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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은 주한미군 감축 막기 위한 카드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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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은 주한미군 감축 막기 위한 카드였나?

[제네바 합의 20주년 특별기획] 북핵, 역사에 길을 묻다(2)

필자는 앞선 글에서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들춰냈다. 첫째는 북한이 2008년 제출한 핵 신고서를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검토한 결과, 1992년 북한의 플루토늄에 대한 최초 신고가 사실에 부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둘째는 북한이 제출한 핵시설 운전기록 문서는 진본이었다는 것이다. 끝으로 콘돌리자 라이스와 크리스토퍼 힐이 이러한 사실들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북핵 문제 발단의 최초 원인을 완전히 새롭게 구성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워준다. 미국 내 강경파의 농간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해졌기 때문이다.

이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1990년대 초반 미국의 세계 전략을 살펴보는 것부터 출발할 필요가 있다. 동유럽의 체제 전환,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독일 통일, 소련의 몰락 등을 거치면서 미국은 '승리의 샴페인'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는 곧 세계 전략을 둘러싼 백가쟁명으로 이어졌다. 특히 해외주둔 미군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최대의 숙제였다.

주한미군 감축 중단이 북핵 때문?

주한미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1990년 4월 미국 의회는 '넌-워너 수정안'을 통과시켰고 이에 따라 아버지 부시 행정부는 <동아시아 전략구상>을 작성했다. 여기에는 주한미군 3단계 감축계획이 담겨 있었다. 1단계(1990~1992년)로 공군 병력 2000명과 지상군 중 비전투 요원 5000명 등 총 7000명을 감축하고, 2단계(1993~1995년)에서는 전체 병력수를 3만 명 가량으로 줄이며, 마지막 3단계(1996~2000년)로 한국군이 한미연합전력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내용은 한미연례안보회의(SCM)에도 담겼다. 1990년 SCM에서는 주한미군 감축 계획이 "한국의 방위력 증강을 포함한 전반적인 한반도 상황 변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1991년은 양측이 "한국 방위에 대한 미국의 역할을 점차 지원적 역할로 전환해 나간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이러한 합의가 제대로 이행되었다면, 10년 가까이 대한민국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는 전시작전통제권도 진즉에 환수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주한미군 3단계 감축계획은 1단계에서 끝나버렸다. 1991년 SCM 회의를 마치고 딕 체니는 “주한미군 감축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1992년 SCM 공동성명에서 "넌-워너 2단계 주한미군 감축을 연기하기로 합의"했다. 이어 미국은 1993년 <국방정책 전면 재검토 보고서>(Report on the Bottom-up Review)에서 "미국이 북한과 이라크에 맞서 동시에 양대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대규모 병력을 계속 주둔시켜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이러한 전략 변화를 반영하듯, 1994년 SCM에서는 "주한미군이 한반도 전쟁 억제와 동북아 지역의 안정에 지대하게 기여하여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기여할 것이라는 데 같이"했다. 주한미군을 지원자 역할로 전환하기로 했던 당초의 방침을 바꿔 주도적 역할을 계속하기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은 작전통제권도 '평시'만 환수하게 됐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주한미군 감축 계획을 철회한 것일까? 공식적인 설명과 지배적인 인식은 북한 핵문제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인과관계는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미국이 북한의 영변 핵시설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기 시작한 시점은 1980년대 말부터이다. 5메가와트(MWe) 원자로 가동에 이어 플루토늄 재처리 공장과 50MWe 및 200MWe 원자로의 건설도 포착된 것이다. 프랑스의 상업위성인 SPOT도 89년 9월에 영변 핵시설 사진을 공개했다. 그런데도 미국은 주한미군 감축 계획을 마련해 추진하고 있었다. 또한 미국이 미군 감축 계획을 번복할 때에도 북핵 상황이 특별히 악화된 것도 없었다. 오히려 북한은 미국이 강력히 요구했던 국제원자력기구(IAEA) 안전조치협정에 서명해 핵사찰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 관계는 북핵 문제가 터져 주한미군 감축 계획이 철회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히려 대규모의 미군 주둔을 정당화하고 남북관계 및 북·일 관계 진전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 강경파들이 북핵 문제를 침소봉대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미국의 비밀 해제 문서들을 중심으로 그 내용을 추적해보면 이렇다.

