과 노사 관계의 원칙이다. 이익을 얻기 위해 외주화를 단행한 것도 SK와 LG였고, 그 외주화로 엄청난 이윤을 만지작거리는 것 역시 SK와 LG이다. 그렇다면 응당 외주화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구성한 노동조합에 대해 교섭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하다. 협력업체 '바지사장'들과 교섭해봐야 아무런 답이 없다는 걸 잘 알지 않는가.
현대차 사내 하청은 쌍용차나 GM이 아니라 오직 현대차 조립 업무에만 종사한다.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 역시 LG전자나 동부대우전자 제품은 다루지 않으며 오로지 삼성전자 제품만 다룬다.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 기사들 역시 각각 SK와 LG 제품만 취급한다. 다른 메이커 제품을 다룰 자유와 권리가 아예 없다. 이것만 보아도 이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진짜 사장'이 현대차, 삼성전자, SK브로드밴드, LG유플러스임이 명명백백하지 않은가!
'진짜 사장'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의 고객이 되는 평범한 시민들에게도 중요한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 만일 이들 대기업의 서비스가 엉망진창이라면 그걸 어떻게 따져 묻고 책임을 지우게 할 것인가? 저들은 영업과 서비스 업무 대부분을 외주화해 버렸기에 "협력업체 잘못입니다. 그쪽에 따지세요"라고 책임을 돌리면 그만이다.
30∼50명이 일하는 조그마한 협력업체에 도대체 무슨 책임을 물을 수 있겠는가? 원청의 허락을 받지 않는 한, 그들이 서비스와 관련해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받기 위해서도, 비정규직 등골 뽑아 이윤만 챙겨가는 재벌 대기업들이 책임지도록 만들어야 한다.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올 초에 노동조합을 만들어 협력업체들과 교섭을 해왔지만, 교섭 과정은 항상 그들에게 아무런 권한이 없다는 점만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을 뿐이다. 참다못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LG유플러스가 11월 19일부터, SK브로드밴드가 11월 20일부터 전면 총파업에 돌입한 상태이다.
총파업 2주차가 되어가는 지금, 여전히 '진짜 사장'들의 태도는 '배 째라' 식이다. 이들의 이런 태도를 가만히 놓아둔다면, 결국 평범한 시민들도 고객의 권리를 절대 누릴 수 없게 된다. 재계 순위 3, 4위를 달리는 SK그룹과 LG그룹, '진짜 사장'인 그들에게 책임을 묻기 위한 관심과 응원, 사회적 연대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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