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국(一國)인가, 양제(兩制)인가?
쓰기 힘든 글이었다. 한참을 망설였다. 홍콩에 대한 이야기다. 이유는 크게 둘이었다. 일단 상황이 너무 유동적이었다. 홍콩을 소재로 삼아야겠다고 처음 마음을 먹은 것은 5월이었다. 센트럴 점령 운동의 기운이 막 싹트고 있었다. 6·4(천안문 사태)와 7·1(홍콩 반환일)을 지나며 열기는 한층 고조되었다.
10·1(중국 국경절)에는 정점에 달했다. 센트럴만이 아니라 도심 곳곳이 점령되었다. 홍콩 반환 이래 가장 역동적인 한 해가 숨 가쁘게 전개된 것이다. 홍콩은 더 이상 금융의 도시, 쇼핑의 천국만이 아니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아래 가장 정치적인 도시였다. 눈길을 거둘 수가 없었다. 흥미가 진진했다.
하지만 통상적인 독법에는 수긍하기 힘들었다. '(홍콩) 민주 대 (중국) 독재'의 구도가 마땅하지 않았다. 상황은 훨씬 복합적이었다. 가깝게는 홍콩 반환 17년, 멀게는 아편 전쟁 170년의 시간이 포개져 있는 역사적 난제였다. 그래서 '민주화 운동'이라는 수사는 몹시도 부족하고 미흡했다.
마뜩치 않은 측면도 있었다. 그러한 독법이야말로 '서구 민주'의 보편성과 표준성을 승인하는 것이다. '역사의 종언'이라는 낡은 이데올로기를 추인하는 것이다. '87년 체제'의 한계를 절감하고,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고민하는 입장으로서 착잡하고 심란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딴죽을 걸기가 쉽지 않았다. 과연 민주주의는 탈냉전 이래 유일사상으로 군림하는 지배 이념이었다. 자기 검열이 작동했던 것이다. 그래서 5개월이나 묵히게 되었다. 여전히 명쾌한 답을 구하지는 못했다. 고민을 공유하는 편이 낫겠다.
기폭제는 6월 10일이었다. <홍콩 특별 행정구에서의 일국양제 실천>에 관한 백서가 발간되었다. 홍콩에 대한 백서도 처음이었고, 분량도 3만4000자에 달하는 장문이었다. 중앙 정부가 새삼스럽게 홍콩 통치의 기본 방침을 (재)천명한 것이다. "중앙이 홍콩에 대한 전면적 관치권을 갖는다"라고 명시한 대목이 핵심 문구였다. '애국자'도 강조했다. "애국자가 홍콩을 다스려야 한다"고 꼭 집어 명기했다.
왜 지금 '애국'과 '전면적 관치권'인가. 백서 중에 단서가 있다. '외부 세력'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꼬집어 말하면 미국과 영국의 총영사관을 가리킨다. 근래 홍콩의 정국에 영미가 주도하는 '색깔 혁명'의 혐의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청제국을 흔들었던 '8개국 연합군'에 빗대기도 한다. 즉 '민주화'를 명분삼아 홍콩의 분리 독립을 부추기는 외부의 분탕질에 부화뇌동하는 세력을 소탕하겠다는 뜻이다.
맹탕 음모만은 아니지 싶다. 범민주파 중 일부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연루가 밝혀지고 있다. 미얀마의 미국계 사업가가 자금줄 노릇을 했었다. 전혀 새로운 얘기만은 아니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미국 총영사관 기밀 자료에도 홍콩 인사들과의 회동 및 자금 지원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그 중에는 네오콘의 거물인 폴 울포위츠의 이름도 보인다. 하더라도 범민주파의 다수가 영미와 직접 관련이 있다고 간주하기는 힘들 것이다. 침소봉대는 말아야겠다.
홍콩이 가장 큰 문제로 삼고 있는 말도 '전면적 관치권'이다. 기존의 일국양제가 보장했던 '고도의 자치권'과 모순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애국자'로 입후보자의 조건을 제한한 것을 "북조선식 보통 선거"라고 성토한다. 즉 중앙이 애국, 다시 말해 '일국'에 초점을 두고 있다면, 홍콩은 자치, 즉 '양제'를 더욱 강조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민주냐, 독재냐"보다는 "일국이냐, 양제냐"의 구도가 한층 적합해 보이는 것이다.