남북관계와 북·일 관계가 급물살을 타던 1991년 11월 중순,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은 SCM 회의 참석차 방한을 앞둔 딕 체니 국방장관에게 서신을 보냈다. 이 서신은 베이커가 서울과 도쿄를 방문하고 돌아온 직후에 작성된 것이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세계적인 탈냉전과 남북관계 개선에 자신감을 갖고 북핵 해결에서도 한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대해 베이커는 "남한 독자적으로 북한의 핵 포기를 유도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며, 이 점을 남한에게 분명히 전달해달라고 체니에게 요구했다. 특히 "남한에게 우리의 안보 공약 및 이익이 미국에게 큰 발언권을 주고 있다는 점을 인식시킬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이 한국에 대한 안보공약을 지렛대로 삼아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견제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 서신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급물살틀 타고 있던 북·일 관계 정상화도 북한이 IAEA 안전조치협정에 서명하고 이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플루토늄 재처리 능력을 폐기하는 것과도 연계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건 북핵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기 전까지 북·일 수교는 꿈도 꾸지 말라는 의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일본의 일부 관리들이 이러한 미국의 입장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며 "그들에게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국의 전략에 대해서도 강하게 견제구를 날렸다. 이 서신에서는 중국이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남북한 교차승인과 북·미 고위급 회담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전달했다고 소개했다. 남한은 소련 및 중국과, 북한은 미국 및 일본과 관계 정상화를 하고 북미가 직접 협상을 해야 핵문제를 풀 수 있다는 의미였다. 이에 대해 베이커의 서신에서는 북미 회담의 수준을 높이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회담의 목적은 “평화 문제를 협상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핵문제에 대한 미국의 입장과 기대를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라고 못 박았다.

이처럼 미국 일각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는 화해협력과 평화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1991년 말~1992년 초에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북한의 IAEA 안전조치협정 서명 등 중대한 조치들이 잇따라 이뤄진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한미 양국이 팀 스피릿 훈련을 중단키로 한 방침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노태우 대통령과 조지 H.W. 부시 대통령은 1992년 1월 7일 정상회담을 갖고는 북한이 IAEA와 적극 협조하면 이 훈련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북한도 즉시 IAEA 안전조치협정에 서명하겠다고 화답했다. 그리고 그 해 5월부터 IAEA의 핵사찰이 시작됐다.

한미 강경파의 반격, '팀 스피릿' 재개

당시 북한의 IAEA 안전조치협정 체결 및 사찰 수용은 중대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미국이 남북관계 및 북·일 관계 개선의 핵심 조건으로 내세웠던 것이 상당 부분 해결된 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미국 국무부 일각에서도 새로운 구상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1992년 7월 찰스 카트먼 국무부 한국과장은 앤더슨 동아태 담당 수석부차관보에게 메모를 보냈다. 그는 "남한과 일본 등은 북핵 문제 너머를 생각하고 있다"며 미국도 북미관계 정상화 및 한반도 통일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 제안이 국무부가 행정부에게 권고할 정책의 기초가 되기를 희망한다"면서 말이다.

▲ 북한은 팀스피릿 훈련을 중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1992년 10월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SCM)에서 팀스피릿 재개 방침을 발표하자 북한은 남북 대화 중단과 핵사찰 거부 방침을 경고했다. 이듬해 3월 북한은 핵확산방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사진은 팀스피릿 훈련에 참가한 바 있는 미국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 ⓒ연합뉴스

그런데 이 사이에 미국 내에서는 다른 기류가 형성되고 있었다. 아들 부시 행정부 때 맹위를 떨쳐 국내에도 잘 알려진 네오콘의 발호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문서가 있다. 아버지 부시 행정부 때 국방장관이었던 딕 체니의 지시로 당시 국방부 차관이었던 폴 월포위츠가 작성한 <국방정책지침(Defense Planing Guidance)>이 바로 그것이다. 1992년 2월에 작성된 이 문서의 초안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우리는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고 억제 실패 시 격퇴하기 위해 (한국에) 충분한 군사적 능력을 유지해야 한다. 한반도에 대한 우리의 종합적인 목표는 한국인들이 수용할 수 있는 조건으로 평화적 통일을 지지하는 데 있다. 우리는 통일된 민주주의 한국과 동맹을 유지해야 한다"

이 문서는 한반도 전략과 관련해 두 가지 핵심 목표를 제시했다. 하나는 충분한 군사력, 즉 대규모의 주한미군을 유지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통일 코리아와 군사동맹을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그 전략적 이유는 다른 구절에 담겨 있다. "우리의 최고 목표는 (소련 붕괴 이후) 새로운 경쟁자가 부상하는 것을 예방하는 데에 있다" 당시 펜타곤은 중국이 아시아의 강자로 부상할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북핵 문제가 해결되면, 이러한 전략적 목표를 이루기가 어려워진다는 점에 있었다. 핵문제가 해결되면 남북관계와 북·일 관계는 더더욱 급물살을 탈 터였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및 북·미 관계 정상화 압박도 커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대규모의 주한미군을 주둔시켜야 할 명분은 더더욱 없어지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에 노태우 대통령의 레임덕과 정부·여당 내 강경파의 발호도 본격화되고 있었다.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는 "남북관계 개선이 야당의 김대중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비장의 카드가 있었다. 중단키로 한 팀 스피릿 훈련 재개가 바로 그것이다.

