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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조르는 남편 없어 다행? 그리 여길 수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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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조르는 남편 없어 다행? 그리 여길 수 없는 이유

[프레시안 books] 안미선 <여성, 목소리들>

딸만 있는 집이었다. 여중에 여고를 나왔다. 아들에 집착하는 어머니도, 딸만 있다고 바람을 피우는 아버지도 없었다. 오히려 자격지심인지는 몰라도 잘 기른 딸 하나가 열 아들보다 낫다고 주장하는 부모 밑에서 컸다. 생리를 시작할 때 공포를 느끼지도 않았다. 아, 이게 말로 듣던 그 일이구나. 화장실에 가서 생리대를 착용했다. 착용법은 어렵지도 않았다.

여자인 것이 불편한 적은 없었다. 아니 한 번 있었다.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하던 시절, 축구 경기가 있었는지 무슨 날이었는지 하교 버스에 남자 회사원들이 가득했다. 여중생이었던 나는 구석에 거의 갇히듯 찡겼다. 그래서 성추행이라도 있었냐고? 아니다. 나는 그저 눌려 있었을 뿐이다. 허리 한 번 펼 수 없었다. 힘에 눌려 있었다. 저쪽이 의도하지 않아도, 그 차이가 극명해 나를 압도하는 물리적 힘. 버스에서 간신히 내린 후, 나는 길가에서 소리 내어 울었다.

비참했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힘에 의해 몸 한 번 펼 수 없었던 내가 그렇게 무기력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나와 물리적인 힘의 차이가 선명히 느껴지는 존재. 남자 사람이란 저런 존재구나. 저들이 마음먹으면 오직 그 단순하고 물리적인 힘만으로 여자 사람을 압도할 수 있구나.

재수학원에 다니던 시절, 학원 강사들은 학교에서 보던 선생님들과 어딘가 달랐다. 그 다름의 일부로 그들은 학생들을 웃겨야 했고, 웃기기 위해 때로 음담패설을 했다. 선생님이라는 사람이 그런 농을 하는 것을 처음 본 나는 놀랐다. 그리고 더 놀란 것은 남학생들의 웃음이었다. 웃음이 컸다. 어느 때보다. 분명 그랬다. 정말 재미있어 하는구나. 얘네들은 이런 걸 진심으로 좋아하는구나. 참 다르다. 옆에서 까불고 장난치던 남자애들은, 아무래도 다른 존재였다.

이후 몇 번의 연애를 하며, 운 좋게도 그 다른 존재들이 만드는 폭력이라는 것을 대놓고 겪진 않았다(연애라는 관계가 폭력과 구별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음으로, 폭력을 겪지 않았다고는 말 못하겠다). 상대가 무조건 우악스럽게 구는 일도, 데이트 성폭력도 없었다. 생애 첫 섹스 당시, 제 욕구만 채우려는 상대로 인해 모멸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놀란 토끼 눈을 했어도 성적 호기심이 충만했다.

그럼에도 첫 잠자리를 가질 때마다 나는 남자 사람의 눈을 빤히 본다. 내가 모르는 눈이다. 숲 속 짐승을 만나면, 그 짐승이 저런 눈빛을 띄울까. 열기와 간절함으로 채워진 눈. 그 간절함을 보고 있자면, 감정이 차게 식는다. 이질감. 지금 나와 사랑이라는 것을 하는 저 사람이, 그간 내가 겪은 나와는 어딘가 다른 존재인 남성이구나를 확인한다.

식은 마음 때문에, 잠자리 도중 흥을 가라앉히는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상대의 흥분만이 아닌, 내 흥조차 깨버리는 말을. 상대에게 덜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 뻔한 그 말을 내 입으로 굳이 해야 한다는 사실에 적잖이 짜증이 나지만, 한다. 생각을 해봤자 번잡할 뿐이다. 대체 이 사회의 통념적 매력이라는 것이 뭔지. 왜 저 상대는 내가 이 말을 하기 전에 알아서 못하는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흥이 깨지는 정도가 아니라 관계가 깨지니, 그냥 말한다.

