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라는 어느 카드회사의 광고 문구가 있었다. 지금 당장 신용카드를 호기롭게 쓰는 게 유능한 것처럼 여겨지는 동안, 빚은 늘어나고 마음은 더 공허해지기만 했다. 먹고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불필요한 각종 자질구레한 것들을 과잉 소비하는 데 더 많이 쓴 신용카드. "내일 이 큰 남자, 그는 OO카드를 씁니다"라는 또 다른 광고 문구처럼 신용카드를 무분별하게 쓰다가는 내일이 크기는커녕 사라질 수도 있다.
나는 신용카드를 절제하며 쓸 수 있다고?
신용카드에 대한 오해 1.
신용카드가 자연스럽고 당연한 동시에 사회계층을 나누는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현금을 쓰면 '채무불이행자(신용불량자)'로 보일까 봐 불편하다는 사람도 있고, 일정 소득수준과 조건을 충족한 사람에게만 발급되는 특별한 카드를 갖고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쓰는 신용카드가 내 정체성과 사회적 지위를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신용카드에 대한 오해 2.
카드 값을 연체하거나 채무불이행자가 되는 것이 순전히 개인 탓이라고 여긴다. 제도적인 관점에서 보면, 금융회사들이 현란한 최첨단 마케팅 수법을 동원해 신용카드를 경제적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는 '백기사'로 비치게끔 하고 개인의 빚에 대한 생각을 뒤바꿔 놓은 점이 가장 중요한 문제다. "번 만큼만 쓴다"는 윤리의식이 무너지고 개인 채무에 대한 사회적 질타가 없어지는 바람에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조장되는 소비의 덫에 걸려들고 있다.
신용카드에 대한 오해 3.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만큼은 신용카드를 절제하며 쓸 수 있고 주도적으로 소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용카드는 내가 돈을 얼마만큼 쓰는지 손실이 피부에 와 닿지 않기 때문에, 소비 자체를 왜곡하여 충동적으로 소비할 확률이 커진다. 가치판단을 느슨하게 하고 소비 대신 무엇을 잃을지 신중하게 비교하지 못하게 하는 신용카드에서 나라고 자유로울 수 있을까?
신용카드 대신 현금과 체크카드 쓰기
빚지지 않고 내가 어디에 얼마를 쓰는지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현금을 쓰는 것이다. 그런데 현금 사용에는 불편한 점도 있다. 미리미리 은행에서 돈을 찾아 놔야 하는 것도 그렇고, 화폐가 물가를 따라오지 못하기 때문에 동전으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일본만 하더라도 100엔짜리 동전으로 살 수 있는 것이 꽤 많은데, 한국에서는 100원으로 아무것도 못한다. 게다가 1만 원이 안 되는 돈을 쓸 때는 왠지 카드 내기가 미안하다는 이유로 현금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쓴 푼돈이 모여 은근히 큰 금액이 되기도 한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현금을 쓸 때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통장 잔액 한도 내에서만 쓸 수 있는 체크카드(직불카드)는 잔액을 많이 남겨 놓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신용카드보다 합리적이다. 지금 통장에 들어 있는 돈만큼만 써야 한다는 점이 심리적 압박 작용을 하여 소비를 억제하기 때문이다. 특히 신용카드와 달리 일시불로만 이용할 수 있어 각성 효과가 있다. 신용카드를 쓰면서 '무이자'라는 말에 할부 결제한 경험이 다들 한 번쯤은 있지 않을까? 계산대에서 '최대 10개월 무이자'라는 문구를 보면 "할부로 할까요? 일시불로 할까요?"라고 묻는 말에 선뜻 일시불이라고 답할 수 없다. 아예 할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고 소비에 긴장감과 부담을 주는 편이 낫다.
현금이나 체크카드를 쓰는 것은 소비를 미루는 효과가 있다. 당장은 이 물건을 사고 싶어 못 견딜 것 같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뭘 사고 싶었는지조차 잊어버릴 때가 많은 만큼, 소비 욕구는 바로바로 해결하기보다 되도록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 신용카드로 마구 '지르고' 난 후 정작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월급날이 되면, 카드 값은 좋았던 추억이 아니라 손실로 기억된다. '먼저 땡겨 쓰는' 신용카드의 가불 결제 시스템은 카드 값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해, 경제 상황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할뿐더러 학업을 시작하거나 직업을 바꾸는 등의 중요한 일도 내 의지대로 결정하지 못하게 한다. 카드 값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소비자운동 통해 소비 행태를 재구성하자
경제교육 사회적기업 에듀머니의 제윤경 이사는 "소비는 외부 자극에 큰 영향을 받는다. 신용카드를 쓰지 않는다는 것은 무수한 자극으로부터 거리를 둔다는 의미"라고 말한다. 간접광고가 없는 TV 프로그램을 찾아보기 힘들고 인터넷 뉴스만 봐도 배너광고에 자동으로 노출되는 이때, 카드 할인 혜택을 받는 것보다 불필요한 소비 자극을 피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
제윤경 이사는 신용카드의 본모습을 깨닫고 합리적으로 소비하기 위해서는 소비자 운동이 필요하다며 "한살림 같은 생협에서 먼저 나서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단순한 유통업체가 아니라 생활문화를 바꾸고자 하는 생협이 올바른 소비 행태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생협 매장에서 신용카드를 받지 않는 대신 지금껏 카드 회사에 내 온 가맹점 수수료를 지역사회에 내놓는 등으로 사람들의 호응을 이끌어 내야 한다"며, "'신용카드를 쓰지 않으면 매출이 줄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내려놓고 도전할 때"라고 말했다.