한미 국방장관은 92년 10월 8일 워싱턴에서 열린 SCM에서 "남북관계의 의미 있는 발전과 남북 상호핵사찰에 진전이 없을 경우 1993년 팀스피릿 훈련을 실시하기 위한 준비조치를 계속해나갈 것임"을 천명했다. 그런데 이 훈련의 재개 발표 사유 자체가 석연치 않은 것들이었다. 급물살을 타던 남북관계는 92년 하반기 들어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9월에 있었던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안기부 특보로 있었던 이동복 남측 대표단 대변인이 노태우 대통령의 훈령을 조작한 사건에서 비롯됐다. 또한 10월 초에는 안기부가 느닷없이 '남한 조선노동당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남한 내 강경파 스스로가 남북관계 개선을 훼방 놓고는 이를 이유로 팀 스피릿 훈련 재개를 밀어붙인 것이다.

미국의 태도도 납득하기 힘들다. 위에서 소개한 것처럼, 베이커와 체니는 노태우 정부가 북핵 해결의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움직임을 견제했었다. 미국이 선호한 방식은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IAEA가 핵사찰을 주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IAEA의 영변 핵사찰은 진행 중이었다. 그런데도 남북한 상호 핵사찰에 진전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팀 스피릿 훈련을 재개키로 한 것이다.

미국 내의 상황도 비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한국 안기부와 군부로부터 팀 스피릿 훈련 재개를 요청받은 체니는 "워싱턴의 다른 정책 부처에게 이를 알리지도, 협의하지도 않고" 독단적으로 훈련 재개를 발표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한미 국방장관의 팀 스피릿 재개 발표는 불과 9개월 전에 있었던 부시-노태우 대통령의 발표를 뒤집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아버지 부시 행정부는 이를 견제할 수 없었을까? 당시 주한미국 대사였던 도널드 그레그는 최근 펴낸 회고록 <도자기 조각들>(Pot Shards)에서 그 사유를 이렇게 밝힌다.

"치열한 승부가 펼쳐지던 미국 대선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시 대통령이 국방장관의 발표를 번복하면 민주당에게 정치적 빌미를 줄 수 있었다. 나는 국무부로부터 팀 스피릿 훈련 재개 발표에 항의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어쨌든 팀스피릿 훈련 발표로 한미 강경파들은 각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남한 내 강경파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북한은 이 방침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남북대화를 중단시켜버렸다. 그리고 김영삼 후보는 대선에서 승리했다. 대규모의 주한미군을 유지하길 원했던 펜타곤의 의도도 충족됐다. 오히려 북핵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는 이유로 패트리엇을 반입하는 등 주한미군 전력을 증강하기 시작했다. 한반도 정세가 팀 스피릿 중단과 재개에 따라 양극단을 오고간 것이다. 이 훈련 재개를 "미국의 가장 큰 정책 실수"라고 말해왔던 그레그는 훗날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장 자랑스러운 일 중 하나가 주한 미대사로 있으면서 팀스피릿 훈련을 중단시킨 것이다. 그러나 당시 미 국방장관이었던 딕 체니가 나와 한마디 상의 없이 이를 부활시켰다. 그로 인해 1991년을 전후해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에서 이루어졌던 모든 긍정적 성과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아마도 우리는 당시의 상황으로부터 세 가지 역사적 교훈과 과제를 추출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미국 내에는 한반도 평화를 원하지 않는 강경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이들을 견제하면서 미국 내의 온건파와 어떻게 협력을 강화할 수 있을 지에 대한 숙제를 남긴다. 둘째는 한국 내에는 자신의 정략적 이익을 위해 남북관계를 희생시키는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 역시 현재진행형이고, 지속가능한 대북정책을 위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이다. 끝으로 한미 군사훈련의 문제이다. 1990년대 초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팀 스피릿 훈련 중단 선언으로 본 궤도에 올랐고, 반대로 이 훈련의 재개 선언이 한국전쟁 이후 최악의 전쟁 위기를 낳았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제네바 합의 20주년 특별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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