"그거 안 해?" 남자는 알아듣는다. "할까?" '해야지'가 아니라, '할까?'다. 남자는 미적거린다. "위험한 날이야?" 한 번 더 미적거린다. 그러면 내 쪽에서 말이 길어진다. 생리가 불순한 편이라 위험한 날이 따로 없으며, 설사 규칙적이어도 여자 몸이 시계가 아니니 위험한 날, 위험하지 않은 날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흥을 깨트리는 단호함. 그래도 하는 까닭은, 통념적 매력에 기대거나 상대의 흥을 맞춰주고 싶다가는 몇 시간 후, '은민'처럼 한낮 나무 아래서 제 손만 매만지고 있어야 할지 모름을, 풍문으로라도 들어 알기 때문이다.


잘 버텨온 그녀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오월의봄
<여성, 목소리들>(오월의봄, 2014년 9월 펴냄)의 은민은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잎이 뾰족하게 싹터 오르는 나무 아래 서 있다. 사후 피임약 하나를 들었을 뿐이데, 앞뒤 사정이 빤하다. 설사 겪지 않았어도 안다. 풍문으로 들어도 그것은 내 일이다. 누구의 침대에서든 비슷한 상황은 연출된다. 비슷하고, 비참하고 신경질 나는 갈등도 반복된다.

책 속 은민은 스물여섯이다. 은민보다 몇 해나 더 먹은 나는 가져오는 콘돔을 보고 안도한다. 안전에 대한 안도가 아니다. 나이를 먹은 내가 또 한 번 세상의 속임에 넘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주는 안도이다. 사후 피임약이 문제가 아니다. 독한 약에 내 몸이 망가지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인생의 정도에서 삐끗한 어긋난 여성에게 쏟아지는 모욕은 아무리 방어하며 살아간다 해도, 순간순간 튀어나와 공격해 온다. 은민에게 관계를 가진 시간을 물어본 후 키득거리는 의사처럼. 믿었던 사람에게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서도 온다. 그 공격들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그래서 안도한다. 은민보다 몇 해나 더 먹은 나는 방어하고 차단하는 법만 들었다.

이렇게 한순간을 넘겨도, 발이 푹푹 들어가는 늪처럼 남아 있다. 여자는 예쁘지 않으며, 앞으로 늙어갈 것이고, 살이 찔 것이고, 그에 비해 재산이나 경력은 쉽사리 늘지 않을 것이다. 예쁘지 않고 나이가 들고 살집이 있고 평범한 여성에게 뾰족한 모욕이 닥칠 여지가 많다. 결혼을 해도, 하지 않아도 애를 낳아도, 낳지 않아도, 섹스를 해도, 하지 않아도 모욕을 피해갈 길은 없다. 그것을 아는 것이 나이를 먹는 것이다.

<여성, 목소리들>에는 뾰족한 모욕에 상처 입은 숱한 여자들이 새겨져 있다. 그 속의 여자들은 '내가 왜?'라고 혼란스러워하기도, 쓰러져 있기도, 간신히 정신을 추슬러 되돌아보기도 한다. 그러다 성찰한다. 여자라는 존재를.

여자라는 존재인 나는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 조심하거나 감내하거나, 때로는 머리를 치켜들고, '그게 뭐!'라고 대거리한다. 맞아도 아프지 않은 척하고 아프지 않다고 마인드 컨트롤 한다. 그렇게 버티고 나이를 먹고 성장한다. 때로 여자라는 존재들을 보기 위해 책을 펼쳐든다. 그 여자들의 성찰이, 그 여자들의 밑바닥과 윗바닥, 악씀과 성찰이 고스란히 담긴 기록물을 보는 나는 분노하지조차 않는다. 맞아, 참 그래. 가끔 입소리를 낼 뿐이다.

저 글 속에 담긴 여자가 아니라서, 피임약을 한꺼번에 먹으면 뱃속의 아이가 죽을 거라 생각하는 여자아이가 아니라서, "모든 게 너 때문이야"라고 윽박지르며 내 목을 조르는 남편이 있지 않아서, 고객들에게 "생존을 위해 표정 관리"를 해야 하는 감정노동자가 아니라서, 남편과 아이들 세 끼 꼬박 해먹이다가 문득 "나 자신은 없는 거지"라고 말하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저 자리에 있던 적 있고, 앞으로 얼마든지 저 자리에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저 여자들의 삶이 불운으로 결정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책을 덮는다. 아파서 그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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