얼마 전 은행에 갈 일이 있었는데, 은행원이 혹시 지금 쓰고 있는 카드가 있느냐고 물었다. '뭘 또 새로 만들라고 그러는 건가?' 싶어 잔뜩 경계하며 "나는 이미 체크카드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더니, '그것 참 잘됐다'며 체크카드에 할부와 각종 할인 혜택 등 신용카드 기능을 더한 상품이 나왔으니 지금 갖고 있는 카드에 추가 가입하란다. 통장 잔액 한도 내에서는 체크카드로 쓰고 잔액이 다 떨어지면 신용카드로도 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며, 얼마 전 힘들게 신용카드를 없앤 나를 솔깃하게 했다.
이렇게 날이 갈수록 신용카드는 진화하고 소비를 부추기는 유혹은 교묘해지고 있다. 하지만 2014년 2/4분기 가계신용 금액(일반 가정이 은행 등 금융기관에서 대출받거나 외상으로 물품을 구입한 대금 등을 합한 금액)이 1040조 원에 육박하는 등 개인 빚 문제가 정말 심각할 뿐더러, 앞으로 당분간은 상황이 나아질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 책 <불황 10년>(우석훈 지음, 새로운현재 펴냄)에서는 "어려운 시기를 오랫동안 버텨야 한다면 가급적 소비가 불편하게 일상을 재구성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한다. 지금이 바로 신용카드의 간편함을 버리고 불편함을 선택할 때다.
신용카드 없애는 단계별 실행계획△ 1단계 - 대형마트 끊기'없는 것 빼고 다 있는' 대형마트에 가면 늘 생각보다 많이 사게 된다. 그 때문에 냉장고도 가득 차게 되는데, 냉장고를 너무 꽉 채우면 안에 뭐가 있는지 미처 발견하지 못해 유통기한이 지난 식재료를 쌓아 두고 또다시 마트에 가서 장을 보는 문제가 생긴다. 재래시장이나 동네 가게를 가면 조금씩 사게 되고, 그만큼 카드도 덜 쓰게 된다. 시장은 가는 게 귀찮다고? 무슨 소리! 주차하고, 쇼핑 카트 밀고, 구입한 물건 차에 싣고…. 사실 대형마트에 가는 게 훨씬 더 귀찮은 일이다.△ 2단계 - 전자제품 줄이기냉장고가 있어도 김치냉장고가 필요하고, 에어컨이 있어도 제습기도 사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전자제품은 할부금액을 늘리는 원흉이므로 되도록 줄이는 것이 좋다. 전기요금이 줄어드는 것은 덤.△ 3단계 - 신용카드 자르기정말 카드 없이는 살 수 없는지 시험해 보자. 여러 사정으로 도저히 없앨 수 없다면 주유비나 통신비 등 충동적으로 쓰지 않는 비용만 신용카드로 쓴다. 갖고 싶은 게 생기면 당장 카드로 사는 대신 적금을 든다. 돈을 모으면서 기대감과 뿌듯함으로 즐겁고, 보다 더 신중해져 '신상'보다 '최상'의 물건을 살 수 있다.
* 참고
<신용카드 제국>(로버드 D. 매닝 지음, 강남규 옮김, 참솔 펴냄)
<착한 소비의 시작 굿바이 신용카드>(제윤경·정현두·박종호·김미선 지음, 바다출판사 펴냄)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우리나라 대표 생협 한살림과 함께 '생명 존중, 인간 중심'의 정신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한살림은 1986년 서울 제기동에 쌀가게 '한살림농산'을 열면서 싹을 틔워, 1988년 협동조합을 설립하였습니다. 1989년 '한살림모임'을 결성하고 <한살림선언>을 발표하면서 생명의 세계관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살림은 계간지 <모심과살림>과 월간지 <살림이야기>를 통해 생명과 인간의 소중함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살림이야기>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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