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9일 AM 6:00
심명섭 씨가 진도 체육관 1층 문을 열었다. 피곤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이었다. 전날(28일) 오후 5시 25분께 세월호에서 그의 딸 단원고등학교 황지현 학생으로 추정되는 시신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들려온 후 잠이 잘 올 리 없었다. 그는 힘없이 웃으며 "그래도 좀 잤다"며 "덤덤하다"고 했다.
"우리 딸이면 좋고, 아니어도 어쩔 수 없고."
'혹시나' 하고 기대했다가 실망하기를 197일째. 마지막 실종자가 발견된 지도 103일. 그 긴 시간 동안 지현이 엄마 심 씨는 매일 실망하지 않는 법을 습득했다.
슬픈 생일 파티… "지현아, 하늘에서 잘 있어"
AM 10:10
10월 29일. 오늘은 딸의 생일이다. 지현이는 결혼 7년 만에 어렵사리 심 씨 부부 품에 안긴 귀하고 귀한 딸이었다. 부부는 딸의 18번째 생일상을 차리러 진도 팽목항으로 갔다. 부부는 거의 거르는 날 없이 아침마다 팽목항 부둣가에 지현이 밥상을 차렸었다. 그러다 최근엔 뜸했다. (☞관련기사 보기 : "극락왕생도 좋은데 엄마 한 번 보고 가")
"하도 안 나오니까 요샌 잘 안 갔어. 가끔 간식만 갖다 줬지."
어제도 챙겨주지 않은 게 걸려 심 씨는 상다리가 휘어지게 상을 차린다. 피자 한 판, 떡 두 접시, 미역국, 초콜릿. 그리고 세 개의 케이크. 케이크들은 여기저기서 지현이 생일을 알고 보내온 것들이었다. 목포에서 온 자원봉사자는 본인이 직접 만든 단호박 초코 케이크를 꽃으로 예쁘게 장식한 뒤 상 위에 올렸다. 이제야 생일상이 다 완성됐다.
"지현이는 좋겠네. 이렇게 생일 챙겨주는 사람이 많아서."
큰 초 하나와 작은 초 여덟 개에 불을 붙였다. 바닷바람에 촛불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초가 타들어 가는 걸 멍하니 보던 심 씨는 바다에 초콜릿, 피자 조각을 던졌다. 케이크 아래로 길게 촛농이 흘렀다. 상 차리는 걸 애써 보지 않던 지현이 아버지 황인열 씨는 긴 한숨을 쉰 뒤 "속이 녹아들어간다"고 했다. 전날 시신을 발견하고도 물살이 거센 탓에 건져 올리지 못했는데, 이날 새벽 재개된 수색에서도 역시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어서다. 이대로 또 때를 놓쳐 영영 시신 수습을 하지 못하는 건 아닌지. 그리고 그 시신이 지현이인지 아닌지 부모는 무엇도 알 길이 없었다. 기다리는 데 이미 이골이 난 그들이지만, 어쩌면 정말 마지막날일지도 모를 오늘만큼은 견디기 힘겨워보였다.
PM 2:30
생일 파티가 또 한 번 열렸다. 진도군청 대강당에서 기자회견이 열리기에 앞서, 세월호 실종자 가족대책위원회 법률대리인 배의철 변호사가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케이크를 꺼냈다. (☞관련기사 보기 : "13번이나 수색해놓고 왜 시신 못 찾았나")
"오늘이 우리 예쁜 지현이 생일이라서요. 기자분들도 같이 축하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강당에 조용히 생일 축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지현이 부모님과 함께 선 실종자 가족들도, 변호사도, 기자들도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지현이 아버지 황 씨가 마이크를 잡았다.
"하늘나라에 가서 편하게 있으면, 좋은 자리 잡고 있으면 아빠가 따라갈게. 지현아. 부디 하늘나라에서 편하게 있어."
"우리 딸 맞나 봐…" 197일만에 지현이를 맞이하는 순간
PM 6:30
속보가 떴다. "28일 발견된 세월호 실종자 시신 수습". 오후 5시 팽목항에서 열린 범정부사고대책본부 브리핑 직후 들려온 소식이었다. 시신을 건져 올린 시각이 6시 18분, 두 시간 후면 시신을 태운 경비 함정이 팽목항 선착장에 도착한다고 했다. 시신이 여학생이긴 하나 정확히 누군지 알 수 없는 탓에 지현이 부모님, 그리고 허다윤 학생의 부모님은 범대본 브리핑 후 체육관으로 가지 않고 팽목항에 남았다. 이들은 시신 발견 소식을 듣고 안산에서 달려온 유가족들, 그간 곁을 지켜 준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어둠이 짙게 깔리는 바다 앞에 섰다.
PM 7:52
먼 데서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 오후 7시 52분. 시신 인양 작업을 지켜본 가족들을 태운 배가 시신이 있는 경비함정보다 선착장에 먼저 도착했다. 다윤이 이모와 유가족인 지성이 아버지, 정수 삼촌이 착잡한 얼굴로 배에서 내렸다. 지성이 아버지는 "(인양) 잘 마쳤다. 잠수부들께서 고생이 많으셨다"며 "계속 눈물이 나고 한 명 한 명 다 나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생전 다윤이와 친했던 이모는 배 안에서 영상으로 수습 과정을 지켜보며 몇 번이나 다리에 힘이 풀렸다고 했다.
8시 13분. 검안 작업을 위해 선착장에 마련된 천막에 불이 들어오고 흰 옷을 입은 국과수 직원들이 천막 안팎을 바쁘게 오가자, 항구에는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유가족들과 자원봉사자들이 지현이 부모님 주위에 빙 둘러 앉았다.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수시로 어깨를 주무르고, 따뜻한 차를 나눠 주고, 청심환을 건넸다. 지현이 어머니는 계속 "괜찮다", "고맙다"며 웃어 보였다.
PM 8:32
다시 뱃소리가 들리고, 시신을 태운 경비함정이 선착장에 닿았다. 한 유가족이 "뱃소리도 듣기 싫다"며 도리질 쳤다. 배가 도착한 지 십수 분이 흘렀지만 시신은 좀체 보이지 않았다. 다들 말을 아끼고 바닷바람에 잘게 몸을 떨고 있었다. 이윽고 지현이 아버지 황 씨의 전화기가 울렸다. 전화를 끊은 황 씨가 고개를 숙였다.
"어두운 청색 레깅스, 웃옷에 24라고 쓰여 있고, 팔 가운데에 띠 같은 게 있대. 우리 딸 맞나 봐…."
이번엔 배 변호사가 지현이 부모를 불렀다. 주위 시선을 차단한 뒤 배 변호사는 이들에게 조심스레 사진을 보여줬다.
"흐윽"
황 씨의 억눌린 울음소리가 팽목항 바다에 울려 퍼졌다. 세월호 사고 이후 197일. 실종자 숫자가 10에서 9로 넘어가는 순간이자, 지현이 부모님의 긴 기다림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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