중앙이 일국을, 홍콩이 양제를 강조하는 까닭은 실상 그다지 멀지가 않다. 양쪽 공히 근대사 트라우마의 소산이다. 대륙은 주권 상실의 상징적 장소였던 홍콩이 재차 외부 세력의 개입으로 분리 독립 기운이 고조되는 듯한 징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홍콩 또한 영국에 이어 중국에 의한 '재식민화'의 가능성에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다. 즉, 아편 전쟁 이래 대륙과 홍콩이 분리되어 노정한 150년의 경험이 양쪽의 인식차를 가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과연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다.
민주화와 탈중국화
2014년 홍콩 민주화 운동의 주역은 단연 학생들이었다. 대학생 연합 조직 '학련(学联)'과 고등학생 연합 조직 '학민사조(学民思潮)'가 선봉에 섰다. 홍콩 학련은 1989년 천안문 사태의 베이징 '학련'의 계승을 표방한다. 비서장 저우용캉(周永康)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6·4를 추모하는 촛불 집회에 참여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1989년생이기도 하다. 천안문에서 희생된 청년들의 '환생'으로 여길 만하다. 홍콩판 '신청년'이라고도 하겠다.
그들이 역사의 전면에 나선 것에는 일정한 계기도 있었다. 올해 봄 국회를 점거하며 대만(타이완)의 정가를 강타했던 대만의 학생 운동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실제로 대만의 대학생 조직과 실질적인 교류도 있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대만 민주화의 병폐까지도 답습하고 있는 듯 보인다는 점이다.
대만 또한 '87년 체제'의 한계 속에 갇혀 있다. 민주를 얻되, 중국을 잃었다. 양안의 분단 체제를 내재화하는 '냉전형 민주'에 그쳤다. 그리하여 '반공(反共)'이 '반중(反中)'으로 변질되었다. 그럼으로써 민주주의 또한 심화되지 못했다. 선거의 득표를 위하여 '대만 의식'을 동원하고, 중국과의 적대성을 고취하는 악습이 반복되었다. 대만인의 주체성을 회복한다면서, 중화 문화는 사절하고 일본의 식민 통치는 긍정하는 어이없는 풍경도 연출되었다. 자신들의 협애한 사고에 비판적인 세력에 대해서는 매판 세력(卖台)이라는 딱지도 아끼지 않았다. 탈중국화의 덫이었다. 그 볼썽사나운 꼴이 홍콩에서도 은근히 변주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본토(本土)'라는 말이 전이되었다. 주류 매체의 일상어로 침투하여 대륙과 홍콩 간의 갈등을 부각시킨다. 양안 모순에 견주어 '육항(陸港) 모순'이라고도 한다. 그럴수록 중국공산당뿐만 아니라 14억 중국 인민 전체와 적대하는 구도가 강화되었다.
대륙 여행객들을 '메뚜기 떼'로 폄하하기 일쑤며, 일부는 박멸 운동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한다. 그들의 습격으로 홍콩의 문명 사회가 파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으로 영국의 식민 통치는 굴절되어 회고되고 있다. 일부는 유니온잭을 흔들며 '홍콩 독립'을 외칠 정도이다. 일제의 식민지 근대화를 향수하는 일부 대만 민주파의 도착을 고스란히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홍콩 신청년 사이에도 좌·우의 갈래가 있다. 좌파들은 한층 정의롭고 평등한 홍콩을 지향한다. 그래서 소수 집단의 권익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대륙의 농민공들이 유입되어 왕년의 동남아 노동자들을 대체하고 있다. 그들에게도 홍콩 주민들과 동일한 권리를 부여하자는 시민 운동을 펼치는 것이다.
반면 우파들은 본토 이익의 수호를 강조한다. 대륙인들이 홍콩의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고 여긴다. 일자리만이 아니다. 입시 경쟁도 격화되었다. 홍콩대학과 중문대학 등 중화권 최고 명문 대학에도 점점 대륙 출신들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여러모로 홍콩 토박이들이 독점적으로 누리던 혜택들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륙인과 홍콩인의 족군 차이를 적대적 의식으로까지 고취시킨다. 퇴임 요구에 시달리고 있는 런충잉은 취임 연설을 영어가 아니라 중국어로 한 최초의 행정장관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중국어가 보통화(普通話), 즉 베이징어였다. 홍콩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광둥어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홍콩은 '일지삼어(一地三語)' 상태이다. 영어와 베이징어, 광둥어가 언어생활을 삼분한다. 그런데 광동어 권 안에서도 홍콩의 미래가 불투명하다. 일국양제가 완료되는 2047년이면, 상하이나 베이징은 말할 것도 없고 남중국의 선전이나 광저우에도 못 미치는 지방시로 전락할 것이라는 우려가 없지 않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20세기 중반이 홍콩의 절정기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대륙인의 권익까지 보살피자는 좌파들이 오지랖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홍콩을 대륙에 헌납하는 매판 세력(賣港)으로 비난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내심으로 원하는 것 또한 '홍콩민주'보다는 '홍콩민국'에 가까울지 모른다. 실제로 '항식(抗殖)'이라는 구호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중국의 식민주의에 저항한다는 뜻이다. '중문(中文) 합법화' 운동을 펼치며 영국의 식민 통치에 저항했던 1960-70년대의 홍콩과 견주노라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대륙/홍콩 뿐 아니라, 홍콩 내부의 갈등도 그 골이 깊어지고 있다. 범민주파 가운데 '본토파'들은 중국을 홍콩의 민주와 자유, 인권을 앗아가는 악귀로 묘사한다. 그 반대편에 선 재건파들은 본토파를 홍콩을 어지럽혀 중국을 곤란에 빠트리려는 영미의 괴뢰로 공격한다.
