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관련으로 5건의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추모만 했다면 별 문제 없었을 터인데, 대통령에게 책임을 물으려 했다는 것에 대한 정치적 탄압이었다. 지금도 대통령에게 책임을 물으려는 구체적인 행동만 없으면 대부분의 추모대회는 한없이 평화로울 수 있다. 과정에 한번 연행되고, 갈비뼈가 부러져 다시 병원 생활을 해보기도 했다. 우리가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찾아보겠다고 늘 함께 했던 정진우 씨의 카톡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텔레그램으로 망명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기도 하다. 결국 그들은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수백만 명의 국민들만 망명객들로 만들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렇게 샅샅이 찾으려는 노력은, 샅샅이 조사해 어떤 끈 하나라도 붙잡으려는 노력은 4월 16일, 그 바닷가에서 해야 했다.
그렇게 나름 열심히 가만히 있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고 생각도 해보지만 세월호 관련해서는 아무리 많이 울어보고, 외쳐봐도 가셔지지 않는 미안함과 안타까움 같은 것이 늘 ‘살아’ 남아 있다.
내게도 세월호에서 죽어간 단원고 학생들과 같은 또래의 아들이 하나 있다. 잠들어 있는 아이의 얼굴을 가끔 빤하니 들여다보며, 너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생각해 본다. 너처럼 그렇게 소중했을 죽어간 너의 친구들을 위해 아빠도 노력은 했다고 혼잣말을 해보곤 했다. 죽어간 아이를 잊지 못해, 아들이 평소 입던 양말과 속옷과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고 울먹이던 00의 아버지는 또 다른 나였다. 아이 얼굴이 너무나 선명히 떠올라, 그 아픔을 이기지 못해 밤에도 하늘의 달을 보지 못한다는 00 어머니가 또 다른 내 아내의 얼굴이기도 했다.
그들은 또 내 친구들이기도 했다. 열 다섯 명, 열 여섯 명, 스무 명, 한 명 한 명 동료들과 그 가족들의 죽음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보며 어깨가 무너져 가던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과 그들은 다르지 않았다. 85호 크레인 위에서 우리 동료들을 구해달라고 호소하던 김진숙과 박성호와 000이 그들이었고, 경부고속도로변 옥천나들목 광고탑 위의 유성기업 이정훈과 홍종인이 그들이었다. 다시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며 노조 사무실 배관호스에 목을 매단 000의 관 앞에서 오열하던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피맺힌 얼굴이 그들의 얼굴이었다. 96일을 67일을 굶으며 죽겠다고 말라가던 김소연과 유흥희가 유민 아빠가 되어 앉아 있었고, 시신마저 유린당한 삼성전자서비스 염호석 열사가 또 다른 이 시대의 실종자이기도 했다. 3000일 넘게 거리에 나앉아 있는 코오롱정투위의 최일배가, 오늘도 중앙지법 앞에서 우리의 소리를 들어달라고, 나의 가족들도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시위 중인 콜트-콜텍 목 잘린 기타노동자들의 처지가 청운동 앞과 광화문 광장의 유가족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나의 친구들이었다.
대통령과 정부와 국회와 법정은 이 모든 이들을 구해주지 않고, 도리어 외면하는 한 지점에서 한결 같았다. 세월호 참사 초기 바짝 엎드려 있던 대통령이 어느새 기세등등하여, 법치주의 운운하며 유가족들과 국민 모두의 바램인 특별법 제정에 가이드라인을 치고 나왔다. 본인은 이제 세월호 참사 국면에서 탈출해 살아났다고 생각하는가보다. 눈물 흘리며 사죄를 구하던 그 눈에 싸늘한 독기를 품고 청와대 앞에서 벌써 70여일 넘게 한번만 만나달라고 농성 중인 유가족들을 철저히 ‘떼쓰는 사람들’로 만들고 있다. 국회 역시 마찬가지다. 6.4지방선거, 7.30재보선 당시 앞다퉈 세월호 참사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던 그들이, 세 번에 걸쳐 유가족들과 국민들의 열망에 찬물을 끼얹고 도대체 무엇을, 누구를 위한 법인지 종잡을 수 없는 껍데기 특별법 제정을 서두르고 있다.
