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침몰 사고 시점인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48분경으로부터 이 글을 쓰는 현재, 날짜로는 195일. 사망자 294명. 실종자는 모두 10명이다. 숫자에 어두운 평소와 달리 애써 고쳐 앉으며 공식적 기록을 명토박아두는 것은 기억과, 기록사이 느슨할 수 있는 감정과 이성사이의 끈에 길항(拮抗)을 유지하려 함이다.
그 날 배를 타고 나갔다. 바다는 짙고도 검었다. 수심 얕은 인근해지만 모든 의미가 오로지 죽음과만 연동된 바다는 심연의 깊이로 무한히 무겁고, 무참히 무너지듯 무서웠다. 팽목항과 난민 수용소 같은 진도체육관을 오가며 무거운 카메라를 매번 숨겨야 했다. 결국 대부분 찍지 않기로 했다. 한 낮 내내 주검을 나르던 작은 포구에서 바라본 검은 섬들은 한 밤이 되어 무수한 조명탄 섬광을 받으며 실루엣이 더욱 날 서게 그려졌다. 그 너머 조명탄 불빛 아래 바다는 구조, 생환, 기원, 희망 등으로 분주함을 암시했으나 생존자가 나올 거라고 누구도 말하지 않았고 실은 속으로 누구도 믿지 않았다.
항구는 젊은 어미들이 오래도록 짐승처럼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했다. ‘기레기’가 된 나와 같은 종족들이 가끔 혼비백산 놀란 듯 무리지어 이리저리 도발했고 그 사이 이 미증유의 재난은 바다와 항구, 체육관 어디에서도 목격되거나 기록되지 않았다. 오히려 사진은 시간이 흐를수록 미궁으로 빠져들고 재난의 ‘결정적 순간’이라 쏘아댄 수천만발 ‘샷(shot)’의 유탄들과 함께 빠르게 지쳐갔다. 심지어 팽목항의 서해 낙조와 빛깔 곱게 떠오르는 풍등과 조명탄으로도 재난은 간단히 포장되었다.
도시의 광장으로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사진은 오히려 도시에서, 예컨대 이번만은 ‘수전 손탁’ 여사의 ‘타인의 고통’이 사진 속에서 실재하는 아픔으로 튀어나올 듯 보였다. 대통령이라는 어느 여인이 한참동안 눈꺼풀을 여닫지 않으며 흘린 눈물의 실체(마치 눈물의 염도분석이라도 할 수 있을 듯이)와 아무도 모르는 그녀의 은밀한 7시간도 사진은 진실을 가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끔 사진이 내게 묻곤 했던 질문들이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기억과 기록은 너의 사진 속에 있는가?’ ‘진실이 이미지일 수도 있나?’ ‘너의 다큐멘터리는 의미의 딱지 붙이기 놀이 따위 아닌가?’ 그러다 언제나 그렇듯 사진은 진실의 일말을 찾아내거나 혹은 작은 흔적도 가리키지 않고 슬그머니 소멸되었다. 참사와 국가부재에 대한 천벌이라 해도 좋을만한 살벌하게 번쩍이는 천둥 번개도 준엄하게 내려쳤으나 소용이 없었다.
얼마 후 다시 찾아간 텅 빈 팽목항은 빛바래 남루한 노란 리본들만이 기표(記標)로 참사의 기의(記意)를 나타내고 있었다. 노란 리본이 날리는 방파제를 한동안 피곤하게 걸었다. 방파제 아래 바다를 보며 순간, ‘이미지’와 ‘진실’과 ‘사진’의 모호한 관계의 연산을 아주 짧게(15분의 1초 쯤?)했었다. 울렁이는 물결에 흐느적거리는 국화 한 송이, 부유하는 오물과 해조류 속에서 얼핏 무언가를 본 듯 했으나 이내 너무 진부한 이야기일뿐 이었다.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 팽목항을 황급히 떠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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