이들의 대립 격화는 홍콩과 대륙의 관계에도 부정적 파장을 미치고 있다. 홍콩 본토파의 목청이 높아지면서 베이징 강경파의 입지 또한 강화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즉, 홍콩의 '독립파'와 베이징의 '일국파'의 '적대적 공존'이 작동하는 것이다. 육항 간 분단 체제의 속성이 아닐 수 없다. 그럼으로써 대륙의 개혁파과 홍콩의 중간파가 연대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이 잠식되고 있다. '양제'가 품고 있던 창조적 제도 실험의 가능성 또한 그만큼 고갈되고 있다.
중국몽과 민주몽
그럼에도 2014년, '민주'가 재차 핵심 단어로 떠올랐음은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중국에서 '민주'가 시대적 화두로 등장한 것은 1919년 5·4 운동기였다. '양무(洋務)'와 '변법(變法)', '공화(共和)'에 이어 '민주'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그리고 1920년대의 동서 문화 논쟁을 촉발시켰다. 꼭 100년이 되어가는 것이다. 머지않아 민주 대논쟁, 동서 문화 대논쟁이 다시 펼쳐지리라는 예감을 떨치기 어렵다. 때는 이미 무르익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탈정치 시대의 정치'(왕후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널리 공감대를 얻고 있다. 새 민주, 새 정치에 대한 '타는 목마름'이 동아시아에 만연하다.
홍콩이 한국과 대만의 시행착오를 답습하지 않기를 바란다. 북조선과 중국을 괄호 쳐서는 내부의 민주화도 진척되지 않는다. 탈중국화의 역류를 거스르며 민주주의를 추진해야 홍콩 민주도 살고 대륙 민주도 살린다. 즉 민주홍콩은 민주중국의 선봉대를 자임해야 한다. 홍콩 시민 700만의 시범 효과로 중화민족 14억에 참신한 자극을 선사해야 한다. 홍콩의 '민주몽'과 대륙의 '중국몽'이 합작하여 '중국 민주몽'으로 합류할 수 있을 것이다.
대륙에도 5·4 이래 '민주', '신민주', '대민주'로 이어지는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가 있었다. 그래서 육항 합작으로 일국양제를 일국'양제'(良制)로 진화시켜야 한다. 즉 홍콩은 새 민주, 새 정치로 항진하는 대장정의 근거지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끝내 '동방 민주'로까지 가닿을 일이다. '동구 민주'가 정답이 아니었던 만큼, '서구 민주' 또한 해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홍콩의 향배가 남일 일수가 없다. 아편 전쟁은 천하대란의 출발이었다. 홍콩 할양은 중화 세계 붕괴의 시발이었다. 이어서 류큐, 베트남, 대만, 조선이 식민지가 되었다. 청불 전쟁, 청일 전쟁, 중일 전쟁,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이 꼬리를 물었다. 그래서 홍콩이 150년 만에 중국에 복귀한 7월 1일을 식민과 냉전 청산으로 축하하며 기념하지 못하는 풍경이 참으로 안타깝다.
8월 15일, 광복절을 기쁜 마음으로만 맞이할 수 없는 석연치 않음과도 유사한 감정이다. 그만큼이나 '홍콩 사태'는 바다 건너 불구경이 아니다. 작게는 '새 민주'의 실험장으로서, 크게는 20세기형 국민국가 이후의 시험장으로서 공명하고 공진화해야 할 이웃의 고뇌이고 고투이다. 그래서 동아시아인으로서의 공속감, 천하위공의 마음가짐을 연마하는 훈련장으로 삼기에도 적격이겠다.
그러한 집합적 소망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태평천하의 복구 또한 더딜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홍콩 민주의 회심을, 새 정치의 갱신을 진심으로 기원하고 성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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