하여, 진정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그리고 나아가 세월호 참사로 들어난 국가의 무능과 자본의 부패를 넘어 한국 사회가 새롭게 태어나는 계기로 나아가자는 전사회적 열망은 2014년 4월 16일 이후, 연거푸 수장당하는 참사를 거듭하고 있다. 죽든 살던 이 죽음과 능멸의 체제 내에서 얌전히 가만히 있어라는 치욕에 시달리고 있다. 벌거벗은 임금님 한 분은 도도한데, 온 국민이 발가벗겨진 듯한 모욕에 시달리고 있다. 도리어 사회적 패배감과 무력감만 저 막막한 팽목항 앞 바다처럼 드넓어지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실종자 포함 304명의 생목숨이 눈 앞에서 수장당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젠 그 유가족들마저 온갖 능멸 속에서 고립당하고 침몰당하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을 것인가. 아직도 청와대 앞 청운동사무소에서,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 국회의사당 들머리 노천에서 100여일 넘게 노숙을 하며, 죽어간 우리 아이들, 선생님들, 노동자들, 평민들의 손을 잡아달라고, 우리들의 손을 좀 잡아달라고 긴급구난 신호를 보내고 있는 저 유가족 분들의 간절한 소리 앞에 이제 우리도 그만 일상을 위하여 귀를 막고 눈감고 돌아서야 하는가. 대한민국 세월호 전체가 좌초되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을 것인가. 저 오만한 대통령이, 저 무능하고 탐욕스럽고 잔인한 정부와 국회가, 사람 목숨을 이윤의 잣대로만 재는 저 무자비한 자본가 집단이 대한민국 전체를, 우리 모두의 삶 전체를 위험과 죽음 속으로 몰아넣는 이 대참사를 또 다시 묵인하고 넘어갈 것인가.
이런 비문화의 시대에, 반인륜의 시대에 과연 우리 문화예술인들이 창작의 도구로 쓰는 ‘연장’들은 어떤 의미인지, 어떤 의미여야 하는지를 묻고, 이 시대와 양심의 ‘연장’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찾아가는 <연장전>에 돌입하고자 전국의 문화예술인들이 나서고 있다. 영화, 영상, 미디어, 언론, 출판, 문학, 미술, 만화, 음악, 연극, 춤, 굿, 어린이책, 문화기획, 디자인계 등 모든 장르의 예술인들이 분노하며, 이건 아니라고 나서고 있다.
참사 200일 되는 11월 1일 <연장전> 돌입의 휘슬을 울리고, 11월 15일엔 1차전으로 전국의 문화예술인들이 광화문으로 자신들의 모든 ‘연장’들을 들고, 4.16참사 이후 만들어 온 모든 표현물들을 들고 모이기로 했다. 1일엔 항의와 규탄의 의미로, 추모와 반성의 의미로 자신들의 연장을 내려놓고, 11월 15일엔 그 추모와 반성, 항의와 규탄으로 버려진 연장을 다시 집어들고 모인다. 숫자를 떠나 지난 삼십년 동안 이 정도 규모로 문화예술인들이 함께 연대의 전선으로 모여 본 전례가 없었다. 이것이 우리가 기억하는 세월호 참사의 아픔의 정도였다.
이제 막 특별법의 골격 정도를 잡아나가려는 이 시점이 세월호 추모와 진상규명의 끝이 아니라, 본격적인 시작점 정도라는 문제의식으로, 끝나지 않는 <세월호, 연장전>에 돌입한다는 의지도 포함되어 있다. 특별법 제정과 진상규명위원회 활동 등은 사실 세월호 참사가 우리에게 던져준 과제의 가장 기본적인 것에 불과하다. 온 사회가 상갓집이 되고, 온 국민이 상주가 된 이 거대한 사건에 대한 기본적인 진실 조사도 하지 않겠다면 그 국가가, 그 정부가, 그 국회가 도대체 우리에게, 이 사회에 무슨 필요란 말인가. 국민 대부분이 공유하고 요구했듯 이 진상조사위원회는 대통령과 정부와 국회 내에만 설치되는 국가 기구로만 되어서는 곤란하다. 대통령과 정부와 국회 모두가 실상은 조사받아야 할 당사자들이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국가기구의 참여도 보장해야겠지만 대다수는 주권자들인 민간이 초헌법적 권위를 가지고 모든 국가기구에 대한 성역 없는 수사를 주도하는 준엄한 민간위원회여야 했다. 그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수사권과 기소권, 이제 와서는 위원장의 임명과 조사권까지 교란하고 박탈하겠다는 특별법과 그 진상규명위원회는 사실은 우리 사회 모두의 존엄과 안전이라는 당연한 요구를 교살하고 다시 한번, 아니 영원히 세월호의 참극을 저 깊은 망각의 바다 속으로 수몰시키고 말겠다는 거대한 학살극에 다름 아니다.
물론 우리는 이런 또 다른 참사를, 학살극을 막는 데 힘이 부족할 수도 있고, 공권력이나 사회 기득권층들의 총체적인 공세 앞에서 실패할 수도 있다. 이제 그만 세월호 문제를 대충 덮고 일상으로 돌아가자는, ‘경제’ 문제로 돌아가자는, 나중에 다시 하자는 우리 내외부의 달콤한 선동과 피로감에 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실을 말하는데 주저할 까닭이 있겠는가. 마지막까지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려는데 주저할 까닭이 있겠는가. 끝까지 질문하려는 노력을 그만둬야 할 까닭이 있겠는가. 끝까지 가만히 있지 않으려는 불온함을 포기할 까닭이 있겠는가. 신문 지상이나 TV 뉴스에서 간간히 나오는 국회 내 ‘쇼’나 보면서, 다시 넋 잃은 관람자나 되고 말 것인가.
문화예술인들이 나서니 그날 함께 응원해주고, 구경와 달라고 부탁하는 글이 아니다. 우리 문화예술인들도 부끄러운 마음, 지친 마음 다시 추스르고 나선다고 하니, 그날 우리 모두가 모여 이 기만적인 세월호 정국에 대한 분노의 소리들을 모아봤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입이나 국회의 기만적인 얼굴은 이미 몇 차례에 걸쳐 확인한 바, 진정한 국민의 뜻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나서서 다시 바르게 세우는 날로 만들어보자는 호소다.
우리 문화예술 역시 한 사회의 총체적인 문화와 가치의 우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밝혀가는 사회적 입법 기구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통치’ 행위는 대통령과 정부와 국회와 사법부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대통령과 정부와 국회와 사법부는 무슨 권력자들이 아니라 국민들의 심부름꾼들일 뿐이고, 모든 ‘통치’ 행위는 주권자들 모두의 집합된 행동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엄연히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지 않는 사람들의 사회에서 독재가 독점이 폭력이 모욕이 대양보다 더 크게 자라난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다른 누구보다
나는 세월호 200일이 되는 내일 모레, 어떤 마음의 ‘연장’을 들고 나갈 것인가?
다시 11월 15일, 나는 어떤 반성과 각성과 분노의 ‘연장’을 들고 나갈 것인가?
나의 ‘연장’은 어떤 역사의 밭을, 진실의 논을 일구는데 쓰여야 할 것인가?
나의 ‘연장’은 어떤 허위의 장막을, 권력의 벽을, 독점의 금고를 깨부수는데 쓰여야 할 것인가?
에니매이션 만화가가 꿈이었다는 소정이에게, 시각디자이너가 꿈이었다는 주아에게, 배우가 꿈이었다는 동협이에게, 춤을 좋아했다는 경주에게, 음악교사가 꿈이었다는 시연이에게, 제빵사가 꿈이었다는 다빈이에게, 동물학자가 꿈이었다는 재강이에게, 국제구호활동가가 꿈이었다는 수연이에게, 바리스타가 꿈이었다는 준민이에게, 수화통역사가 꿈이었다는 서우에게, 박물관큐레이터가 꿈이었다는 지아에게……생존자라는 게 멍울이 되어버린 수많은 아이들에게, 일반인 희생자들에게, 구조 활동 과정에서 다시 숨져간 수많은 의인들 앞에, 그 무수한 짓밟힌 꿈들에게 나의 ‘연장’은 어떤 이웃이어야 할까.
나의 <연장전> 역시 이제 시작일 뿐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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